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나도, 그도 아름다울 수 있다 (욥21:17-25 ) 본문
제 21 장 ( Chapter 21, Job )
구름이 많아도
하늘은 아름답다.
결점이 있어도
여기서 하늘로 표현되는
'예수님'이 전제가 되면
그래도 아름다운게
결점 많은 - 구름으로 표현되는- 내 영혼이다.
주님 만있으시면
난 아름답다.
주님 만 전제가 되면
그도 아름울 수가 있다.
모두가 그렇다.
무엇이든 이해가 된다.
19. 하나님이 그의 죄악을 쌓아 두셨다가 그 자손에게 갚으신다 하거니와 그 몸에 갚으셔서 그로 깨닫게
하셔야 할 것이라
욥도
소발과 '악'에 대한 기준이 그리 다르지는 않다.
단,
(하나님과 동행하던) 자신은 악인은 아니라는 전제와
악인의 보응이 '자손'에게 까지 내려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만
다르다.
어찌 보면 그의 '악'에 대한 기준도
어찌보면 편협하여
함부로 하는 정죄의 빌미가 되어
타인에 상처를 줄 위험성도 다분히 있을수 있다 느껴진다.
그는 의인이 아닌가?
그럼에도 그리 느껴지는 것은
그가 '고대'의 사람이기에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과는 너무도 다르지...
어제 예배 후 '남전도회 심방'이 있었다.
울 교회는
수도적 성향이 강한 바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없지 않아 있음은
여러차례 말한 적 있다.
집사님 한 분이
다음 주 야외예배에 '고행' 행위 ^^;;; 를 하잖다.
전 교인 다........
의사인 나.
생각이 다른 그들의 주장이 탐탁지 않았던 나.
얼른 '절레 절레' 발언을 해 버렸다.
해버리고 나니
속이 울렁인다.
'또 실패했구나.
인내..........'
눈치도 보이고
스스로 자괴감도 들고
화도 나고
어이도 없고......
잠시지만.
이야기는
학생들로 보이는 무리 들이
침깨나 뱉으며 다리떨고
밤에 공원에 모여 있을 때
어른으로서의 처신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모르는체 하고 지나가며
무서워 하는 마음
미안한 마음
뭐라 하지 못하는 자로서의 자괴감.. 등에 대하여
솔직히 말씀하신다.
나는
아파트 밑 공터에 앉아있는 아이들을
혼내지는 않지만
가만히 가서 그들 옆에 앉아 있으면
그들이 그냥
내 눈치를 살피다가 가버리는 경우가 많다.
아니면 분위기가 살벌한 듯할 때는
그냥 올라가 버리기도 한다.
이럴 때
난 내 속에서
다양한 생각 들이 올라온다.
그 아이들 속에서 같이 앉아서 가만히 쳐다보고
승리할 때는
' 거봐.
이렇게라도 하면 아이들이 어른을 어려워 하는 이유가 되는 거야'
하지만
'잘못되어 내 급한 성격이
어이없는 아이와 부딪치는 상황이 일어나면
난 손해볼 수도 있는 것이다.
요새 어떤 세상인가?
실제로 목사님 말씀에
아시는 사람 하나는
그 '정의감'에 불타
아이들과 싸우다가 17번 교도소에 들어갔다 왔다고도 한다.
무엇이 옳은가?
개인의 안전이 옳은가?
정의감이 틀린 것인가?
그렇다고 누구나 다 지혜로운 것은 아닌데
그 속에서 올라오는 자괴감은 또 어쩌구..
다시 야외 예배 문제로 들어가
그 열심인 믿음의 용사를 보면서
그 불타는 열정이 잘못되었는가?
나도 한때 그런 열정이 넘치지 않았던가?
그러나
현재의 내 생각대로 '파상풍'이라도 걸리면..
'하나님의 뜻이겠지요.. '라고 넘어가는
그 분의 무대뽀가 틀린 것인가?
자신의 뜻대로 밀고 나가다가
원치 않는 분들의 고난이나 몰고옴은
내 주장대로 '일률적인 밀고나감에 의한 율법적 성향'이 맞지 않는가?
......
무엇이 옳은가?
목소리 큰 나는 결국
선택적으로 시행하자고 주장하고
마무리 시켜 놓고야 말았지만
순종하지 못하고
급하게 내 뱉은 내 포악으로 인해 내 속의 답답함은
또 나를 누르려 하여
회개의 시간을 혼자 보내야 했다.
그날 저녁..ㅎ
아침에 일어나기 싫었다.
어제 생각이 부딪친 탓일까?
이럴 때
'악함'에 대한
정확한 선을 긋지 못하고
머리 속에서 다양한 생각으로 부닥치면
이렇게 몸이 힘들 때가 많다.
하지만 억지로 일어나
마사이 슈즈로 갈아 신고
강변가를 걸어가는 동안 '회개'하기로 하고
대로에 들어서는 '묵상'키로 맘먹으며
열심히 혼자서 중얼거리면
'방언'기도를 하면서 걸었다.
한참을 걸었을까?
문이 닫혀 있는 주점 앞 의자에
70은 넘어 보이시는 할아버지 께서
땟국물이 졸졸 흐르는 운동화와
속에 내의도 잘 못 갖추어 입으시고
양복차림으로 앉아 계시는 폼이
눈에 아프게 들어온다.
가다가 '끼~익'하고 발걸음을 멈추어 되돌아 갔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내 손이 상의 앞 호주머니에 들어 가 있었다.
반쯤...
지갑이 있는 곳이다.
그러면서 멈칫 했다.
'노숙자로 오해해서 함부로 돈을 주면
그 분이 혹시 가슴에서 상처나 입지 않으실까?"
' 배고파서 힘드신 분에게
돈을 알아서 드림은 뭐가 나쁜가?'
' 돈을 습관적으로 주려고 하는 것은
내 선하려는 행위를 만족시키려는
내 속의 위선은 아닐까?'
..............
짧은 순간 많이도 생각이 스친다.
그러면서 시간을 끌기 위해
손을 가슴에 댄 듯 폼을 재고
여러가지 여쭈어 보았다.
'할아버지.. 여기서 누구 기다리세요?
배는 고프지 않으세요?'
.......
할아버지의 눈이 묘한 빛으로 바뀌신다.
부끄러워 하기도
기대감도
의지하시려는 느낌도.......
난
가만히 내 속의 반응을 살폈다.
주님이 원하시면
'선한 느낌이 날 사로잡고
난 내 행위에 감격을 느낄 것이다'라는게
그 동안 말씀 앞에 내려 놓은 결과 얻어진
하나님 앞에 내려놓음의
아주 작은 경험이었다.
손을 대고 이야기를 하던 그 짧은 순간
나는 그냥 손을 빼고 돌아섰다.
별 다른 느낌은 없는 것으로 보아
주님은 그리 날 나쁘게 보시지 않은 것 같다.
걷다가 불현 듯
이런 생각이 떠 오른다.
' 복잡하던 내 생각 중에
선택의 기회를 놓치고
후회와 좌절감과 죄책감으로 허덕이던 경우가 많았다.
이제는 많은 부분 자유로와 졌다.
욥이 보이는 '악'에 대한 기준이
그게 옳든, 친구의 기준이 옳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욥은 자신의 선택이 옳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주님 안에서 주님과 교통하는 과정에서
주님께 허락 받는 그의 감정이란 사실 만이 옳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랬다.
'악'할 수도 있고 잘못 판단할 소지가 많았던
위의 몇가지 사건에도 불구하고
난 내 '선택'을 했고
비록 고칠 몇가지 확실한 잘못 - 급하게 내 뱉은 말 , 속상해 하는 감정 -은 있지만
'악'은 아니기에
그리 죄책감을 느낄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주님 만이 판단자라는 이야기다.
욥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그가 악에 대하여 생각하는 정도로
나도 비슷하게 느끼게 해주신다.
약간의 성장이다.
시선을 돌려
'타인'에 대한 판단이다.
목사님의 철저한 '성결'하시려는 노력과
그의 한계를 짐작할 수 있으며
그 분과 그를 추종하시는 몇 분들의
율법적 성향 - 싫어하고 내가 정죄하던 부분 -에 대하여서도
그게 과연 흑백의 논리로
'악'이라고 징죄할 수가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나에 대한 결론 처럼
그들도 그 들 나름대로 그리 악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돌아서 학생들을 피해가신
집사님의 밤길 공원행도
질타할 거리가 아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을 한번이라도 불렀으면..
결론은 이것이다.
'악'에 대하여 온전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이브로 인한 '선악과 '사건이 후
원죄는 우리 속에 어김없이 자리 잡았고
예수님의 선택에 의하여
이전의 지은 죄는 온전 히 씻김을 받았지만
아직도 그 원죄로인한 자범죄는
날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이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으로 씻김을 받아야 할
운명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아직은 갈 길이 먼
조금은 덜 악한 원죄적 존재일 뿐이다.
사람의 탈을 쓰고
누구 온전한 사람이 있겠는가?
누구 온전히 악한 사람은 또 있겠는가?
그냥
온전하기 위하여 몸부림 칠 뿐이고
악해 보일 뿐이지...
우리는 이러한 결점이 있는 원죄적 존재이기에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한다.
그 선택은
아까의 예를 들었지만
'선'과 '악' 보다는
'좋고' '더 좋고'
'악하고' '덜 악하고' 사이에서의
선택일 뿐이다.
그 선택이 쌓여서
정말 악함과
덜 악함의 차이가 결정될 뿐이다.
그러기에
악함 속에 있는 자가
누굴 더 악하다고 정죄할 수가 있고
누구는 온전히 깨끗해야 하다고 기준을 세우고
그가 그 틀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실망하고 돌아설 수 있겠는가?
모든게 어리석은 생각일 뿐이지...
결론은 이것이다.
이러한 '악함과 '덜 악함'사이에서
악함이 악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것은
그것이
주님 안에서의 '선택'이냐는 것 뿐이다.
매 선택의 순간에
주님을 인식하고
주님의 뜻 생각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리고는 '판단'의 결과 조차 주님께 의지하면
그가 이루신다.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
그러기 위해서는
늘 말씀 위에 서야 한다.
그것은 당연하다.
늘 주님의 손을 잡는 '동행의식' 을 유지하여야 한다.
의지로는 되지 않는다.
주님이 사랑이시고
주님은 살아계심을 체험하는
임재감이 날 사로 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찬양을 해야한다.
기도를 해야한다.
묵상을 해야한다.
주님이 원하시면 구제도 해야 한다.
모든게 주님의 뜻 이다.
삶과 신앙은 하나다.
삶과 주님은 분리되어 생각되면 안된다.
그럴 이유가 있는가... 라는 물음이 다시금 꿈틀 대려 한다.
주님은 기쁨이고
주님은 평안이다.
그 기쁨은 샬롬의 기쁨이다.
행복이다.
인생의 끝까지 의미가 생기고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생긴다.
그리고 그 끝은
영원한
현 샬롬의 수천 수만배의 평강의 증폭 가운데서의 삶이다.
쉽게 말하면
천국이다.
그러기 위해라도
우리는 끝까지 '악'함과 '선함'의 사이에서
고민하고 정결해져야 한다.
방법은 다르다.
너무나도 개인차가 많고
순간순간 흔들린다.
주님 안에서
주와 함께 동행하려 결심하는
'소수자의 길'을 느끼는 순간
넘어 뜨리려는 악한 세력이 준동한다.
그래서
모든 쉬운 것들이 어려워 보이고 흔들린다.
높이 나가려 하면
기초가 흔들린다.
상처가 날 물어 뜯는다.
좌절 시키려는 엉망의 세력이 가만히 두지 않는다.
현실도 똘똘 날 감아 쌓으려 한다.
주님의 이름을 꺼내는 일조차
어리석은 일 처럼 손가락질 하는 것처럼 보여
의기 소침해지고
주님 일 하는 열심이 가라앉아 버리면
온 세상이 꺼질 듯 메마른 지옥의 우울함으로
사로 잡아 오려 한다.
그러기에 어느 경우 더 열심을 내야 할 때가 온다.
지금이 그 때다.
새로운 판단의 기준에 대하여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묵상을 하고 있다.
어렸을 적
선과 악의 개념이 단순하고
그리 생각할 거리가 없었을 때는
선인과 악인의 구분이 쉽다.
열심을 내기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관계 속에 들어가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사연이 없는 자 없음을 볼 때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그래서 어떻게 열심을 유지해야 할지 헷갈리는 때가
종종 있다.
이럴 때
정말 필요한 것이 '내려 놓음'이다.
주님 앞에서의 내려놓음.
모든 것을 그 분에게 맡김.
모든 판단 조차 주님이 하시길..
아침에
난
그 분 할아버지를 뵈면서
잘못된 판단 보다는
주님이 인도하시는 감성에 내려 놓고
내 감정의 요동이 아닌
선한 주님의 인도하심이라 확신될
어떤 성공을 맛보았다.
아..
난 아름다울 수 있다.
다른 자들도 또한
그럴 수 있음을 보았다.
적용
1. 아버지 학교 간다.
2. 기도한다.
3. 회개한다.
4. 판단에 대하여 다시 한번 주님 앞에 내려 놓는다.
5. 무조건 불뚝하고 튀어나오는
이 어이없는 분노를 가만히 드려 다 보겠다.
6. 성경 여섯 장 읽겠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잊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
모든 판단의 기준은 주에 있음을 다시금 되뇌이게 해주심을 감사드려요.
엉터리 같은 의 분을 가라앉히게 하소서.
엉터리 같은 도피도 하지 않게 하소서
온전히 그 마져도 주님이 허락하시는 인도에 따르길 원합니다.
예수그리스도시여
의탁합니다.
당신의 십자가 앞에 내려 놓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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