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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후는[삼하15:13-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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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후는[삼하15:13-23]

주하인 2016. 8. 8. 11:30




13.전령이 다윗에게 와서 말하되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한지라

 '전령'

정말 급박한 일을 전하는 ...

 

 전령이 다윗에게 '말하되'

살다보면 정말 듣기 싫은 소리를

책임지어야 할 입장에서

들어야만 할 때가 있다.

 다윗에게 말하되...라는 뉘앙스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있어도

오직 그 만이 감당할 이야기를 말하는 것으로

저 단어를 보는 순간, 감정이입이 된다.

한마디로 '군중 속의 고독'이다.


거기에

'세상의 인심이 다... 돌아갔다'라 한다.

 이것.

곧 쿠테타가 있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름 우월한 정치력과 인간적 치세를 펼쳐 앞길이 환한 입장에서 받아 들여야할

'청천벽력'이 아니던가?

만일 그 자리에 자신의 교만이 들어 있다면 어찌받아 들여야 되었을까?
아마도 '충격'이 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싫어했구나... 하면 치욕이 다가오지 않을까?

당연히도 아래에 곧 나오지만

도망하여야 마땅할 '공포'는 말할 것도 없고...


근데 문제는 ' 압살롬'이 반역한 것이다.

그는 아들이다.

여기에 무엇이 더 추가 될 수 있는 생각일까?

'쪽팔림'이 아닌가?

자식은 아버지의 거울이다.

자신이 살아온 것을 반영하는 것이고

가르침의 흔적이다.

그러기에 그가 저리 반역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살아온 행태를 잘못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고

세상 사람들이 다 알도록 한다는 것은 더 치욕일 듯 싶다.

거기에 '자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보통의 한국 아버지들 같으면

그 '배잔감'은 어찌 감당이나 될까?

자식이 자신을 죽이려 온다. ....

그토록 사랑하여 불러 들인 자식이...배반을 ...

.....


이 엉켜 버린 생각에

나 같으면 어쩌면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


아니..

최소한 '두려움'보다는 엉켜버린 혼란스러움 때문에

습관적으로 큰 분노를 터뜨렸을 것이고

수치심에 몸을 떨었을 것이며

살아온 지난 날들이 폭풍처럼 밀려와 감당키 어려운 혼돈 속에

아마.. 멍하니 있을 것이고

혼이 달아난 사람처럼 있게 될 것이

틀림없다.

 아..

이전의 나라면...



14.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중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그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 우리를 해하고

   칼날로 성읍을 칠까 하노라
  그러나, 다윗을 보면 많이 다르다.

내 예상과는...


그는 '두려움'  만 느끼는 것 같이 보인다.

두려움은 당연한 감정이다.

왕위에서 역모를 꾀하면 남은 것은 '죽음' 뿐이니...

 그런 그는 그 상황에서 취할 행동을 했다.

그런 그의 행동에는

백성들 보기에 민망함,

후레자식을 둔 엉터리 아비로서 수치를 가리기 위한 '오버액션'

혼란스러운 감정에 이리저리 안절부절 못하는 '리더심 부재'.............의 그 어떤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난.. 이전까지는

다윗의 이러한 행동을

'수치심' 마비된 비겁자 나

'기회주의 자'처럼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 그래서 자신의 감정에 무감각한 '싸이코 패스'의 현상.. .같은

부류로 인식하곤 하여

이런 부분을 '성경의 빈 곳'...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있으시니

감히 내가 건드리지는 못할 망정

동감하기는 어려워 ,

얼른 얼른 지나가고 마는 부분이었다.



19.그 때에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도 우리와 함께 가느냐 너는 쫓겨난 나그네이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20.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 없이 가니 오늘 어찌 너를 우리와 함께 떠돌아다니게 하리요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21.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사나 죽으나 종도 그 곳에 있겠나이다 하니 
 그런데 그 다윗은

그 두려움 속에서도 다른 옳은 성정(性情)은 잃지 않고 있다.

'정의감'

' 긍휼함'

'옳은 자를 옳게 처우함의 공평성' 등은 그대로다.


저런 혼란이 있을 속에서  말이다.


 왜 일까?

왜 나의 생각이나 판단과는 다르게

저는 저런 감정을 단순하게 유지하며

그에 따라 옳은 판단, 즉 생각을 옳게 할 수 잇을까?

아마...

내 생각을 돌아 보면

내 이전의 감정의 혼란은

생각이 먼저 앞서서 인듯하다 .

옳은 감정이 옳게 흐르기 보다

다양한 생각들이 먼저 나를 혼합되게 하고

그 생각들이 혼돈된 감정으로 마음을 혼란케 하고

다시 그러함은 옳은 판단력을 흐리게 했을 것이란 이야기다.


 돌아보면 감정은 무엇이든 옳다시든 주변 옳은 분들의 말씀이 옳은 것 같다.

내가 엉터리로 보려하던 다윗의 저러한 감정도 그냥 옳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 했을 뿐이다.

설령 자식이 미우면 또 어떠할까?

자식이 불쌍하여 데려온것도 어찌 잘못일까?

그 감정에 그는 너무 혼돈 스러워하지 않고

압살롬을 용서하였다.

물론 감정으로 자식을 키우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옳은 지혜로 훈육이 더 해졌으면 오늘과 같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

어찌 되었든 벌어질 일이 었으면

단순한 감정으로 사세를 바라볼 수 있으면 그것이 더 현명한 일이란 이야기다.

다윗은 두려움을 가지고

허락된 그 원시적 감정 (원시시대에 살기 위해서 두려움이 있기에 도망할 기회가 된 것이다) 을 가지고

단순하게 도피한 후

긍휼과 인내로 다시 회복하게 된다.


그런데...문제는 그가 그런 단순함과 제대로 잘 흐르는 감성을 가지게 된 것은

모두 자신의 결심에 따를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오늘 날..

세상이 복잡하고 툭하면 무대뽀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충동장애와 싸이코 패스들이 그리도 많은 것은

자신의 생각들이 너무도 많이 있고

그러함이 모두 옳은 것으로 독려하는 시대사조가 있어서

생각은 많아지고 옳은 감정은 약해져서이다.

이 감정의 깊은 부분이 '영혼'이다.

그 영혼을 터치하는 영적 존재들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다.


주님의 미리 아심 가운데

우리가 날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그 크신 은혜를  선택하고 나면

옳은 감성들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인하여 흘러들어오게 된다.

그러면서 매사에 일상을 살면서

우리의 영혼의 성전을 탈취하려고 노력하는

사단의 유혹들에 대하여

말씀에 의거한 '지혜'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노력하는 가운데

성령은 옳게 운행하게 도우시어

그 옳은 감성들이 자리잡고 습관화 되어

우리의 건강한 인격이 되게 되고

어두움, 악한 정욕들은 터져 나가게 되어

점차로 맑고 건강하고 단순한 사람이 되어간다.

그러한 과정을 '영적싸움'이라 표현하게 되며

영적 싸움의 궁극은 온전히 성령이 우리의 영 안에 내주 합일되어

매사에 주님이 허락하시는 뜻대로만 움직이고 싶어지고

그럴 때마다 빛처럼 인격의 항기가 퍼져나가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세상에 퍼지게 되다가

주님이 부르시면 두팔들고 소천하여

주님 곁 가까운 자리의 천국에 올라가게 되는 것...


그것을 보고 싶으심이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까닭이시다

그게 이사야서 43: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라시는 것 처럼

우리가 그러한 목적으로 지음을 받아 이 세상에 나왔으니

그렇게 그렇게 선한 감성으로 매일매일 변화 되도록 기대하고 기도해야 한다.



 나.

이전의 나를 돌아 보면

이러한 상황에 많이 당황했을 것이다.


요 몇년간 많은 일을 다양하게 경험하고 있다.

이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다양한 영적 훈련을 미션병원에서 시키시더니

그보다 복잡한 환경의 일들을

이 불신의 병원들에서

이 나이든 자의 육신 속에서

다양하게 보게 하신다.


그럴때

과거에는 많이 혼란 스럽고 당황하고 좌절했지만

이제는 조금다르다.

고통은 있다.

두려움도 있다.

하지만 .. .조금 조금 가벼워져 간다.

그래...

어차피 다윗도 겪었다.

다윗도 나이들어 쫓겨 다니고

다윗도 주변의 소리들이 자신을 다 싫어 한다고도 했고

다윗도 아들이 반항해서 자신을 괴롭게 했다 했다.

그리고 오늘.. 도망가는 신세로 나락에 떨어지기도 하고 있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다른가?

무엇이 다 남들과 똑같아야 만 하는가?


오직 옳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점차로 단순화되어가고

점차로 긍휼의 마음을 익혀 가는 것..

그래서 다윗님이 그 가운데서도 남을 배려 할 수 있고

자신을 흔들려 하지 않은 것 처럼

나도 그런 품성을

주님 원하시니

이루어 가는 것이야 말로

오늘 내가 서있고

오늘 내가 살아 숨쉬고 잇는

진정한 하나님의 내게 바라심이 아니시던가?

그렇다면

매상에 덜 흔들리고 덜 고민해도 될 듯싶다.

덜 당황하고 덜 자학하며 덜 연민해도 될 듯 싶다.

나머지는 결국 다윗처럼 또 승리하게 될 것을...



주님

깨달음..

오래갈 수 있도록 지키시고 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함을 기뻐하고

곤란도 나만의 것이 아님을 생각함으로 덜 당황해하고

핍박도 그러려니 하며

어려움도 주님을 위하여

주님의 말씀과 깨닫게 함이 있으시니

무조건 인내하고 덜 슬퍼하게 하소서.

우리 주여.

그러한 당위성은 이제 잘 알고 있사오니

상황에 따라 잊지 않는 지혜를 허락하시고

그러할 때 그러하게 마음이 움직이도록

성령으로 인도하하소.

내 죽어 주님 뵐때는

그게 주님... 제 인격이 되어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고아한 성화가 되게 하소서.


내 주 예수 그리스도 그 거룩하신 이름 받들어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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