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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들의 축제 ( 눅2:1-20 ) 본문

신약 QT

낮은 자들의 축제 ( 눅2:1-20 )

주하인 2008. 1. 7. 09:56

제 2 장 ( Chapter 2, Luke )

주님 오신 그날도

주의 영광이

하늘에 꽉 찼을 겁니다.

예수님 다시 뵐 그날도

역시

놀라운 기쁨이

있겠지요.

 

주님 어서 오소서. ..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 되었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 요셉"

낮은 자의 첫번째 모델

정황을 보아

가난한 사람이다.

 결혼한 여자가 '남의 아기'를 잉태한 것을 감수하는 자이다.

 

 그의 낮아짐은 어디까지인가?

 도저히 당시 상황으로 뿐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여자를 받아 들였다.

 그것 만해도 낮아질 만큼 처절히 낮아 졌음에도

말 구유에서

아기를 낳게 되자

신참 유부남이

아기까지 받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상황에서 무엇을 그가했을까?

안절 부절하고

마구간 바깥에 서서 왔다 갔다 했을까?

아니면

여관 안으로 뛰쳐 들어가

도움을 청했을까?

아니면 직접 물을 끓여 대아에 담아가지고

한 손에 거무죽죽한 걸레 같은

당시의 얼굴 닦는 수건 같은 것을  걸치고

직접 애기를 받고

탯줄을 끊으려 뛰어 들어 갔을까?

 무엇보다

그 마음의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뒤로하고

모든 일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그의 심사는 어떠했을까?

만일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지 않은

천사표

성인 반열의 성품을 가진

요셉- 많은 분들이 마리아 보다는 이 분을 성인이라 생각하고 기술한 글을 보았다. -이라면

그 평온한 마음은 왜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

그는 남을 위하여

철저히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

그는 자기부인을 은사로 받은

'천부적 자아 부인  은사자'이었을 것이다.

 낮아졌지만

낮아짐을 아프지 않고

주님의 원리에 따르기 위한

첫번째 원리를

여기에서 본다.

'자아 부인'

 

 또 하나의 낮은 자

    '마리아'

처녀의 몸으로 잉태를 했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 부터

그의 환경은 죽임을 당할 위험까지 감수할 정도로 낮아짐을 각오한 것이다.

애기를

마구간에서 낳는 수모를 감수했다.

수모 뿐인가?

산모는 얼마나 주위 환경에 약하게 변해있는 몸이 되는가?

마구간이란

상상하기 어려운 '감염'의 온상에서

정상 분만시

약 500cc 정도의 혈액을 흘리며

특별히 '처녀'인지라

(구조적으로 성경험이 있는 자보다 더..) 산도의 파열이 동반될 가능성이 더 많은 바,

산후 출혈 및 산후 감염이 극도로 위험할 만큼

열악한 상황에 까지

육신적으로도 최악으로 낮아져 있는 자이다.

 

  아기 '예수님"

 태어나서는 체온을 유지 받아야 한다.

아기들은 체표면적이 어른 보다 훨씬 넓어

외부 기온에 민감하여

즉시 보온하지 않으면

체온을 빼앗길 위험에 있다.

더구나, 감염에는 미약한 상태.

아기의 피부는

온갖 박테리아와 토양균에 극도로 취약한 상태.

거기에

고대의 옷감인 강보로 , 특히 여행길의 땀에 찌들은 강보로

경험이 전혀 없는

 초보 산모와

초보 아버지의 손에서 쌓여져

더럽기 그지 없는 말 구유에 놓인 다는 것은

이렇게 낮은 자가 없다 할 정도로

낮은 대우를 받고 계신 것이다.

 더구나,

incarnation(성육화) 하신 그 몸은 아기가 아닌가?

손발도 부자유 스럽고

머리도 들지 못하고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응애'밖에 없는

그 육신에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영이 담기게 되니

그 불편함을 어찌 감당할 수 있는가?

 

산부인과 의사로서

이러한 점을 상상할 때마다

십자가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성 경험이 없는

인간의 좁은 뱃속에서 10개월 보내시고

그 좁은 산도를 나오고

다시

말구유에 누이시고

움직이지 못하는

신생아의 시기를 거치시는 동안

그 부자유스러움에 대하여

어찌 견디셨을까..

하는 놀라운 감탄을 절제할 수가없다.

  고후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일부러 약해지신

그 예수님.

일부런 낮아지신

그 예수님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려 한다.

 

 이 어이없는 자를 위해서.....................


 
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목자들..

밤에 밖에서 잠을 잘 수 밖에 없을

낮은 환경의 사람 들.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그들 앞에

천사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비추었다고 나온다.

 아마도 빛이 비추이었고

수많은 천사들이

그의 곁에서 춤을 추셨을지도 모르지만..

주의 영광이 비춘다는 뜻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묵상을 해볼 요량이다.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표적

천사가 보이고

주의 영광이 비추이는 것만 해도

이 얼마나 대단한 표적인데

거기에 또 표적이 보인다 한다.

 

 말 구유에 놓인 아기 예수

그 사실이 표적이라 한다.

 

객관적으로 보면

아무 의미없을

아기가

어찌 표적이 될 수가 있는가?

남들이 다 알 수 있는 표적을 이미 보았는데...

 

 주님은

주님을

주님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들 만을

위하여

이러한 낮은 상태의 모습을 허락하신 것이다.

아기가

하나님임을

알고 보면

그 얼마나 엄청난 기적인가?

그 얼마나 엄청난 표적인가?

하나님을

말구유에서 보다니

심장이 뛰고

눈에서 불이 튈 정도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런 놀라운 일이

만일 믿음의 눈이 없이 본다면

단지 더러운 구유 속의

희한한 출생아일 뿐이 아니지 않는가?

무엇이 표적이란 말인가?

 

그러나,

낮은 삶을 살고

정확히 말하면, 낮아지려 노력하는 겸손의 삶을 추구하고

하늘의 별을 보고, 선한 마음을 가지고

맑은 공기를 맡고

무 소유의 삶을 살고

늘 주님을 인식하고 사는 자 - 마리아는 배 속에, 요셉은 표현은 안되었지만 선천적 성인이 아니고는 그의 놀라운 인내와 포용은 하나님이 뱃속에 있기에 자연스러운 '포스'에 의한 것일 것이며, 목자들은 밤하늘의 천사 대군을 보는 기적을 체험했기에 , 이들 모두 주님을 인식한 것은 사실이다. -들 만이

표적을 알 수 있다.

 

 주님 앞에 늘 서 있으려

몸부림 치는 자들 만이

매일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주위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성경을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신문에 나오는 현상을 통하여

간증을 통하여

예배를 통하여

봉사를 통하여.................

너무나도 흔하고 아닌 듯한 곳에서

놀라운 주님의 음성을 들을 기회를 가질 수 있다.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늘

임마누엘 하나님을

뱃속에 담고

눈 앞에 아기를 손으로 만지고

그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마리아는

그들의 이야기를 그냥 당연하다는 듯이 끄덕이지 않고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라 했을까?

 그녀도

요셉과 결혼한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추후의 인간의 삶을 그대로 누릴 수 밖에 없는 사람이다.

또 예수님의 동생을 낳고

세상에서 부닥치는 사람들과의 관계와

일의 스트레스 등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비록 예수님의 어머니 역할을 했을지라도

그 분도 역시 사람인 것이다.

결국

믿음은

단 한번의 은사와 기적으로 끝없이 유지될 수 없음을

너무도 당연하게

역사기록 처럼

마리아의 그 다짐을 통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을 보게 만든다.

 

 잊는 게 사람의 속성이다.

아무리 대단한 은혜도

사단의 송사에 며 칠을 가지 못하고 잊게 마련이다.

그것은 주님의 허락하심에 의함이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마음에 주님을 담고

주님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삶을 통하여 영광을 드리고

성화되어 가서

주님의 곁에 가기 위해서는

'마음에 지키어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주님은 주하인에게

주님이 함께 하셨던

그 추억을

늘 생각하고 기억하라 당부하신다.

히스기야 왕의 '주께서 함께하셨던 그 일들을 추억하옵소서' 고백 한 것처럼

돌아서 회억 보다는

잊지 않을 몸부림이 필요하다.

그 분이 내 생에 보이셨던

그 수많은 간증거리의 추억을

지금이라도 다시금 회억하시길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

 

 


 
20.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솔직히

난 듣고 느끼고 찬송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더

은사를 원한다.

 

얼마전 부터

김우혁 감독의 저서 '하늘의 언어'를 읽기 시작한다.

방언에 대한 자신의 간증서이다.

평소 방언에 대한 생각은

나름대로 긍정적이었다.

'영적인 비밀을 가지고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하나님께

성령님께서 직고하시게 하는 통로,

그럼으로

내 덕을 세우게 하는 은사'

이게

내 방언에 대한 지론이었다.

 그분도 틀림없이 그렇게 쓴다.

거기에다 알지 못하는 놀라운 체험과

더 지적인 지적까지

그 PD라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써 놓았다.

 힘이 강렬히 느껴진다.

 

이제

보고 듣고 한 것을 체험하는 목자의 입장이 되고 싶다.

그들이 높은 신앙의 경지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주님은

은사를

사람에 따라 다르게 주신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는

신비한 체험이

좀더 영적인 체험이 필요할 때라 생각이 든다.

그 체험은

조금은 이전과는 다르리라.

 

 

적용

 

1. 낮아짐을 감사하자.

 의도적으로 낮아짐을 간구할 이유는 없지만

낮아지는 겸손의 기회를

슬퍼할 이유가 없다

 김우혁감독,

최춘선 할아버지

내려놓음 - 최근에 '더 내려놓음'이란 책을 읽고 끄덕이고 있는 중 -을 쓴 몽골 이용우선교사님

오늘 묵상의

낮은 자 ( 예수님은  '분')들 네 그룹.

모두,

낮은 자들이고

낮음을 지향하는 자들이다.

 

 

2. 자기 부인이 필요하다.

낮아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 자기 부인이다.

 늘 아플 것이되

아픔을 기쁨으로 느낄 수 있는 마음자세.

그게 꼭 필요하다.

주님을 위해 낮아짐을 감사할 마음을 주소서.

이 마져 주님께 기도한다.

 

3. 예수님의 기적과

 주의 영광의 기적을 묵상한다.

 예수님이 그 나쁜 환경에서 건강하게 태어난 것이 기적이다.

주의 영광은 무엇인가?

절절 끓는 하나님의 카리스마의 힘인가?

노래하는 천사 찬양팀 선발대회 대회장의 광경인가?

스포트라이트  비치고

일대일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목자의 영광이란 말인가?

 천사가 옆에 서고

주의 영광인 걸 보면

TV 리포터 앞에

떨리는 스타와 대면하는 장면은 아닌가?ㅎ

무슨 의미가 있는가?

 

 

4. 주님은 눈에 보이는 영광 보다  말 구유에 태어난 아기를 표적이라 하셨다.

 '가까운 곳에 주님의 표적을 주실 것 같다.'

 내 구하는 것은

 내 영광인가?

하나님의 살아계심 그 자체인가?

무엇을 위하여

난 사는가?

 

5. 성경 여섯 장 읽겠다.

 

6. 아들 들을 위하여 기도하겠다.

 

 

 

 

기도

 

 

주님

낮은 자의 행운을 보고 있습니다.

주님도 낮고 낮은 자리에 임하셨습니다.

아무도 모를 그때

그들 낮은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전해 듣고 가슴에 깊이 새겨 두고 있습니다.

곁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표적이

새근새근 잠에 들어 있었습니다.

낮은 자들이

이 놀라운 체험을 하고 있을 때

원앙금침과

기름진 음식으로

편안한 생활을 하는 자들은

아무도

이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

굳이

불편함을

피하려 하지 않게 하소서.

불편함이 참으로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을

주님을 생각함으로

오히려 기뻐하게 하소서.

주님 예수님이

아기의 몸으로 갇혀 있던 것을 묵상하게 하시고

주님이

일부러 약해짐을 택하사

아기의 몸으로

십자가의 고통으로

주님 안에서 죽으시고

주님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심을 묵상하고

그를 닮게 하소서.

이리 알면서도

상황에 부딪히면

전혀 깨닫지 못하고

안절 부절 못하고 있는 저를 용서하소서.

가련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기사

당신의 능력으로 절 이끄소서.

도저히 제 능력으로 어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기 부인 마져

요셉처럼 태어나지 않을 바에

주님의 능력으로

주님의 그 엄청난 에너지로

절 바꾸사

주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자가 되게 하소서.

자존심을 없애 주소서.

주님의 뜻이 아니라 생각되는 것은

세상의 손가락질이 있어도

그냥 따르는 용기와 자기 부인의 능력을 주소서.

 가끔은 타는 듯 가슴이 아픕니다.

부인의 환경에서

생각만해도 가슴이 미어질 때가 있습니다.

주여

이럴 때 주님을 자동적으로 생각하게 하소서.

주님의 나에 대한 사랑을 생각하게 하시고

주님의 나를 위한 낮아짐을 생각하게 하시고

주님의 나로 인한 인내를 생각하게 하시고

주님의 나를 예비한 천국을 생각하게 하시어

조금은 힘들어도

인내하게 하소서.

그 인내가 내 자아의 강화가 되지 않게 하시고

그 인내가 주님의 살아계심을

제 몸으로

제 영혼으로 드리는

기도가 되게 하여 주소서.

충성의 표시가 되게 하소서.

 주여.

이제

은사를 원합니다.

왜곡되지 않고

자신 만을 위한 게 아니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의 살아계심을 닮기 위한 도구로

미약한 이 의지를 강화하기 위한

그런 도구로

저에게 은사를 허락하소서.

특별히 겸손을 원합니다.

겸손

겸손

 또

겸손할 수 있기를 원하오니

주여

받아들일 수 있고

변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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