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치유를 넘어 (눅17:11-19) 본문
(눅17:11-19)
12.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영적 , 심적 나병은 진정없는지...
나병은 아픔을 모른다.
정신병과 신경성 병은 그 사람이 자신이 이상함을 느끼는지 못 느끼는 지 차이에서 구분한다.
잘못을 모르는 되풀이 되는
깊은 마음의 병은 없는지....
설령 있어도 예수님 앞에만 가면
고칠 수 있다.
예수님을 '멀리'뵈어도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소리 높여 '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
고칠 수 있다.
이 사회.
이 나라.
나.
영적 문둥병을 인식해야 하고
그 심각성을 인정해야 하고
주님 앞에 가져가면 나을 수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저들처럼 소리 높여 불쌍히 여기시길 기도해야 한다.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그러면 고쳐진다.
고침을 받는 것은 진정 중요하다.
그 고침을 받음은 너무도 당연함에도
그리 고침을 받지 못함은
우선 '그 병'을 인식하지 못함이요.
인식해도 주님 앞에 가져가도 나을 확신을 가지지 못함이다.
또한 그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모든 일에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함이요
예수님께 감사하지 못함이다.
사람.
본성이다.
도움을 받을 때는 처음에는 안절 부절 못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도움주다 안주면 화낸다.
당연히 생각하는 속성을 지녔다.
그래서 함부로 도움 주는 것은 참 어려운게 사실이다.
주님 앞에 도움을 청하기 전에
세상 어떤 일이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고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배우기 위함인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게 마음이 훈련이 되어야 한다.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신다.
하나님은 '문둥병' 고치는 것 따위에
그 분의 존재가치를 두지 않으신다.
그 분은 그런 병은 의미가 없으시다.
온 우주를 만드시고 그 우주의 운행을 도우시는 분이
겨우 병하나를 고침이 어찌 의미가 있으시겠는가?
그것을 돌아 생각하면
다른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인생.
참으로 고민 덩어리다.
어찌 그렇게 무겁기만 한가?
의미를 찾아 집중을 유지할 만한 가치를 찾을 길이 없다.
아무리 '선하게 '살려 노력해도
하나님의 뜻처럼 온전히 착해지려해도
날 따라 붙는 문둥병같은 '죄악'들...
하나님은 이 인생의 고민과 고난이
비록 우리에게는 중차대하고 무거워도
실은 그런 어려움을 허락하신 이유가 있으신 것이다.
그 이유.
그 의미.
그것을 오늘 예수님의 입으로 직접 말씀하신다.
모든 어려움의 본질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고
' 예수'님의 감사함을 드러내지는 단계에 오면
진정한 구원,
영혼의 구원을 위한 도구 일 뿐이다.
이땅.
생각을 여기에 고착시키면
아주 어렵다.
인생을 어찌 우리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가?
수많은 철학자들과 머리 좋은 천재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정의하고 정리하려 했지만
깨달을 수 없었던
인생의 이 모든 희노애락과 삶을 허락받은 존재의 의미는
절대로 맞지 않을 수 밖에 없고
온 우주가 다 끝나고 파멸이 되어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제자리의 다수의 학설만이 나올 뿐이다.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님.
오직 성령님의 존재가 인정이 되어야만
이유가 이해가 된다 .
천국과 영원까지 생각이 확장이 되어야
그제야 이해가 된다.
그 것은 논리가 아니다.
그 분들과 나 만의 긴밀한 관계에 의해서
이해되어지는
농염히도 가슴에 익어나는
'아..' 하는 감탄의 느낌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령의 임재'가 아니곤,
하나님의 예정된 허락이 아니곤
예수 십자가가 그 분들의 허락된 은총으로
영혼 깊숙이 들어온 자들이 아니고는
절대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제야
문둥병이 있던 자들,
'나 같은
허겁한 자들까지
그
구원의 뜻이
비록 설명할 수 없어도
'그래.. 맞아..' 하면서
깊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오늘 묵상.
희망이다.
나 .. 같은 깊은 고뇌의 자들에게도
단언코 회복된다는 레마의 위로시다.
그 아픔이
단지 '회복'에만 의미가 있음이 아님을
다시금 깨닫게 하시는
기대의 말씀이시다.
진정한 구원을 위해서
허락된 아픔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귀한 말씀이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앞세우고
예수님께 더 감사하는 하루가 되길 기대하시는
세밀한 가르침의 말씀이시다.
그래서... 난.. 말씀이 ..늘 .. 감사하다.
기도
주님.
가르치시는 많은 것들이
정말 감사합니다.
내 생각을 조금 더 넓히 겠습니다.
병이 허락된 이유.
이 땅의 어려움이 허락된 이유.
풀리지 않는 지루함의 이유.
비교되는 낮아짐의 이유....
모든 데에 실은 '영생의 구원'까지 뜻을 확장시키어보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주님.
이해를 넘어서는 확신을 주소서.
어렵지만 기쁨으로 잔잔한,
남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을 알려주신
미련하지만 사랑받는 자의 기쁨을
가슴 깊이 간직하게 하소서.
예수님.
하나님 제 모든 감사들 받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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