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큰 빛 성령 안에서 예수 십자가를 지고가는 하루[행21:37-22:11] 본문
부제)성령의 빛가운데 예비된 극적인 반전을 기대하며
우리
예수님의 구원을 얻고
철저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성령의 은혜를 누린 자들.
그 감사함과 기쁨을
영혼 깊숙이 각인되어 가진
나,
좁은 문을 넘어
좁은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들은
반드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이 좁은 인생길을 걷고 또 걸어
예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가야만 한다.
그게
우리에게 바라시는
주님의 뜻이시다
날 살리시고
내가 살아가게 되는
유일한 이유이자
사역이다
그러나
그 험한 길
주께서는
홀로가게 두지 않으셨다.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
그 분 은혜로 말미암아
이 작은 자도 갈 수 있게 하셨다
큰 빛 가운데
눈꺼풀이 벗겨지고
영혼의 대 전환이 이루어지게 하심으로
그게 가능하도록
모든 것 다 마련하셨다 .
문제는
그를 깨달을 지혜와
믿어지는 온전한 '믿음'과
그를 사모하고 결단하는
우리의 선택이다
또한
허락하라 조용하라 외칠 수 있는
담대함을 위한
매일 기도
매일 은혜가
더욱 필요할 뿐이다
할렐루야다
십자가를 먼저 지고 가시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리 높여 찬송합니다
[행21장]
39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허락하라'라 한다고
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허락하'여 준다.
어이없는 상황 ^^*
'애굽의 살인자'로 착각하고 있던
천부장이
(살인자가) 허락하라고 한다고
그 말 한마디에 돌연 허락하는 상황.
그거 ,좀 어이없는 상황 아닌가?
그리고 거기에 더불어
'조용하라'는 한마디에
지금까지 죽일 듯 달려들던 군중들이
갑자기 분위기 대 반전 ...
조용히.. .
그것도 '매우 조용히'... ^^; 되었다 한다 .
놀랍지 않은가?
와우..다.
그냥 바글바글 뒤죽 박죽 해
'천부장'이 직접달려나올 정도의 소란하던
바로 목숨을 위협받도록 곤란을 받던 그 장소,
그것도 '층계' 에서 ^^;
'말한마디로'
'매우'
'조용하게' 만드는
일련의 상황들이
완전히 '대 급변' ,
대 반전의 상황이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무엇인가?
무엇이 이리 만드는가?
한마디로 '권위' 아닐까?
알지 모르는 권위.
'카리스마'
'영적으로 콱 눌러버리는 엄청난 무게의 권위'
고난은 극도로 달하지만
그 상황의 당사자가
하나도 흔들리지 않는 '차분함'과 '초연함'으로
그 모든 상황을 일거에 통제해버리게 될 수 있는 유일한 이유.
그렇지 않고는 되지 않을 그 무엇.
그 무엇의 정체가 바로 '초연함'이고
그 초연함 뒤에 있는 '카리스마' ,
즉 '성령'의 보혜로 이글거리는
하나님의 권위를
마치 '고양이 '앞의 쥐같은
엄청난 두려움으로
일거에 상황이 급변하는 거다 .
[행22장]
2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이어 이르되
'히브리말' 때문에 조용해졌을까?
그러한 상황에서 '히브리말까지 하니'
'더욱 조용한'거지..ㅎㅎ..
놀랍지 않은가?
말씀을 묵상하면서
십자가 달리시기 얼마 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사도 바울의 그 곤경이
마치 '십자가 지시기 전날'의 그 곤욕과
너무나 유사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고난에 '직접' 동참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동참하는 '바울'님.
그러나 그는 '예수님' 의 십자가 사역 때(어찌 사역이라는 표현으로 그 감사함을 다 표현해낼 수 있을까.. 주여..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이 언어의 제한성과 부족한 저의 지혜를 용서하소서 ㅜ.ㅜ)와는 확연히 다른
한가지가 분명히 더 있다.
6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그것은 바로 '큰 빛'으로 형상화된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다 .
10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큰 빛 가운데
'들어가라' 시는 강력한 소리를 들었다.
11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들어가라 시며
들어갈 수 없도록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모든 '자신의 할 수 있는 바' 능력 자체를 차단 당하게 하시고
온전히 이끌림 받아
다메섹에 들어가게 하시고
과정의 철저한 '인도하심'으로
완전 새로운 사람으로 탈바꿈되는
'성령의 강력한 인도하심으로 인한
중생, 성화, 대 격변, 탈태환골'의 체험을 체험한 후였다.
그렇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
늘 하나님과 성령님으로 교통되어 계신 분이셨지만
그러함에도 '올곳이 '홀로
온전한 제사, 완전한 제사로서의 '십자가' 어린양으로서
감당을 하시었고
그리함으로 '부활'하신 후에야
이 땅에 성령의 임재를 허락하신 상황이 되었지만
'바울'은 성령의 임재를 통해
'큰 빛' 가운데
실재화된 '성령'님의 이글거리는 임재 가운데
이 상황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그 '권위'.
그 층계에서
그 모질고 두려운 군중 앞에서
'천부장'이란 높은 계급자 에게
'허락하라'는 단 한마디로
'허락받아'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해냄으로
바야흐로 '매우 조용하게' 그 상황을 만들 수 있는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이다.
놀랍고 감동스럽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멋짐이다.
상황의 대 반전이고
지금까지의 '예수 십자가 고난'을 보는 듯한
모진 고난은
오히려 이 모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게 위한
갈등의 변주를 보는 듯한 드라마틱한 감동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오늘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 뚜렷해지지 않는가?
우선
모든 고난은 '예수 십자가'를 같이 지기 위한 설정일 뿐이라는 거다.
두려워할 일도 놀랄일도 없다.
그냥..
내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같이 따르도록 허락되어진 '삶'이고
그게 '내 사역'의 본질임이다.
어떻게 내가 현재 위치하고 있더라도
'사도 바울'님의 담대함을
내 담대함으로 받아 내도 될
당연함이다. .. 라는 거다.
할렐루야.
또 하나,
예수님의 십자가와는 조금 다르게
나는
좁은 길을 가기를 선택하게 된 우리는,
'큰 빛'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선택,
구원의 길에 들어선 자들이라는 거다 .
그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겪어내게 하셨던
그 '큰빛'의 기억들,
그 '큰 빛' 속의 가슴두근거리는 '감동과 전율의 순간'들을
난...
최소한 수없이 많이 도 체험했고
지금도 기억할 마음과 가슴과 육신의 체험들이 있다.
그러니.. 내게는
비록 아직도 부족함으로 몸부림을 칠 죄성들이 잔존하나
매일 말씀을 보고
매일 은혜를 경험하고
매일 기도함을 멈추고 잇지 않으니
주께서 '놀라운 권위'로
언젠가
눌리려 하던 이 모든 '층계'위의 고난이
내 하나님,
우리 예수님을 전파하기 위한 '극적인' 상황임을
기억하고
기대해도 좋을 거 같다 신다.
감사하다.
주님.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들어서는
사도바울님의 '예수 고난'과 너무도 유사한 상황을 봅니다.
저것.
저 상황.
주께서 분명코 '제자된 자의 온전한 삶'의 유형이
'모두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그러한 삶의 모본이 아닐런지
그리 투영되어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과는 조금 다른 상황이
바로 '큰 빛'으로 형상화된
성령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와 현시로 인한
홀로 두지 않으시는 든든한 상황 하에서
어쩌면 당연한
'당당함과 담대함'.. 이 있었습니다.
그 모질고 큰 '군중의 무리'와
'천부장'이라는 세상의 큰 권세가
순간 ,일시에 '매우 조용히 되고'
그런 상황을 '허락하지 않으면 안될'
엄청난 권위의 순간으로 바뀌어 버림을 보듯
성령의 임재로
강력히 호위받는 다는 사실입니다.
주여.
그렇습니다.
'오직 십자가만 자랑거리'가 되고
오직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소명이 되고 사명이 되며
오직 모든 인생의 여정이
'주님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삶이
어찌 저러한 모습이 되지 않을런지요..
주여.
제게도 '큰빛'을 경험하게 하소서.
제 안에 운행하시는 '성령 하나님'.
제가 거하는 '주님 예수님'의 영 안에서
오늘도 또 하루 발걸음을 떼게 됨을
잊지 않게 하소서.
주여.
예수 그리스도의 뜻,
그 이외 그 어떤 것도
당황하거나 매이지 않게 하소서.
층계에서 벌어지는
그 인간 말종들, 사단의 득실거리는 거 같은
이 세상의 횡행함에 대하여
하등 맺히는 게 없게 하소서.
오히려.. 담대하게...
조용하라..
매우 조용하게 되거라... 선언하면
그리 되어지는
내 안의 담대함과
간결함과
정결함을 허락하소서.
저들은 '조용하게 '시켜야 될 대상이지
같이 싸워서 조용히 만들 대상이 절대 아님을
'큰 빛'으로 임하신 성령께서
확신하고
제 안의 내재된 가치로 삼게 하소서.
감사합니다.
주여.
돌아보면 하나하나 준비시키시며
제 안의 너무 깊게 박혀있던
상처라는 이름으로 형성된
사단의 발톱들이 하나하나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지시하시고
성령으로 인도하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함이
오직 유일한 기쁨임을 깨달아가는
저..
주하인..
오늘도 '주님의 바울님에게 그러하셨음'을
기쁨과
기대로 바라보며
저도 그처럼 될 수 있길
큰 빛이신 '성령님' 안에서 기대해보는 하루 입니다.
모든 말씀
거룩하고 살아계신 우리 주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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