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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로서 버릴 고집 ( 렘 42:15-22 )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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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로서 버릴 고집 ( 렘 42:15-22 )

주하인 2010. 5. 8. 10:00

제 42 장 ( Chapter 42, Jeremiah )

 

 

 마치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언제나 영구할 것 같던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도

그 끝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

 

날이 저물고

세상이 어두움에 갇힐 때

주님 불현 듯 오시면

그 때

과연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 수 있을 것이던가 

 

끝까지 남아야 한다

죽도록 주님을 붙들어야 한다

광풍이 불고

회오리 휘몰아쳐도

주님 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 분 만을 붙들어야 한다

 

남은 자로 

주님 곁에 서 있어야 한다 

 


15.  너희 유다의 남은 자 이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만일 애굽에 들어가서 거기 거하기로 고집하면
  남은 자.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 유다의 남은 자들은 남아 있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남아 있는 자의 개념이 아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영적으로 실제 '남아 있는 자'로서 남아 있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성경은 남아있는 자들에 대한 축복의 말씀이 많다.

그중 이사야서46 장에 '이스라엘의 남아 있는 자는 내 말을 들어라..... 백발까지 품겠고...

내가 지었은 즉 안겠고 품겠고 구해 내리라'는 말씀이 있다.

그 남은자..

그 남은 자 되기 위해서는 고집을 버려야 한다.

자신이 고집인 지 모르는 고집을 버려야 한다.

이들 유다인들은 하나님을 찾았지만 '당신의 하나님'을 찾은 자들이다.

진정으로 남아 있는 자는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을 체험한 자들로서

그 사랑이 귀하고 감사하여

그 친밀한 안아주심이 감사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남아 있는,  아니 남아 있을 수 밖에 없는 자들이다.

 

 나.

아직 양다리다.

이전에 수년간 남아 있는 외로운 자의 연습을 했었다.

' 전인치유'....

아직도 그러나, 흔들린다.

 


  
 
 
17.  무릇 애굽으로 들어가서 거기 우거하기로 고집하는 모든 사람은 이같이 되리니 곧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을 것인즉 내가 그들에게 내리는 재앙을 벗어나서 남을 자 없으리라
 여기도 '고집'이 나온다.

'애굽으로 돌아가서 거기 우거하기로 고집한다.'

이들 타의에 의하여 남아 있게 된자들은 - 가난해서, 힘이 없어서 안끌려가고...- 

예레미야의 하나님을 찾아와서 열심히 기도하고 빌지만

그들의 고집대로 이루어지길 기도하고 비는 것이다.

그 고집은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은 '세상'의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살아야 할 남아 있는 자들이

세상적인 축복 만을 바라면서 그 방편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고

그러면서 그것을 비는 것이다.

 

 나에겐 이런 모습은 없는가?

왜 없겠는가?

영적인 일이라 착각은 하지만 그게 아닐 듯한 것.

주님을 옳게 믿는다고 , 방향을 잘 잡았다고 착각은 하지만

영적 안온감 만 추구하고 기쁨 만 사모하다가

약간의 고난과 고통 만 오면 한동안 주저 앉아 있는 모습.

  
 
19.  유다의 남은 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 일로 하신 말씀에 너희는 애굽으로 가지 말라 하셨고 나도

     오늘날 너희에게 경계한 것을 너희는 분명히 알라
  또다시 그러신다.

'유다의 ' '남은 자들아'

유다의..라는 말씀으로 강조하시는 것은

깨달아 자신의 본연의 모습,

사랑 받는 유다같은 기독교인으로 다시 거듭나라는 권면의 안타까움이시다.

남아 있으라 .. 하신다.

 

 

 
 
20.  너희가 나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보내며 이르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

      하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고하라 우리가 이를 행하리라 하여 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
 정신을 차리라 하신다.

마음을 속인다는 의미는 자신 조차 기만한다는 말씀이다.

주님 만을 찾아와 빌기만 하면 다 똑같은 기독교인, 올바른 신앙인으로 착각한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불신앙일 수도 있다.

 

 

 

 왜 이리도 어려운가?

사는게 끝이 없이 되풀이 되는 어려움의 바다인 듯하다.

한동안 편안한가 싶더니

두개의 깊은 고민이 날 누른다.

실체가 있는..

뭐라 얘기하기도 곤란한 고난이

어제 저녁 하기오스 찬양팀 찬양 중에 울리던 '몇통의 전화'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러던게 문제를 고민하기도 전에

'환우'의 문제가 나를 뒤 덮는다.

경과가 예상치 못하게 변한다.

아침과 점심의 경과가 사뭇다르다.

토요일, 당직을 월요일까지 여성병원에서 서야 한다.

어쩌나?

머리가 터질 듯하다.

마음이 멍하다.

 

 이럴때...

아무 생각도 못한다.

그러면 우선 도외시 되는 것이 '블로그'에 말씀 묵상 올리는 것이다.

글 쓰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난, 이 일을 통하여 내 게을러진 주님과의 조용한 시간을

그나마 놓치지 않는 유일한 기회다.

그것을 다짐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이 생기면 난 멍해진다.

그리고는 하나님도 이해하시겠지..라는 막연한 기대와 더불어

'멍 따'가 내 행동 방편이다.

여지없이..

그 이면에는 '하나님'을 경히 여기는 마음이 없지 않나 싶다.

거기에 힘듦을 이겨내는 내 정신 방어기제도 한몫한다.

그러다 보면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고난이 올때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기보다는

혼자 영적 애굽땅으로 도피해버리는 것이랑 다름없다.

힘을 내서 묵상을 하려다가도 스스로의 냉소가 느껴지면 포기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힘을 내어 왔다.

역시, 난 내 깨닫지 못한 '불순종의 고집' 이 이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더 가까이 가는 게 옳다.

그러함으로 하나님으로 평강을얻는 것이 옳고

하나님으로 지혜를 얻고

하나님으로 위안을 얻음이 옳다.

그러나, 난 생각지 않고 멍하니 있음으로 감성적 편안함을 얻으려 하고 있었다.

이게 '믿음'이 맞는가?

아니다.

마취고 억압이고 불순종이고 오래된 엉터리 같은 '고집'이다.

오늘 유다 남은자들이 보이는 '하나님 믿는 흉내'를 내는

애굽행 간구 기도랑 무엇이 다른가?

또 감상적 편안함을 간구하는 고집에 다름이 아니던가?

 

 적극적으로 주님을 찾아야 한다.

애굽이 아니고 주님께 피난처를 찾아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선이심을 

지금 이 순간, 이 혼란의 시간에도 올려 드려야 한다.

내 고난, 힘듦도 주님의 선하심의 결과임을 믿어야 한다.

그것을 훈련하시는 거다.

비록 결과가 어떻든 그것은 주님의 뜻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남아 있어야 한다. '

주님 곁에 남아 있어야 한다.

내 , '평강' '샬롬'이란 단어에

감성적 평안 만을 담는 다면 , 그렇지 않을 때 얼마든지 애굽에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복을 주실 때만 믿겠다는 '유다의 남아 있게된 자' 신앙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다.

형편없이 힘든 상황에서도

주님이 응답하시지 않을 것 같은

내 개인적인 '실수', 실패 혹은 어리석음의 후유증일 것으로 생각되고

그 과정이 힘듦이어도 그냥 주님 곁에 의지적으로 남아 있는 선택,

남아 있을 결심을 통하여

주님의 위로를 경험하고 그 위로를 통하여

주님의 의도하신대로 이끌림 받는 체험을 하는 것,

그게 나에게 허락되신 '지금의 환란'이고

그것은 나에게 '순종'의 기회를 허락하시는 것이며

그것은 나에게 남아 있는 자로 될 기회를 주시는 것이고,

또한 그로 인하여 놀라운 결과론 적인 '평강'을 허락하시는 것이시다.

이러한 순종의 모습을 보이는 것을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보시길 원하신다.

 

 

적용

1. 회개한다.

 깨어있지 못했다.

 자아가 앞서기 시작하였다.

 괜한 걱정에 날 맡기곤 했다.

 편하면 주님 찾지 않고 어려우면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유다의 남아있게된 자들이 더 하나님을 찾았던 것 같다.

 

2.  기도한다.

 두 문제에 대하여 .

 

3.  중보한다.

 

4.  성경 세장 읽겠다.

 

5. 남 아 있는 자에 대하여 묵상한다

 

 

기도

 주님.

귀하신 주님.

저.

용서하소서.

늘 영적인 듯하면서도 실은 감정적이고 감상적인 것이 더 많았으며

주님, 주님을 위하는 척하며 모두 이기적인 자 맞았습니다.

내 편안함 만을 위해 주님을 이용한 저들과 다름 없습니다.

주님 용서하소서.

주님 편안할 때만 '주여 주여'하다가 힘들면 멍하니 있었습니다.

그러나 , 부정하지 않았던 것 만해도 위로 해주소서.

주여.

이 부족한 자, 죽도록 주님 곁에 남아 있는 자 되길 원합니다.

주여.

견디기 힘든 고난이 왜이리도 절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지요.

한번 숨을 쉬고는 다시 잠수하여 허겁허겁대는 자 같이

눈 앞이 멍해집니다.

주님.

이 절박의 순간에 주님을 찾습니다.

이제 어이없이 행하지 않으려 합니다.

주님.

이 노력을 귀히 여기소서.

이 절박의 스트레스에서 절 붙드소서.

힘을 주소서.

낫게 하소서.

주여.

귀하신 주여.

절 도우소서.

제 자식들 도우소서.

제 아내도 그리하소서.

제 모든 아는 분들 그리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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