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주하인;김마라 받아 들이기[룻 1:15-22] 본문
울 손녀
'김말아'서 김밥 만들어보기.
아.. 김마라가 아니고
김말아 ^^; ㅎ
16.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아.. 정말 사랑스러운 고백.
이 절대의 고난 앞에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
그 모든 인생의 다른 피할 길 모두 제쳐두고
오직 시어머니를 따를 결심을 할 수 있을까?
룻도 정말 대단하지만
나오미도 정말 귀하고 사랑스럽다.
솔직히 그들 두 여인의 '우정'....이 그렇다.
아니 '우정'이라긴 훨씬 더 깊은 끈끈함이 느껴져서 그렇다.
그것의 정체는 '전우애' 같은 느낌이다.
같은 목표를 가지고
깊은 고난을 함께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 느끼는 '동질감'........
동지애.. 말이다.
그 전우애에에는
반드시 어떤 귀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그들을 살게 하는 이유.
그들이 그 죽음 앞에서 까지 오직 진리여야할
생득(生得)한 원리.
당연히도 '하나님' 아닐까?
모압 여인이 어찌 하나님을 그리도 깊이 인생의 목적으로 살게 되었을까?
거기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살아계심을 일상에서 모본과 삶의 원리로 직접 보여주는
'나오미'가 있었고
그러함은 가뭄이 지나쳐 목숨 부지하기 어려울 만큼의 상황에서
두 과부, 고부지간의
이 어울리지 않을 듯한 조합이 '전우애'로 뭉치게 한 이유였다.
나.
어찌 이리 '전우애'라는 단어를 쓰는가?
아내.
이제 늙어가며 젊을적 여러 난관을 넘어서며 겨우겨우 건강을 유지하여오는 여인.
성품적으로 많이 닮았으면서도 당연히도 많이 다른 이유로
부딪침과 부대낌도 많았다.
아... 인생.....................
하지만, 이 나이까지 같이 살아오면서
같이 견뎌나가며 헤쳐 나와야할 수없이 많은
정말 다시 돌아가라면 돌아가기 힘들.. 역경들을 거쳐 나오면서
아내와 난..........끝까지 둘이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공통된 목표가 있었다.
'하나님'.
그 분 나라가기 위한 인생 여정동안의 허락되어진
'고난과 연단의 광야' 전쟁터를
같이 '기도'로 이겨내고
주신 말씀 통해 몸부림 치다보니
어느새 아주아주 깊은 '전우애' 비슷한 감정이 들어 버렸다.
그것.
아내도 인정하고 나도 인정한다.
그것.. 어찌 표현할까..
사랑하는 감정보다 더 깊은 애정 같은 느낌....
불쌍하고 안쓰러운 듯한 느낌이 약간은 섞인 듯한 긍휼함?
볼때마다 눈물이 섞일 것 같은 '가련함' 비슷한 느낌?
귀한 동행자에 대한 감사하고 아끼고 싶은 느낌?..
솔직히 정확히 표현하긴 힘들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특별한 감성인 것 만은
나도 ......아내도 최근엔 서로 느끼는 것 같다.
이전보다 .. 훨씬 더 배려와 연민의 눈빛을 흘린다.ㅎ
19.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세상적으로 말하면 Loser (루저, 실패자 ^^;;)이지만
하나님 안에서 전우애로 똘똘 뭉친 여인 두엣이
걸어서 70여 km를 3-4일에 걸쳐(주석설교 목사님께서 제시한 수치시다.ㅎ )
베들레헴으로 걸어오면서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아랫 구절에서 곧 나오지만
'마라'라는 표현에
그 마음의 복잡함이 농축되어 있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한편으론 가뭄 탈피에 대한 기대..와
새로운 환경에로의 적응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 걸어가는 길목에서의
하나님을 갈구하면서 깨달아지는 연륜과 고난극복을 통한
'내면적 통합'..........
integration !
출애굽기 15: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실제 마라란 이런거다. ㅎ
20.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그 증거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그 시절.
여인들의 사회적 위치가 어땟을 것임을 익히 짐작되어지는 바
거기에 아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관심을 표명하는 것에
얼마나 '수치'와 더불어 힘들었을까?
거기에 자신과 같은 혹을 하나 더 달고 왓으니...
그러기에 그녀 입에서
자신을 '마라'라는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자책하는 듯한 소리가 나온다 .
(어쩌면 그니들을 가십거리로 씹고 싶은 의도를 가진 자들의 귀에 그리 들렸을 것이란 이야기다. ^^;)
'마라'는 쓴물이다.
고난 중의 단물, 생명수로의 기대를 한껏 가지고 들이킨 물이
마라였다.
자신을 그리 불러 달라는 것은
가족의 남자들 모두 다 잃고 과부 며느리 하나 달랑 딸려 돌아온
가진 것 하나 없는 나이든 과부였으니
그 신세를 '자책'하는 듯한 표현이
단 한마디로 '마라' 가 아닌가?
그런데............................
그 걸어돌아온 3일의 광야 중.....
마라로서의 자신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사단의 공격과
그 안에서 하나님을 인식함으로 다가오는
옳은 생각 사이에 왔다갔다 하다가
드디어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그 과정이 있지 않았겠을까?
그 'Integration' 과정 중 얻어낸
인생의 가장 성공적 '지혜'를
그녀는
자신의 과거를 아는 '지인 무리'들 앞에서
오히려 먼저 자신을 낮추어 '마라'라 부르며
그들의 타인의 잘못됨을 고소해 하며 손가락질 하고 뒷소리를 하고
어쩌면 내칠지도 모를
그 악한 군중 심사 들을 일시에 잠재워 버린 것이다.
마치.. 터질 듯 끓어오르려던 밥솥에서
순간 '수증기'가 빠지면서 뜸드는
그 순간............................말이다.
이게..........말이 쉽지 쉬운 일이던가?
아...
'난 마라다'"
마라라 불러다오"
선수쳐 당당하게 외치는 '나오미'님의 그 선언에
나도 '김마라'다...............외치고 싶은 유혹이 들었다
아.. '김말아' ..가 아니고.ㅎ
나.
어느때나 되어야
이 나오미 처럼 자신을 온전히 낮추고도 담담해질 수 있을까?
스스로를 마라라 부를 때
보통 따라오는 그 자책과 자기 모멸에 무감각해지는 습관으로
인간성의 파멸 .......
마치 노예처럼 동물처럼 그리되지 않고는
어찌 가능한 이야기일까?
그니가 그리하면서도
이후에서 우리가 다 알듯
지혜를 놓치지 않는 자애로운 시어머니가 되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그 고난 중에 처절히 알아
자신의 삶에서 치달아 오는
그 수없는 고난과 횡폭한 환경들을 녹여 내고 받아 들여
노예나 동물의 자아소실이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십자가 자아 부인'의 승리의 결과가 된게 아닐까?
그것을
오늘 '나오미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나오는 것을 보며
내 삶,
내 어떠함..........
어쩌면 비교하여 가치없고 가장 부족한 듯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마라'든 무엇이든
다 의미가 있고 선한 결과를 위한 그러함임을
내 안에
진정으로 녹여내고 받아 들여도 되지 않을까 하는
소망이 생긴다.
다행이도
내겐
'전우애'와 같은 마음을 허락하시어
온전한 긍휼함으로 바뀌게 될
실제적 체험들이 있다.
증거가 있다.
오늘 묵상을 보며
나 자신도 '마라'다.. 라고
부끄러워 하거나 창피해 하지 않고
현상의 있는 그대로 표현해 내고
오히려 반대로 더 자신을 자학하는 모습이 아니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것을
담대하게 인정하고 받아 들이며
실은 그래도
남은 내 나머지 삶동안
이제는 주님이 더 선한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목도 하게 됨을 기대하는 자 되어 야 하리라.
22.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그 선하심이 '추수'할 때 딱 맞추어 베들레헴에 내려가게 된 것 같이
내 인생에도
내 현실의 문제도
주께서 다 맞추어 '통합적' 선이 이루어지게 될 것임도
가슴 한구석에 기대해 보아도 될
그런 내가 되어야 하리라.
난...
마라다.
주하인 김마라 .
주님.
누구나 다 싫어하며 반드시 회피하고자 애쓰는 형국이
바야흐로 '나오미'일행을 통하여
지금 저희에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를 통해
어쩌면 '믿는 자'들이지만
우리들에게도 세상의 가혹한 일이 벌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
그 끔찍한 상황이
스스로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과거와 지금의 모습을 대비해 내며
'마라'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달라는
나오미님의 모습을 보며
다양한 생각들로 마음이 경건해지기도 합니다.
주여.
그 상황에 제가 있다면
그 마라의 자신을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이
비참하기도 했을 것이며
암담하기도 했을 것이며
둘러 쌓인 그들에게 그런 소리를 살기 위해 하는 자신이
몹시도 자존심이 상해
어쩌면 완전히 '노숙인'들 같은 심사같이 될 수도 있는
그런 위기의 순간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됩니다.
다행이도 나오미님은
자신의 그러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주변에 자신의 그러함을 그대로 노출 시켰고
그를 통해 자신도
그들도 그러한 마라 같은 자신을
놀리고 미워하려는 사단의 터질 듯한 압력이
일순간 다른 곳으로 향해 버리고
스스로와 타인들에게
자연스러운 자신을 인식시키게 된 것입니다 .
모두..........................
하나님을 늘 인식하며 사는 자로서
옳은 선택을 하며
사단의 비아냥보다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진심으로 유익일 고난' 과정의 자신으로서
인정하게 된 결과이며
이 땅에 살면서 어쩔 수 없이 흘려 보내고
그안에서 오히려 연단의 유익이 될 것을
아주 자연스레이 통합시켜 integration시킨
놀라운 영적 성장의 결과라 생각되어집니다.
주여.
다행이도 제게
지금껏 살아오면서
객관적으로 비교할 강도는 되지 못할 것으로 알고는 있지만
제 상황,
제 가족의 상황..
모든 상황 속에서
어쩌면 '나오미'님의 고난과 통합의 재료들이
많이 발견되어지는 과정에 있음을
오늘 묵상을 하며 발견하게 됩니다 .
부디 바라옵기는
더
매일 힘써
주님 뜻 놓치지 않고
말씀대로 내 안에 받아 들여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융합하고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일 수 밖에 없는
세상의 이치 들은
흘려 보낼 것은 흘려 보내고
받아 들일 것은 받아 들여
주님 뜻 안에서
은혜가운데 '통합'시킨
자연스러운 삶,
승리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김마라..................
김마라지만 주하인인
통합된 저...........
주님께 감사드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구약 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의를 넘어선 긍휼을 위하여[룻2:14-23] (0) | 2022.05.04 |
---|---|
우연이 아닌 우연을 위하여[룻2:1-13] (0) | 2022.05.03 |
한번도 가보지 못한 세상의 답[룻1:1-14] (0) | 2022.05.01 |
오직 점점 더[시80:1-19] (0) | 2022.04.29 |
다만 주께 아뢸 뿐이다[시79:1-13] (0) | 2022.0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