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매일 부활 나의 부활[행22:30-23:11] 본문

신약 QT

매일 부활 나의 부활[행22:30-23:11]

주하인 2024. 6. 20. 06:57

.

 

[행22장 30]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그 지난 밤은 어찌 보냈을까?

홀로라면 정말 감당하기 힘든 하루,

롤러코스터 같은 드라마틱한 인생의 또 하루 밤, 

그 밤 이후의 일은 예상도 할 수 없었지만

또.. '그들 앞에 세우'고자 하는 '호기심' 많은 (남의 마음을 전혀 배려 하지 않는... ㅠ.ㅠ..) 천부장의 뜻에 따라

다시 '현실'에 마주하게 된다. 

 

이게.. 개인적으로 입장 바꾸면 '지옥'같은 두려움,

두려움에 마주할 수 밖에 없는 '강제'에 대하여 '절망'일 것 같지만

이러한 '천부장'의 어이없는 선택으로 인하여

23장 11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로마'에서도 전하게 될 '복음'의 

담대한 선언을 위한 '장치'가 되는 거 아닌가?

 

 '그들 앞에 (다시) 세우니라'라는 표현이

어쩌면 그리도 힘들고 피하고 싶은 

우리네 매일, 

다람쥐 쳇바퀴의 별의미 없는 되풀이 ,

어두움의 시선을 가지고 살아왔던 내 이전, 

주님을 깊이 체험하지 못하던,

아직도 강한 '상처'의 흔적으로 눌려있던 그 시절의 

매일 눈을 뜨기 싫던 그 순간의 실체를 드러내 보이게 함 같다.

 

 그러나, 

그러함이 없었더라면

이 뚜렷하게 보이는 '주님 나라'까지의 길.......

그 길을 위하여 

또 다시 세워지고 나가야할 '오늘 하루'가 

이리도 맑고 청명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거다 .^^*

 

 사도 바울님에게

저러한 무배려의 싸이코패스 ^^;; 같은 '천부장'의 폭력적 선택은

그저 '하나님의 뜻' 가운데 허락되어진 것임을 알아

흘러가는 가운데 또 하루 자연스럽게 흐르게 될 상황일 뿐이리라..

 

[행23장 1-11]
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그리고 

그 준비된 자,

마음에 '성령'의 흐름으로 인한 자연스러움 이외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는 이 분은 

이렇게 '선언', 선포 하신다. 

 

"나는 !"

 .. 

이 나는 이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가슴을 콱찔렀다. 

왜인가?

나는.. 나는.. 나는.. 내가 .. 나의 .. 내것.. 내가 왜..!!.. 가 

내가 그리도 자주 외치고 몸부림치는 내 면의 소리인지라

'벗어내고픈'..

그래서 주께서 십자가에 달고 벗어낼 '명제'이었기에

그토록 갈구하지만 

반대로 그토록 벗어버리고 싶은

양가적 감정의 '단어'였다. 

'나'.. 

 

 

그런데 이 절체절명의 시간에

사도 바울께서"나는" .. 하신다.

 이상히도 가슴이 뻥뚫어지는 거 같다.

 

"난 범사에".. 

그것도 나는 매일이렇게 살았다 .

그러니 '너희도 정신차리고 나를 따르라"심이다. 

이상히도 시원하다. 

 '그의 '나'.. 주장은

오직범사에 '양심을 따라(양심이 그 양심이겠는가?  마음이 흐르는 대로... 자아가 하나님의 원하심과 동일한 원리로 움직이는 , 하나님이 원하심이 내 원함이고 내 자랑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일 수 밖에 없이 흐르는 성령의 내주 합일 된 성화된 분의 마음의 흐름이시겠지..  우리, 내가 나아가야 할 나의 늘 자연스런 마음의 흐름^^* ,궁극적 목표 말이다 ^^*)'하나님을 섬겼다' 심이

굳이 '원리 원칙'... '복잡한 계산'... 이런 거 따르지 않고

마음이 흐르는 대로

주님이 기뻐하심이 느껴지면

굳이 마음의 구애를 받지 않고

그냥 따랐다신다. 

 

 맞다. 

그러함은 이제 곧 타의라고 생각되어지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모든 것을 예루살렘에 들어오기 전부터 성령의 충만함에 의하여 다 알고 능동적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거 아니던가 ? 그 많은 만류를 뿌리치고... )과정 중 이기에 

힘있게 선포하고 자연스러운 '갈등'을

세상에 , 지금의 이 무리에 던져 놓기 시작하는 거다. 

바야흐로...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이게 굉장히 재밌다. 

놀랍기도 하고.. 

맥락상 없어도 될 구절인데 

실재하셨고 ,

실제로 존재하시는 주님의 증거 중 하나.. 

 

 그 당당하고 교묘한 ^^;

술책이자... 지혜다.

 

  대 제사장 아나니아의 호통,

당연한 서슬퍼런 권위의 소리에

정면으로 면박을하고

그 모질고 무지막지한 군중의 반발에 

단 한마디로 '조용'하게 한다.

 

" 난 몰랐었다"

 

어찌 몰랐겠는가?
아.. 통쾌하기도 하며 

그의 이러한 거짓과 실제의 경계가 모호한 전술로

관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강하게 느껴져 와서 그렇다 .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 상관없을 듯한 장면은

이어지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파' 사이의 갈등 조장을 통해

단번에 '자신의  동조자'로 바리새인파를 끌어들어오게 하는

그 '세치 혀^^*'의 교묘함이 

마치 삼국지나

사기꾼들의 극치를 보게 하던 유명한 소설 속의 어떠한 인물을 보는 듯해

진정 .. .재미가 느껴진다. ㅎ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 NIV; a dispute broke out, 다툼이 터져나오다 ^^;)무리가 나누어지니


 보라.

'알고'라는 표현에서 알수 있듯

그는 '의도적 분란'을 유도했다. 

  '다툼이 터져 나왔다' 라 NIV에 나온다 .ㅎ

터져나오는 다툼.. .

폭팔하는 갈등,

자중지란... .

 

오직 '부활' 이란 한마디로..ㅎ

 

문제는 그 '분란'이 

그의 선천적 교활함, 

즉 '자아'의 발로가 아니었고

허락되어진 흐름 가운데 그의 특질,

'그 비상한 머리와 목표를 정하면 물고 놓치 않는 집요함'을 

끝까지 들어서 쓰시는

'하나님의 뜻'과 어우러진 

'흐름'가운데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는 사실이다 .

 

 무슨 이야기이던가?
이게 '협잡'이나 의도된.. 이 아니고

그냥...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이렇게 해도 될 그 상황에서 

그렇게 그냥 자신의 특질이 발휘 된 것임을 

예루살렘에 오기 전부터 강하게 인도하신( 그 수많은, 성령 충만의 긍휼로 말리던 제자들을 뿌리치고 역시 성령의 인도대로 예루 살렘으로 들어오던 그분, 바울님의 결단을 우리는 알지 않던가? 그 성령님의 흐름의 원리...말이다. )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게

이 아침부터

나를 가슴 떨리게 하고

내 삶에도 역시 

강하게 흐르시는 동일하신 하나님의 원리가

이 아침 느껴져서 그렇다. 

 

감사하고 귀하다. 

재미있다 .

힘이 난다. .. ㅎ.. 

 

 각설하고 

그 모든 궤계, 모사, 지략, 지혜.... 어떤 표현이든 

그 중심에 '하나님'이 자리잡고

그 자아와 하나님의 뜻의 교차하는 지점에

'부활'이라는 한 단어가 드러난다는게 중요하다. 

 

 보라.

부활.. .때문에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분란하기 시작하고 

바울님이 당당할 수 있고 

그 때문에 오늘날 전 세계가

주님의 복음 가운데 존재할 수 있는실재,

본질 중 본질이 아니던가?

 

할렐루야..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

 

 

 

 주여.

아침에 눈을 뜨니 

여전한 상념들이

하나님의 시간을 사로잡아 막으려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 

얼마 전까지는 속절없이 끌려다니며

마음도 제가 원치 않는 쪽으로 어둡게 .. 분하게..ㅠㅠ....변하여

하루의 시작이 좀.. 그러던 것이 

이제는 그 사이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님이 훨씬 자주 떠오르며

말씀으로 얼른 귀환^^*하는 빈도가 늘어 났음을 느끼며

마음이 개운해집니다. 

 

주여.

그러다가 '부활'이라는 단어,

어제 잠자리에 들기전 들여다 보고 잔 말씀 구절에서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심을 

그 상념들 사이에서 기억해내고는 

얼른 잠잠히 정리된 마음으로 말씀 앞에 섰습니다. 

 

그랬습니다 .

비록 상념의 롤로코스터 속이었지만

전... 기도의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 안에서 어디에서 맛보지 못한 고요를 

자꾸만 더 회복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 

주님의 은혜 였습니다. 

주님이 인도하시지 않았다면

전 평생을 점점더

우울하고 답답하고 분노스러운 상념들에 사로잡히다가

결국 .. 

어쩌면.. .......ㅠ.ㅠ.....그랬을 수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이 모든 것이 

'부활'을 깨닫는 이유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랬습니다. 

주여.

그 모든 인생의 버거움들을 통하여서도

그 어떠한 자리에서도 '부활'은 실재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당연히도 그 모든 거,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며

'부활'의 원리를 깊이 깨닫고 체험하며

점점 더 하나님의 뜻가운데 다가오기를 바라시며

허락되어진 것임을 

다시금 오늘 말씀에 의하여 

뚜렷이 깨닫습니다. 

 

주여.

나는 범사에 주님의 뜻 을 따라 살기로 

몸부림 치고 있습니다. 

 

비록 제 부족한 .. 여러 문제 탓에 

이렇게 서 있지만

이러함 조차 

내가 말씀 가운데 서 있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체험하고 확신하는 한.. 

또 제 이러한 삶 속에서 '부활'도 실재로 일어나고 있음도

확실히 깨닫습니다. 

 

매일 매일 새롭게 되는 것.. .

그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 가운데서

심지어는 '모략'과 '지혜'..

자아와 하나님의 인도하심 .. 이 하나로 

주님의 뜻으로 이끌려 갈 것을 

또 하루의 '부활'로 인하여 이루어지게 됨을 

확신합니다. 

감사합니다. 

내 주여.

 

그 어떤 것도 

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 뜻에 의하여 허락되어진 내 삶임을 확신합니다. 

 

깨닫게 하시고 

또 부활의 하루를 허락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고 기도합니다. 

아멘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