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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

내가 바라보는 하나님(렘 15:1-9 )

주하인 2009. 10. 5. 11:49

제 15 장 ( Chapter 15, Jeremiah )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열심히 찍어 두었던

사진을 모아

詩畵( 詩寫인가? )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시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저 같이 둔한 자에게는

날마다의 회개로 

정결한 마음이 있어야 함이

절실한 것을,

요즈음은 그러지 못함이

죄스럽고 안타깝지요.

 

주님의 용서해주심을 믿고

십자가 앞에

 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치라 
 설령 모세나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서 중보를 하더라도

마음을 돌릴 수가 없으니 '이 백성을 내 앞에서 쫓아내라'라고 하신다.

어딘가 익숙한 소리.

 

'너는 도저히 안되어.'

'어찌할 수없는 자야.'

.........

마귀의 송사 소리 같은 소리.

오래 전 아버지나 친구나... 왕따와 정신적 고난을 겪은 자들이 겪었을,

아니 아직도 그들의 뇌리에서 돌며

좌절하게 만들고 우울하게 만들 것 만 같은 소리.

그것을 주님이 하신다.

 그게 놀랍다.

왜 이신가?

무엇이 문제이던가?

정말 주님은 사랑 만은 아니셨던가?

그분은 절대 변개치 않을 분이시고 나를 위해 돌아가신

절대적 사랑의 주님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왜 이리 아픈 소리,

무서운 소리,

위에 적은 '안 좋은 존재'들의 소리와 달리 들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대상을 생각해 보았다.

그 저주를 받는 대상.

그들은 '회개'치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었다.

현재, 그렇다는 이야기다.

과거는 주님이 그토록 회개를 촉구하셨었다.

 

 그렇다면 회개를 한다면 달라질까?

당연히다.

달라지고 축복이 올것이다.

계속되는 성경의 말씀이 그 증거이다.

 

 저리 말씀하시는 주님은

그 대상이 너무도 정신적으로 유약하고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달래기도 겁을 주시기도 하시는 것이시다.

 아.

아버지 같다.

 


 
2.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
  어찌 어찌 애를 써서

포로된 상황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려 해도

'포로될 자는 포로될 수 밖에 없는 운명'같은 깊은 묶임 같은 게 있을 때가 있다.

가끔은 그게,  스스로 도저히 그럴 수 밖에 없을 죄인 인 듯해서 그리 느껴질 수 있다.

깊은 자기 연민.

그것에 사로 잡힌 자가 '포로'다.

포로될 자는 포로됨으로 나아간다.

 무슨 뜻이신가?

회개 없이 '기복'만을 위해서

주님을 자신의 욕심으로

주님을 또다른 우상 단지로 만들어

복만 비는 신앙으로는

아무리 포로에서 풀어달라 울고 금식기도를 해도

어린 신앙은 들어주실 지 모르지만

되풀이 되는 지진아 신앙인은 그 포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다른 내용도 마찬가지다.

사망은 .. 칼은...기근은....

 

 

 일요일 예배를 마치고

교회 정문에서 우측으로 바로 돌아가면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 앞 쪽에 키가 2m 높이 정도에 주황색 장미가 멋드러지게 피어

하늘 하늘 거리고 있다.

그 아래에서 올려다 본 하늘은  가을 하늘의 전형이다.

깊은 하늘에 구름이 깃털처럼 예쁘게 붓으로 그린 것처럼 보인다.

올려다 보는 시야에 걸려드는 주차장 옥상의 전등이

장미의 그것과 더불어 하늘을 멋지게 장식하고 있다.

카메라를 꺼내들고 애써 지렁지렁 늘어져 있는 전선줄을 피하여

그 장미와 전등이 꾸미는 하늘을

가장 앵글 좋게 찍어 내려 이리 저리 몸을 돌리는 사이

나이드신 권사님을 포함하여 중년의 주부님들을 포함한

일체의 무리가 궁금하신 듯 주위에 몰려 들어 한마디씩 거드신다.

' 장미가 아름다워요...'

' 빨간 색이 .. '

그래서 그랬다.

' 장미를 찍는 게 아니고 장미를 포함해서

조..기.. 저 전등을 잘라내어 하늘을 .. ' 하니

다들 한마디씩 하신다.

 '그렇네 , 어떻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지..?' 하며 감탄 하시는 분들도 있구.,

 여전히 장미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분도 있으시고

연세드신 권사님은 '잘라낸다'는 소리 만 들으시고

원예나 '전종'에 대하여 말씀을 하신다. ㅎㅎ

 

 그걸 보면서 다시한번 느꼈다.

똑같은 모습,

즉 내가 사진 찍는 그 모습을 가지고도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하게

자신의 경험대로 나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

즉,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다..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오늘 묵상은 두렵고, 딴 때보다 더욱 버걱버걱하다.

그분의 말씀이 두렵기만하다.

특별히 저주의 말씀처럼 느껴진다.

그 저주의 말씀 중에는

'모세나 사무엘 같은 너희들이 그토록 의지하는 자를 앞세워도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포로된 자는 포로됨을 벗어나려고 노력해 봐야 헛수고다...'

'사망... 칼.. 모두 헛수고..' 라는

절망을 자극하는 말씀이 있으시기에 더욱 무섭다.

 하지만,

한번 다른 면을 보면

'회개'를 하지 않는 이스라엘 인을 혼내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너무 혼내시는 하나님 , 절망적인 하나님의 소리 만을 사진찍고 있지는 않던가?

그것은 반대면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진을 찍어 볼 수만 있다면

회개를 하기만 하면 '확 돌아서실'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조금더 예술적으로 사진을 찍을 수만 있다면

속으로 울고 계시는 '눈물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애타는 하나님'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자식들이 커가면서

그 자식들이 생각보다... 할 땐

마음이 타는 비율도 커 간다.

더더구나 그 마음의 표현이 사랑으로 된다면

서로간에 얼마나 귀하고 좋을까 마는

사단의 세상에서 살면서

사단의 세상에서 영향을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커왔고

그들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 기독교인들은 아닐까? 

다 마찬가지다.   예수 재림하심으로 온전히 익은 열매로 추수될 사람 들 빼놓고는

누구나 다 죄악성이 있다.    세상은 사단의 다른 모습으로 표현됨은

누구나 다 아는 신학적 사실이다.  -  우리라고 무엇이 다를까?

마음과는 달리 서로 상처를 주고 받고

그것이 딱쟁이가 지워져 온전히 아물기도 전에

또 상처를 주고....

죽기 전까지 온전히 아무는 회복을

주님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인간에게서 가능할까?

 받는 사람 뿐인가?

 주는 사람의 가슴에는 또한 깊은 앙금이 남아간다.

이 사단의 포로된 듯한 가슴앓이.

죽을 때까지 성화되기 위하여 몸부림 치면서

주님의 은혜 가운데 거할 때는 얼마든지 가능할 듯 싶지만

또 조금 방심하면 여지없는 ........

주님께서 만일 오늘 말씀처럼

'넌 불가능한 자야.

 너는 도저히 내가 원하는 자리 까지 올라올 수 없어.

 너의 성화라 생각하는 몸부림.. 모두 거짓이야.

 내가 얼마나 더 참을까?

 내 십자가의 못박혀 죽은 게 너에게는 다 헛 수고가 되고 말았구나......................'라고

말씀하신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내 좌절된 인생의 낙없음이 끝없이 나락으로 내려가야 하지 않을까?

그 아픔....................................

그 칼로 쑤시는 듯한 통증.............

에린 상처의 아픔.........

포로된 자의 답답함....

죽어버릴 것 같은 사망의 암담함...........................

그것을 주님이 절대로 풀어주지 않는다 하신다면...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말씀의 대상은

다시 쳐다보고 돌아보고 뒤로 가서 본다면

그것은 '회개 만 한다면..'이라는 전제가 있다.

 십자가.

그 첫사랑은......이전까지의 죄씻음이다.

매일의 죄사함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한

내 회개가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영혼이 살아난다.

주님이 예비하신 천국에서 온전히 누릴 자가 될 것이다.

 

 오늘 무서운 말씀 중에

주님의 눈물을 보고 있다.

아.

가끔 무서운 경계의 소리는 자식 교육에 없을 수 는 없다.

지나친 사랑은 방종이기도 하다.

 

 

 

적용

 

1. 회개한다.

 너무 지나친 화와 걱정은 불신이다.

 회개한다.

 

2. 자식의 현재를 봄도 불신이다.

 주님은 미래를 약속하셨다.

 미래를 봄이 믿음이다.

 

3. 중보하자.

   아버지 학교 가겠다.

   기도원 간다.

 

4. 주님은 사랑이다.

   그 분은 날 사랑하신다.

   날 위해 죽으셨고  날위해 사셨다.

  

5. 성경 일곱장 읽겠다.

 

6.  기다리고 인내하자.

   절대로...

 

 

 

기도

 주님.

귀하신 주님.

절 용서하소서.

주님

추석날 깨어있지를 못했습니다.

영적으로 계속 죽어 지냈습니다.

다행이 속상함을 표출하지는 않했지만 

내 속은 뒤죽 박죽이었답니다.

주님

아시지요?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요?

주여

더욱 안타까운 것은

제가

알면서도

알면서도

회개의 기도조차 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안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사단의 포로가 된 것 처럼요.

말씀 표현이 어찌이리 절묘한지요.

그러면서 아침 묵상 구절은 더욱 무서웠습니다.

다행이도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주님 말씀을 잡을 의지를 내었지만

구절구절의 무서움을 보고 싶지 않다는 유혹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주께서는 깨달음을 허락하셔서

걸어나오는 동안 생각을 곧게 주셨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포로된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제는 ..

그것은 제 회개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의 탓인 줄 압니다.

주여

늘 지켜 주소서.

늘 깨닫고 경험하게 하시고

주의 사랑을 체험하게 하시고 영혼에 확신으로 뿌리 박게 하소서.

주여.

흔들리지 않는

올바른 시선을 주소서.

주님의 사랑을 주소서.

참... 간절히 소원할 것은

이제 그동안 모아왔던 사진을 가지고

시화,,. 아니 시사 작업을 하려 합니다.

주여.

그것을 통하여 영광을 올려 드리고

저로서는 제 안에 영감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확인하는 결과로 작용하소서.

그리 축복하소서.

액자로도

聖 詩畵 , 혹은 聖 詩寫 집으로 출판했으면 합니다.

주여.

인도하심 따라 그러고 있습니다.

아니면 막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앞을 나서지 않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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