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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 곳을 거룩하게 볼 때까지 (수19:1~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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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 곳을 거룩하게 볼 때까지 (수19:1~23)

주하인 2006. 12. 15. 09:39

2006-12-15 여호수아 (Joshua) 19:1~19:23


 9. 시므온 자손의 이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 취하였으니 이는 유다 자손의 분깃이

    자기들에게 너무 많으므로 시므온 자손이 자기의 기업을 그들의 기업 중에서 얻음이었더라  

 ( 이 한 분으로 인하여 누구든 어디든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 

 

 

(사도행전 7장) 

26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시키려 하여 가로되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

    하느냐 하니
27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모세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28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29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30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31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32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

    보지 못하더라
33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요새는 괜히 바쁘다.

연말이라서인가?

 

아침에 묵상에 집중할 틈이 없어 일찍 나오려 애쓰지만 뜻대로 잘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겨우 점심 시간을 10여분 지나서 잠시 급히 들여다본 성경이 사도행전 7장이다.

 거기에 모세의 입장이 극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이스라엘 동족의 편을 들어준 다음

나름대로 자랑스럽게 싸움을 말리려는 차

악에 오른 듯한 배은망덕한- 내가 모세 입장이라면...^^;;; -

동족의 질타에

너무나도 놀라고 두려워 광야로 도망가버리면서

40년을 있었다.

 그 과정에서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배반에 대한 화

동족으로 섞이지 못함에 대한 외로움

어리석은 자신에 대한 질타....

많은 혼란이 있지는 않았을까?

왕자에서 양치기로 40년 동안은 또? 

 거기에 나를 대입하니 화가 뛰쳐 나오려 한다. 

속상하다.

남얘기 같지 않아서..

 

 그러나

모세는 그 연단을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이겨낸다.

 

 오늘 시므온 자손이 유다의 기업에 꼽사리 끼는 듯한 모습을 본다.

다양한 느낌이 있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유다의 기업으로 들어가는 안온감도 없지 않아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자존심이 상했을 지도 모르고

약한 자신들의 처지가 자기 연민을 가져왔을 지도 모르며

악했던 증거이기도 하므로 부끄럽기도 했을 것이다.

 

 모세나

시므온이나

그들의 심사가 안타깝지만

하나

이들의 암담할 상황 속에서도 

모세는 결국 40년 후의 크게 쓰임이 예비되어 있고

시므온은 기업을 물려 받은 이스라엘 선민 족속에서 그래도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아

내 감정 상태가 어떻든

주님의 역사 속에

주님의 주권대로 섭리되고 있고

난 그 섭리 속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다시한번 주님의 날개 아래 있는 나임을 인식하게 되어 기쁘다.

 

 그러면서

모세와 시므온의 다른 점은

40년 간의 광야 생활 동안 모세의 연단 과정에 대하여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지만

'거룩한 땅 ' 이라는 단초에서

알수 있을 것만 같다.

 

 얼마 전 '여호수아'의 천사 만나는 장면에서도 '거룩한 땅'에 대한 동일한 구절이 있었다.

오늘 급히 들여다 본 거룩한 땅이란 어귀가 심상치 않아 보임이

큐티랑 연결이 되면서

무언가 주님이 다시금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주님의 상징적인 연단 기간인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광야 연단이나

모세의 40년 황무지 연단이 마치는 시점은

'거룩한 땅'이 바로

우리가 서 있는 땅이 되어 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내가 서 있는 장소 어디든

내가 처해 있는 현실이 어떻든

내가 느끼는 다양한 혼란의 감정이 어떠하든 간에

주님은 그걸 통하여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곳이 거룩한 곳임을 인지하고

스스로 일상에서

아주 겸허하고

아주 조심스럽고

늘 주님을 의식하고

늘 기쁨 가운데 거하며

발걸음 하나를 옮기고

손을 하나 들며

눈으로 쳐다보는 하나도

입을 떼어 나오는 모든 언어 하나하나가

아주 조심스러워지고

아주 조용 조용해지며

슬픔에도 과도하게 슬퍼하지 않고

기쁨에도 너무 기뻐하지 않으며

아픔에도 지나치게 소리내어 반응하지 않는

그런 상태가 될 때..

그리고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

두려움이나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의 탓이 아닌

정말

주님이 좋고

주님이 기뻐서

아주 아주 자연스럽게 나오는

일상의 현상이 될때..

 또한

그로 인하여

나 뿐 아니라

내 이웃이 나로 인하여

기뻐하고 

주님을 의식하려는 의도를 가지게 될 때

그때야

바로 내가 선 땅이 거룩한 땅으로 인정이 되며

성령께서

인정하시는 거룩한 성인의 경지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게 될 것이다.

 

시므온은

더 이상

성경의 역사에 큰 민족으로 ,

아니면

사무엘서의 사울왕 같은 베냐민 족속의 인물 얘기처럼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거룩한 땅에 서지는 못하는 족속인 듯 싶어 안타깝다.

 

 이제

오늘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는 이렇다.

 

1. 나의 삶 속에 펼쳐지는 모든 일은 당연하지만 주님의 역사의 한 장면이다.

 

2. 그 역사가 언제가 끝일지는 누구도 모른다.

 

3.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려움과 황무지의 황폐한 나른함 조차 주님은 기다리면 선한 끝으로 인도하신다.

 

4. 내가 서 있는 현실을 그냥 황폐함으로 보기보다는

 거기에 지나치는 수 많은 만남들이 주님의 의도대로 보여야 '거룩한 땅'이 되는 시점이 된다.

 

5. 거룩한 땅은 내 삶으로 느껴질 것이다.

  내 영혼이 알 것이다.

 

6. 조금만 기다리자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늘 있어온 혼란의 감정 중에서도

조금만

주님을 바라고 인내하고 기다리면

언젠가

내 주위가

상황의 여부에 상관없이 거룩한 땅으로 인지가 되고

주님께서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경우가 있으리라 압니다.

 

비록

현재의 내 기업이

현재의 내 나누어짐이

현재의 내 상황이

만족스럽지 않고

한편으로 부끄럽기 까지 할 수도 잇지만

그럼에도

주님은

나를 향한 역사를 쉬지 않고 계시는 줄 압니다.

주여 감사하나이다.

늘 신실하신 우리 주님의 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믿습니다.

그 변개치 않으시고 영원하신 우리 주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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