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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답을 주셨네( 렘15:10-21 )

주하인 2009. 10. 6. 11:46

제 15 장 ( Chapter 15, Jeremiah )

 

 

살다보면

무슨 일이야 없겠냐마는

그 억울함을

주님께 맡길 때에야

그림자 인생임을 깨닫게 되고

자유로와 질 수 있지 않을까?

 

  

  어제.

연휴 다음 월요일.

지난 추석 전 '목요일' , 연휴 시작 바로 전날이라

당직을 서고 나서 시골에 다녀왔다.

 어제는 수술환자 두분이 예약이 되어 있고 오전에 연휴 중 못보았던 환우들이

밀려 들어와 정신이 없었다.

 한 분 수술을 어렵게 - 안양 지역은 왜그리 혹이 큰 분들이 많으신지..^^;;- 마치고

저녁식사를 부리나케 마치고 연달아 수술을 한참 하고 있는데

여성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고 한다.

수술 중이라서 전화를 받지 못하는 데 급하다면서 꼭 받으라 한다.

받고 보니 짜증섞인 목소리의 동료의사가 질타성으로 

'당직인데 왜 연락이 안되냐' 한다.

그러면서 '분만 대기 중' 환자가 곧 출산될 것 같은데

아무도 갈 수가 없어서 당황된다 한다.

 연휴 직후 또 당직.

참.. 생각할 수도 없었던 상황이고

더구나 생각할 수 있었어도 수술 중인데 ...

하지만 무엇보다 급한 것은 '분만'이다.

알았다고 하고 다행이도 빨리 끝낼  수가 있어서

수술을 급히 마치고 수술복 갈아입지도 못하고

옷을 챙기고 가방을 들고 양말은 호주머니에 집어 넣은 상태로

여성병원으로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 타고 갔다.

가서도 한참 지나서야 분만이 되었다.

 밤새 몇차례나 깨고

분만을 두 분 더 새벽에 받고...

나름대로 어제 묵상 구절이 있어서

기도와 묵상하며 지낸 탓인지

덜 피곤 - 정말 영적으로 깨어 있으려하면 피곤도 덜함을 자주 느낀다... 그런 경우가 많지 않아서

죄송할 따름이지.ㅎㅎ - 하게 당직을 마무리하고는 오히려 더 개운하게

일찍 눈이 떠진다.

 

 아침에 눈을 뜨니 갑자기 속이 상하려 한다.

이 속 자주 상함은 아주 연약한 감성 탓이기도 하지만

나이 들면서 그런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슬쩍 슬쩍 올라올 때가 있다.

 어제 , 난 혼난 것 만 같다.

상황은 이해가 가지만 혼날 이유가 없다.ㅎ

이 엉터리 같은 머리는 속상함으로 상황을 몰고 가려한다.

 잠시 정지했다.

이제 어떻게 행동할까?

이전 같으면 '화'를 선택했을 나지만

그래도 말씀은 나에게 늘 부담이 된다.

그렇다면 화는 내지 않되 어떻게 할까?

일단은 '의견'을 피력하는 가, 마는가..다.

 의견을 피력한다면 적당한 글 표현으로

I - message써서 나름 덜 속상하게 받아들이게 하면서 

내 자존심을 살릴 자신은 있다.

그 것을 전하는 방법.

진료 프로그램 내의 '노티'를 쓸까?

메일을 쓸까?

메시지로 보낼까?

......

에구.

아무래도 모습이 이쁘질 않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자주 조언을 얻는 분.

그러면서 주님이 떠오른다.

'예수님이라면 어쩌셨을까?'

주로 참으셨다.

억울한 일을 일일히 해명하지 않으셨다.

입을 다무셨다.

그렇다면 , 바보되는 것이 아닌가?

바보가 되는 것이 약해지는 것이 강해지는 주님의 원리가 아니던가?

 위에 생각한대로

세상적인 , 나름대로 훌륭한 방법론이 여러가지가 있지만

주님의 영적인 원리랑은 조금 상반된 소견이다.

그래도 이 복잡한 중년의 머리가 마구 돌아간다.

 아침.

복잡한 생각으로 시작하게 되었지만

나름 영적으로 맑아서 인가?

가만히 묵상기도 하다 보니 '큐티'를 안했음이 생각이 난다.

그래.

말씀을 보면 무엇인가 답이 있지 않을까?

 

그래

주님이 답을 주신다.

살아계신 그 분이..

 

 

15.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컨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권고하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

     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을 인하여 나로 멸망치 말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치욕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주께서 아시오니'

그렇다 그 분은 분명히 아신다고 하신다.

내 이 복잡한 마음을 아신다.

어제의 일이, 억울한 일인지 아닌지

그것을 표현하는 것을 선택하든 안하든

이 나이에 - 혼 낼 나이.ㅎㅎ - 에 혼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창피한 일임을 느낌을 아시고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시작하시니

마음이 누구러진다.

주님은 날 공감하신다.

 

' 원컨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권고하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원수는 아닐 지라도

박해가 아니고

서로가 그렇게 당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더라도

조금은 나이든 나에게 겸손한 표현을 하지못하는 '원수 아닌 원수'를

직접 보복하지 않고

이 속상함을 주님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기도다.

예레미야님을 보라 .

억우하고 속상해도 직접 대꾸하지 않으신다.

철저히 맡기고 기도한다.

 답은 나왔다.

 주님은 그냥 가만히 있으라 하신다.

자꾸만 그래도 그래도.. 하는 내 마음이 결정이 되었다.

그래.

가만히 있으리라.

 

 주를 위하여 내가 치욕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도장까지 '꽝'하고 찍으신다.

'주를 위하여 '

내가 '치욕당한다'

치욕으로 생각되게 하는 사단의 이 아침의 장난을 아시고

나를 위로 하시는 것이시다.

그럼에도 '주를 위하여' 약함을 기뻐하고 곤란을 기뻐하는 것이

주님이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임을 확인시키신다.

' 주를 위하여 내가 치욕을 당하네요.

 이 나이.

 바뀔 수 없는 굳어진 나이들.

 거기에 교만하기가 극을 달리는 주모.

 어디가서 주님이 원하시는 겸허한 자로 바뀌리이까?

 주님의 은덕입니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이 치욕을 통하여 내 영혼이 성화되어가는 것을 보시려 하시네요.

  알았습니다.'

 

 


 
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

     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

 그렇다.

나는 주님과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는 자다.

난, 더 이상 주님의 이름을 생각 나지 않게 하는

세상의 권력있는 자,

성공한 자

대단히 뛰어난 자

능력있는 의사

멋진 남자

애들 교육 잘한 아빠........ 소리는 듣고 싶지도 않고 생각할 수도 없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주님이 안 계신다고 가정되는 이 세상은 살고 싶지를 않다.

살 아무런 이유가 없고 소망도 없고 재미가 없다.

목표가 없다.

 난 왜사냐고 묻는다면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라 답한다.

무슨 에너지로 사냐고 하면

'주님의 평강의 기쁨'을 에너지 삼아....

그러기에 죄를 지어 주님께 멀어지는 듯하면

죽도록 힘이 들다.

그래서 조금은 덜 죄를 짓는다.  

사실이다.

은혜 받을 때와 은혜 받지 못할 때의 나는 너무 천지 차이다.

변화하는  빈도가 점차 줄어들고

은혜 없을 때도 속상한 표현을 덜하게 되어가기는 하지만

지옥과 천국을 왔다갔다 한다.

그런 나에게

주님의 말씀은

날 도장찍은데 한번 더 확인시키시는 것이시다.

그러기에 나는 '나는 주의 말씀으로 기뻐하고 마음에 즐거워 하는 자'  다.

오늘 아침 도~ 그렇다.

주님의 말씀으로 기뻐하


 

 

18.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찜이니이까   

 그런데도 드는 마음의 부담조차

하나하나 다 대신 말씀해 주신다.

'어찌 .. 이리 나이가 들어가는데도

 상처의 아픔은 여전하고 그것을 긁는 비슷한 소리만 들어도

 민감히도 반응하게 되는가?'

창피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다.

주님은 그 마음 아시는 지 대신 부르짖어 주신다.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않음은 어찜이니까?'

 

 

 

20.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1.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속하리라 
 이 구절을 읽어가면서

갑자기 주하인이 놋으로 만든 자처럼 느껴진다.

그러면서 찔러오는 아픔의 소리들이 내 놋피부를 찌르지 못하고

미끄러져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지겠다' 하신다.

위안이다.

기쁨이다.

든든하다.

 


 

적용

 

1. 주님은 살아계시다.

 늘 웃자.

 웃어도 되는 운명이다.

 

2. 영이 맑아지면 건강해진다.

 기도하고 주님을 가까이 함이 행복의 지름길이다.

 모든 근심버린다.

 

3. 외운다.

   15절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컨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권고하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

       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을 인하여 나로 멸망치 말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치욕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4.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자다.

    주님 욕을 입히지 않게 조심하자.

   말 조심하자. 

   눈을 내리 뜨자.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5. 말씀을 기쁨으로 읽자.    일곱장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이고 내 마음의 즐거움임을 명심하자.

 

6. 모든 걱정 내려 놓자.

   18절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찜이니이까   
 주님은 내 모든 것 다아신다.

 

7.  일체의 대꾸를 피하자.

   변명할 생각을 버리자.

   예레미야님은 주님께 기도만 했다. 

   예수님은 입을 다무셨다.

 

8. 아들들.

  미래의 모습을 보자.

  주님께 기도할 수 밖에 없고 주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기도

 

   참으로 복잡한 자가 저 올시다.

주님.

참으로 민감한 감성을 가진 자가 저올 시다.

어떤 때는 그게 예술처럼 나를 감동시키고

주님의 임재함을 전율로 느끼도록 하는 영감으로 작용하지만

가끔은 주여.

아픔으로 존재하여 날 힘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떨 때는 벗겨진 상처에 모래를 끼얹은 듯 아프려 할 때도 있었습니다.

주님.

주님을 모를 때는 나름 강한 육신의 힘으로

남을 억누르는 억제와 통제의 노력을 하고

겉으로는 화로 표출되기도 했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이 기뻐서

그 방향을 트는 과정에 있지만

주여.

아직도 넘어지려 할 때도 없지 않습니다.

주님,

난 주님의 이름으로 이제 일컬음을 받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 안에서야 난 존재의 의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게 자랑스럽고 사랑스럽습니다.

가끔은 그렇지만 흔들릴 때는 무거움도 더 큽니다.

주여.

 말씀의 그 기쁘고 마음에 즐거운 체험이 쌓여감에 따라

이제 선한 쪽으로 방향을 틀어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내 이 엉터리 같은 심성이

주님을 더 가까이 느끼는 영감으로 발전하고

주안에서 절 더 겸손하고 겸허하게 만들수 밖에 없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어

가끔은 문질리는 상처처럼 아프기도 하지만

더 큰 성장의 도구로 느껴져 한편 기쁘기도 합니다.

오늘.

괜하게 원치않던 흔들림이 전 흔들려던 시간에

주님은 저를 붙드시고 가르치시고 공감하십니다.

사랑이십니다.

주님.

 주님은 기쁨이시고

내 마음에 즐거움이 맞습니다.

주여.

사랑하시는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이 절 사랑하시므로

저도 주님을 사랑하여이다.

그렇지 않아도 철저히 사랑할 수 있는 그 날까지

주여.

저 말씀으로 성령으로 붙드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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