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난 안가렵니다 ( 요6:60-71 ) 본문
제 6 장 ( Chapter 6, John )
주님
내가
어딜 가요...........?
지금이 가장 좋습니다.
주님 등이 제일 편해요.
묶여서 답답해도 제일 편해요.
주님
사랑합니다.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어렵지.
당연히..
쉽게만 생각하고
축복만 생각하는 것이 '기복'이다.
기복은 십자가의 한면 만을 보는 것이다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어려운 면이 걸림이 되면
실족할 수 밖에 없다.
수군 거리지 말자.
내 감정의 벽에 걸리더라도
주님은 옳으시다.
그냥 좇자.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육신의 것을 좇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일인가...
나이 오십이 다되니
그 잘난 얼굴도
내 뛰어난 육체적 자랑도 (^^;;;;) 한낱 물거품일 가능성이 느껴진다.
내 자랑이 얼마나 갈것이고
한낮의 뙤약볕이 또 얼마나 길건가?
찬바람이 불어오면
그 싱싱하던 풀도 사그러지고
푸르르던 나무도 그 잎파리가 변해감을
오십여년 보았음에도
아직도 육신의 것을 집착하려는가?
주하인?
주님은 영이시다.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다.
육신은 무익하다니 니골라당의 이분설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냥 고물차 같던 내 차도 잘관리하니
내 몸이 필요한 곳에 데려다 주는 데는 문제가 없다.
이 육신도 마찬가지다.
영의 자유를 위하여
원죄의 결점이 해결되어 온전 성화되는 도구로서는 필요하다.
얼마나 삭신이 쑤시는 가?
그때 주님의 십자가를 조금 생각해서 성장하는 도구가 되니
이 아니 또 기쁜가?
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그래 맞다.
주님이 걸리는 말씀을 일부러 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시다.
진실을 맞닥드리기 위해서는
거부감이 들어도 인식해야 한다.
주님 예수님의 원리는 한쪽이 아니다.
늘 양면적이다.
십자가는 고난이고 고통이되 구원의 상징이다.
천국의 유일한 도구이자 고난의 시작이기도 하다.
분명코 '고난이 넘치는 곳에 위로가..참 제자가 되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는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던가?
어제 전병욱 목사님의 '집중력'이라는 책을 잠시 들추어 보았다.
쉬운 문체로 정곡을 찔러대는 그 분의 글은
많은 분들이 찾는 이유가 됨을 즉시 알 수 있었다.
세상의 교회가 힘을 잃어가는 것은 '주님'으로 , 오직 예수님으로 나가야 할 방향이
세속의 것에 눈을 돌림에 있다는 이야기시다.
십자가는 이중의 의미라는 이야기도 하신다.
십자가는 '공의'와 '사랑'의 두부분이라신다.
사랑을 너무 치중하는 게 현대 개신교의 병폐를 불러오는 게 아니던가?
공의도 있다.
온전한 회개를 영혼 깊숙히 해야 함에도
사랑 만을 강조하여 피상적으로 지나가기에
세상의 질타를 받는 절름발이 교회들이 되어 간다는 이야기다.
난 아닌가?
정말?
67.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주님이 당연히도 안갈 열두 제자에게 물으신다.
'너희도 가려느냐?'
나에게도 물으신다.
'주하인
너도 가려느냐?
네 마음에 맞지 않다고 함부로 하고
실망한다는 이유로 너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주님.
주님도 아시다 시피 전 갈데가 없습니다.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전 최소한 지금까지는 이리 주장하고 싶습니다. '
이제 주님의 살과 피가 제 영혼 깊숙이 들어옴을
조금의 부담도 없이 받아 드리려 한다.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그래.
내 감정과 감각은 아니었어도
주님을 믿는 시간이 지나니
내 영혼이 안다.
주님이 주시는 그 놀라운 평강이 얼마나 큰지...
주님은 살아계신다.
그러니 내가 어디갈까?
주님이 아니시면
내 살아온 50의 세월이 허공 속의 먼지 뿐인 것을..
허상인 것을..
내가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난, 주님을 믿고나서야 주님이 진실이신 실제이심을 알고 있다.
그 길이 늘 편한 길 만은 아니다.
때로는 폭풍우도 치고
때로는 외로운 밤바다 이기도 하다.
깊이 외로울 때도
혼자 두려울 때도
아무도 걷지 않는 좁은 길임에
의혹에 흔들릴 때도 있지만
누구도 알지 못하는
주님과 나 만의 비밀한 기쁨으로
또다시 걸어가야할 힘을 얻고
나가야 할 당위성에 가녀린 팔과 연약한 다리를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주님은
어제 오늘
정말 주님을 따를 소수에게 만 허락되어진
십자가의 두가지 비밀에 대하여
예수님 믿는 자의 어쩔 수 없는 은혜와 고난, 위로와 고통의 양면적 현상에 대하여
조심스레이 비유로써 말씀하고 계신다.
그 말을 들은 대 부분은 돌아간다.
이제 선택 받은 그 중의 소수 - 열 둘 중 열 하나-만 진심으로 남아 있게 된다.
주하인에게도 주님은 넌지시 물으신다.
'너도 가려느냐?'
난 오늘 주님께 직접 이리 얘기 드리고 싶다.
'주님 ,
내가 어딜갑니까?
주님 아시 잖아요.. '
하지만, 그들 제자들의 고난을 아는 자로서 속이 답답하기는 하다.
주님이 위로하실 줄은 알지만..
적용
1. 성경 일곱장 읽겠다.
2. 난 남아 있는다.
작년 이후에 '남아 있는 자'로서 훈련을 받아 오곤 있다.
마지막까지.......굳세게..
3. 블로그는 죽도록 운영하겠다.
선택 받은 소수로서의 마지막 몸부림이다.
큐티를 통한 말씀 사모의 길이다.
4. 영혼의 살과 피이신 예수님을 기뻐한다.
묵상한다.
기도
주님
귀하신 주님.
오늘은 십자가의 다른 면을 각인 시키시고 계십니다.
한편으로 두렵기도 하지만
주님이 계시기에 위로가 됩니다.
이제 때가 되면 결단의 시간이 올 줄 압니다.
올 초 부터 들어 훈련시키시는 느낌을 받습니다.
난 안된 다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주님이 되게 하신다는 개념도 갖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냥 주님의 뜻이면 따를수 잇기를 원합니다.
생각도 필요없습니다.
느낌도 내려놓습니다.
주여 알아서 하소서.
주님
나머지의 시간을 주님께 의탁합니다.
예수여 받으소서.
절 인도하소서.
늘 나태함과 나른함에 안주하려는 절 불쌍히 여기시고
잡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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