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내가 내가[갈1:11-24] 본문
빛의 방향에 따라
시간에 따라
그림자 달리 보이듯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진정한 내가
과연 맞을 것이던가
세상의 그 변화 무쌍한
조건에 비치는 내가
과연
옳은 내가 맞던가
지금의 나처럼
참으로 완전하지 못했을
그 부모와 형제의
눈과 입에 투영된
내가 또한
옳은 내가 맞을건가
그럼에도
아직도
내가 내가 내가 하며
나를 주장할 용기는
과연
어디에서 나온 건지...
이제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함을
다시금
명심하여야 할 것이고
내가
살아갈 삶의 뱡향은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만이
옳은 것임을
명심 또 명심하여야 하리라
1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여기서의 '내가'는
하나님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고 싶어 안달하는 '내가'다.
또한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완전히 뒤집혀 버린
그 '내가'다.
13.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여기서의 '내가'는
이전의 그, 기세 등등하던 바울의 자아다.
15.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러나 그 두 '나' 가 다른 나인가?
아니다.
모두 같은 '바울님' , 같은 '나'다.
예수께서 쓰시려고
어머니의 태로 부터 부르시고
은혜로 부르신 같은 '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저리 다른가?
하나님의 뜻이시다.
하나님의 시간이시다.
우리가 알수 없는 온 우주를 넘나드시는 하나님의 의지에 따른 프로그램 탓이시다.
24.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나를 태에서 택정하시고 만드시고 지으시고
백발까지 노년까지 안고 품고 구하여 내실
그 프로그램 안에 따라 시간별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모두 예정론에 묶여서 우리의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진행되는
그런 인생이라면 전혀 노력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라는 단어를 통하여
우리의 의지와 깨달은 자의 달라진 세상관을 보여주시려 하심이다.
사도 바울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한 계시를 따라
드디어 이전에 마음껏 세상에서 자신의 주관대로 살던 시간을 넘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게 될 자신으로 각성되었다.
이때 그는 순종하고 자신의 선택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3년간의 광야 생활 후
인격의 대 변혁,
하나님의 뜻만으로 그 영혼을 완전히 채우는
자신은 죽고 예수 만 그 영혼에 살아 움직이는
온전한 성화의 인격으로 변혁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을 위해 '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온 영혼으로 받아 들이고
그의 안에 서슬 파랗게 살아 움직이던
불신의 영들에 의한 이전의 '자신' , 이전의 내가.. 에서
하나님의 영광 만을 위한 '내가'로 바뀌어 버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단순하게
자신의 결심,자신의 선택을 선언한다.
"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겠다. "라고...
그의 달라진 인생관, 세계관, 우주관은
하나님의 프로그램에 적극적인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의 이러한 '자기 선택'은
이후 '수십 수백억의 사람'들의 영혼을 구해내게 되었다.
나.
분명히 안다.
사도 바울님의 저런 '내가'라는 같은 표현 안에
확실히 다른 세상을 보는 시선을 안다.
이전 불신의 내가 보는 세상과
지금 예수님의 은혜로 보는 세상이다.
막연히지만
나로 인하여 세상에 영향으로 미치시려는 도구가 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삶을 살려는
마음의 기본을 유지하고 있다.
아직 ... 저 분.. 저 위대하신 사도 바울님의 행적을 따라
과감히 박차는 ... 그런 대단한 성품이 없음이 속상하지만
내 일상에서 깨닫는
많은 영적 빈틈을 채우는데 나름' 사명'을 가지고 있다.
내 '말씀' 묵상에서 얻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들을
매사매사 찾아서
그 기쁘시고 놀라우신 하나님을 믿는 행운을
세상에 알리려
나의 조건에 가장 맞는 .. ( 시간도 부족하고 .. 자신감도 부족한 ^^;; 이유.. ) 인터넷에
이리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매일매일 나의 그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이라는 명제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매일의 감동을 놓치지 않을 몸부림이 필요하다.
그러나, 돌아보면 조금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음을
알면서도 떨쳐 버리지 못함은 죄송하다.
내가
여기까지 살도록
내가
여기까지 살면서도 이전.. 그토록 오랫동안 예상되던 불행에 ...전혀 허덕이지 않도록
내가
그러면서도 매일의 기쁨을 유지토록 하시는
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더욱 알리기 위해서는
조금은 결단이 필요할 시기다.
그것을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나로 인하여 깨닫도록 인도하신다.
적용
1. 오늘은 당직이다.
당직동안 TV를 틀지 않겠다.
눈을 사로잡는 일단의 것들은 다 피하겠다.
나로 말미암아 조금 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들어내기 위해서는
조금 더 정갈해야 한다.
가능하면 더욱 친절하겠다.
예수님의 기쁨을 아는 자로서 '분'이나 급한 '품성'은 어울리지 않는다.
2. 성경 세장 읽겠다.
성경 읽는데 게을러 졌다.
다시 읽겠다.
3. '내가' 라는 단어를 묵상하자.
이전의 '내가'와 지금의 '내가' 보는 세상은 너무나 다르다.
그럼에도 아직도 불신의 '내가'보는 눈이 슬쩍 . .. 나를 가린다.
말씀으로 중심 잡자.
4. 감사하고 살자.
나를 태에서 부터 택정하시고 지금껏 이끄셨다.
앞으로도 더욱 '선'한 방법으로 이끄실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세상의 내기준으로 그 '선'함을 보려 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무조건 선하고 귀하다.
내 영생은 너무나 황홀할 것이다.
내 인생은 앞으로 더욱 소망있을 것이다.
지금 내 가슴에 소롯이 벅차옴을 느낀다.
5.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자.
묵상하고 가슴에 담고 다니자.
말씀이 이해가 되고 가슴이 뿌듯한 하루가 될 것이다.
늘 그랬다.
가슴에 깊이 안오고 머리 속에서 그럴 듯 한것은
그날 붙들면 결국 감동으로 이해가 되었다.
기도
주님.
오늘도 말씀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내가 내가 내가 .. 하십니다.
그러나 그 내가 .. 라는 표현에
이전 무서운 눈의 사울님의 시선을 느낄 수 있기도 했고
예수님의 영으로 충만한 눈으로
온세상을 '긍휼'히 보아 안타까운 서두름의 눈도 느낄 수 있습니다.
비판과 절단과 교만의 세상과
사랑과 아쉬움과 안타까움의 세상이
한 바울님의 시선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두 열정'이 방향은 다르지만
바울님의 내적인 에너지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절 보아도 그렇습니다.
전혀 다른 세상관을 가지고
빨간 세상과
제대로 맑은 세상을 보는 저의 눈을 느끼면서
제대로 보기시작하는 눈을 주신
그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다시금 확연히 감사로 다가옵니다.
주여.
이제 바라올 것은
아직도 세상의 습관의 찌기
수십년동안 저를 붙들어오던 좋아하는 찌끼들을 더 털어주시사
하나님 일에 더욱 열심을 보이게 하소서.
얼마 남지 않은 장해...물..
아직도 연하게 남은 육적 성질의 끈적임들..
주님을 위해 털어주시고
오늘 사도 바울님이 고백하시던 대로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매사에 ..
이제는 더욱 크게 드러낼 수 있도록
오늘 하루 쓰소서.
주님 간절히 바라옵기는
어제 기도원 목사님의 말씀대로
제 아들들.. 아직 독수리가 던졌다 받았다 하는 것처럼
어려움에 있으니
그 어려움이 그 연단의과정임을 이해하고
더욱 힘을 내게 하소서.
저도 지치지 않는 눈을 주소서.
힘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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