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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하시고 내 삶의 이유를 아니 무엇이 두려울까[행21:17-3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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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하시고 내 삶의 이유를 아니 무엇이 두려울까[행21:17-36]

주하인 2024. 6. 17. 07:14

부제) 막히고 거치는 것 없는 삶

.

17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8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다 알고 있는 '예견된 고난'의 고통.

그게 더 무섭지 않을까?

모르고 당하는것이 훨씬 나은게 당연한 것.. ㅠ.ㅠ

 

 그 것을 그래도 덜 힘들게 하는 것은

'형제들의 영접'이고

'야고보'로 지칭하여 대표되는 이름의 확실한 위로의 도장.

왜 굳이 야고보여야 했을까?

야고보가 대장인가?

가장 큰 리더.

혹시 베드로는 자리를 잠깐 비웠는가?

요한은?

새로 임명된 맛디아 사도는?...

굳이 이유를 거론하지 않고

'야고보' 이름이 거명된 것은

그냥 그때 그 자리에서 있어 대표될 사도의 이름이

야고보이셨기에 그랬을 거다 .

 

그게.. 

성경이 소설이나 작위이면

다른 더 큰 이름이나

상황을 충분히 설명하고 야고보님의 이름이 거론되는... 

그러한 설정들이 반드시 있었을 것인데

성경의 실재 임을 ... 나타내보여주는

또다른 증거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실재의 야고보님이 마중 나와서 환대해주시는 듯한...

모든 고난이 스르르 위로가 되면서 안심이 되는 느낌이다.

할렐루야

 

 알아주는 자들의 

아니, 같은 사역을 하는 

동일한 인생의 목적,

삶의 이유를 같이 공유하는 분들의 

마중함이 있으니 

한결~ 그렇다 .. 한결 덜 두려웠을 것이다. 

 

 인생의 위로.

휴우하고 쉬어갈 쉼터.. 말이다. 

 

19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거기에 '바울'님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지금까지 하신 모든 일 (하신 일)'을 

낱낱이 말했다는 표현 처럼

그는 '자기의 사역'(인생의 목적, 삶의 방향, 확고한 인생관, 철학이라 표현하면 너무 약한 표현이고 하나님을 이땅의 수준으로 내려 잡아끄는 표현이 될 것 같아 사역이라 표현 할 수 밖에 없지만 .. 우리, 특히 나 같이 이 작은 삶의 반경에서 그냥 하루 하루 살아가는 대부분의 소시민적 믿음의 소유자들에게 '사역'은 조금 버거운 표현은 맞지만 어쨋든 하나님 안에서의 인생의 이유.. 목적... 이 더 이해가 쉽지 않을까 싶다. ^^*),

자기가 살아서 움직이는 하루 하루가 

얼마나 힘이 있고 의욕이 있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큼 보람있는 일이든지

'예견된 고난'.. 

귀향한 예루살렘에서 바야흐로 시작되는

불안한 시간들이 (고난을 향하여 초침 째깍째각 돌아가기 시작한...ㅠ.ㅠ)

자신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낱낱이 보고하는 순간

다시한번 기쁨과 확신과 소망의 다짐으로 채워짐을 느끼게 된다. 

 

 그분,

사도 바울님의 

그 '두려움'을 넘어서는 내면의 움직임을 느끼게 된다. 

 

 중요한 것이 그것이다. 

 

 하나님이 하신일

자신이 살아갈 이유, 사역을 확실히 아는 것.

거기에 '들어주는 동료들'.. 

 

이 3박자는 

'목숨'을 불사하는

강력한 삶의 이유가 되지 않겠는가?

 

20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26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35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그리고 그러한 완벽함에

성령으로 이끌리는 '은혜'의 상태는

비록 세상적으로 타협하는 듯한 모양새를 뛰는 '모략(이 표현이외의 어떠한 게 합당할까? ㅠ.ㅠ)'과

아니나 다를까 '현실화 되는 공포'의 실재,

그것도 하필 '층대에서 무리의 폭행'이 가해지는

실재 있게 되어도 

버티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지 않겠는가? ㅜ.ㅜ

 주여 

바라옵기는 

이 무섭고 지난한 인생에서

예견된 불안과 불행이 

설령 눈 앞에 다가올지라도

성령의 은혜로 인하여

잘 다져진 내 내면의 성장과

주의 허락하신 아름다운 관계로 인하여

세상의 그 어떠함도

지혜와 인내와  

그를 넘어서는 은혜로 인한 초연함으로

절 붙들어 주시고

우리 믿는 모두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잠시 기도합니다.

아멘

 

 

 한편, 

이 '섬세한 디테일의 묘사(이러한, 굳이 없어도 전후 맥락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사실들을 낱낱이 표현하는게 '실재'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라고 팀켈러 목사님의 책에서 읽은 듯하다.   그렇지 않은가?.. 굳이 층계라는 묘사가, 소설이나 거짓이라면 굳이 필요했겠는가? 있는 사실을 있는대로 표현하는 것.. .성경은 살아있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을

'하나님의 뜻'과

'그를 확실하게 아는 바울 자신'과

'같은 믿음을 공유'하는 동료들이

제대로 '듣고' 

같은 성령으로 

같은 의견을 내

비록 예수님의 가르치심에는 잠시 벗어나 있는 듯하지만

합력된 기도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뜻, 본질에 다르지 않은 '지혜'로

'머리를 깎고 결계'를 행하는 세상의 배려를 선택하고는

일주일을 참아내는 결단 후 

마침내

폭행을 당함을 받아 들이게 된 것이다.

 

 무엇인가?

 

 오늘 다가오는 큰 내용들은

'하나님의 뜻,

그것을 잘아는 자, 나의 사역 

동료'들의 합력

세상에 어떠히 비추임과 상관없는 

하나님 안에서의 흐름,

그리고 '공포'.. 

그것도 반드시 받아내야할 '공포'를 , 두려움을

하나님 안에서 받아내는 

그 마음의 흐름을 볼 수 있음이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아는 자로서

매일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사는 자의 '삶'..

인생의 어떠함에 대하여.. 말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제게도 저러함을 주소서.

힘을 주소서.

주여.

 

게으름과 늦음을 용서하소서.

거룩하고 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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