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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하나님의 뜻인가 ( 욥 22:2- 1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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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하나님의 뜻인가 ( 욥 22:2- 11)

주하인 2008. 10. 7. 12:35

제 22 장 ( Chapter 22, Job ) 
 

 

조그만

노란 꽃이

많은 편안함을 준다.

 

아주 적어서

존재감 조차 느끼기 어려운..ㅎ

풀꽃임에도

시선을 들이대고 쳐다보니

그의 노란 빛과

어울리는 녹색이 주는 생기가

마음을 뿌듯이 한다.

 

주님이

우리 악한세대를 보는 눈도

저런 풀꽃을 보시는

뿌듯함은 아닐까?

 


2.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스스로 유익할 따름이니라  
3.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4.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외함을 인함이냐  
5.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극하니라  
6.  까닭 없이 형제의 물건을 볼모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7.  갈한 자에게 물을 마시우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8.  권세 있는 자가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가 거기서 사는구나  
9.  네가 과부를 공수로 돌아가게 하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10.  이러므로 올무들이 너를 둘러 있고 두려움이 홀연히 너를 침범하며  
11.  어두움이 너로 보지 못하게 하고 창수가 너를 덮느니라

 

  엘리바스의 변론이 이어진다.

그의 논지는 이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은 하나님께 하나도 유익되는 것은 없다. '

맞는 말이긴 하다.

 '네가 의로워도 잘나도 하나도 주님께 이익은 없다. '

맞기는 맞다.

하지만

주님의 의중을 너무 앞서 가는 것 아닌가 싶다.

주님은 우리를 이익으로 만드신 것은 아니고

아름다운 짓.. 하는 것 보시려 만드신 게 목적이신데..

아이들 몸짓 눈짓 발짓이

너무 이쁘지 않던가?

 그러면서 그의 말이 급박히 이어진다.

' 네 악이 크지 않더냐

  네 죄악이 극하니라'

하면서 그의 있지도 않은 극악한 사실을 늘어 논다.

자신의 논리를 관철시키기 위한

급한 마음이 읽혀진다.

'갈한 자.,. 주린 자... 과부... 권세...팔꺾기...'

이 말만 들어봐서는

극도의 죄인이 따로 없기는 없다.

 

 엘리바스의 말에는

몇가지 공감할 이야기가 없지는 않다.

 우선,

저런 악한 들은 혼나서 싼게 맞기는 맞다.

반드시는 아니지만..

또한,

주님 앞에 우리 인간이 내세울 거리가 없는게 맞다.

하지만

그와 다른 친구들의 논리는

차갑고 냉정한 정죄만 있을 뿐

사랑은 느껴지지 않는다.

 친구 욥의 고통에는 아랑곳 하지 않는 냉랭함은

차치 하고 서라도

주님의 공의만 내세우다 보니

앞서 써놓은

그 분의 우리를 쳐다보는

아련한 눈빛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하다.

 우리의 악한 행실이

주님 보시기에 아주 악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100원짜리 훔치고 고민하는

어린 아이를 보는시선이

어떨까?

안스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그걸 가지고 고민하는 아이가

대견하지 않을까?

더 따스한 눈이 아닐까?

만일 차갑게 정죄하고 혼내길 준비하는 아버지라면

문제가 많은 역기능의 아버지일 것이다.

 그래서,

좋은 아버지의 좋은 역할 모델이 

정상적이고 따스한 사람으로 성장하는데

꼭 필요하다.

사람이 사랑을 하려면 사랑 받음이 필요하다.

엘리바스 이 사람은

주님을 정죄만 하는 차가운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모양이다.

아마도 성장과정에 문제가 있었나 보다.ㅎㅎ

 

 또하나

그는 그럴듯한 그의 논리에

'욥을 무조건 나쁜 짓한 사람'으로 단정하고

억지로 모든 나쁜 짓을 다하는

악한 사람 - 누가봐도 용서하기 싫은 - 으로 꿰어 맞춘다.

각본 쓴 듯.......

친구라면 그가 그런 인품이 아님을 알텐데....

 그의 자신의 논리에 맞추기 위한

이러한 지레 짐작적인 꿰맞춤이

그의 문제만은 아님은

신앙생활 하는 도중에 얼마나 많이 볼 수 있는지 모른다.

교회마다 분란이 없는 곳이 없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그렇겠지만

믿는 자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자로서

저래도 되는 가.. 하는 안타까움이 없지 않다.

그런데

어느새 그 모습이 내 모습이기도 함을

발견하고는 깜짝놀라기도 한다.

 엘리바스의 이러함.

이러한 '하나님 뜻'을 빙자한

겁없는 정죄의 행위가

나또한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어제 그제 남전도회 예를 들었지만

한 집사님이 제기한 의견에

내가 제동을 걸었다.

 그분은 자신의 신앙 열심을 내세우다가

내가 제동을 거는 이유로

어린 자들이 발바닥 다쳤을 경우를 예로 들자

'하나님의 뜻' 이라 하였다고

어제 묵상 글에서 언급했다.

그게 어디 하나님의 뜻인가?

하나님이 좋아하실 듯한 행위를

미리 알아서 하고 나서

자신의 만족을 채우고자 하는

'자신의 뜻'이지.......

하나님이 어디 신발 벗겨 파상풍 걸리게 하고

나 몰라라 하는 분이신가?
 나도 마찬가지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

스스로 납득하기 어렵지만

꼭 해내고 싶은 욕구를 관철 시키고자 할 때

'하나님의 뜻'임을 전제로

유야 무야 마무리 한 경우가 없지 않다고

어찌 말할 수 있는가?

 

이 지레 짐작.

여기에

많은 오류가 생겨나고

이 지레 짐작적 공격은

타인으로 하여금 얼마나 아픈 상처를 많이 만들어 내고

교회의 분란을 얼마나 많이 가져왔고

오늘날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이 심리적 고통을 겪는 분들이 많은가?

 

정말

그게

하나님의 뜻인가?

 

그렇다면

그 분이나

나나

앞으로 그리 할 모두

'하나님'의 대변자인가?

성령인가?

천사인가?

........

 

무언가 논리적으로 허술한 부분을 가지고

신앙인의 모습으로

그것도

신실하고 경건한 자로서

나를 포장하기 위한 도구가 아닌가?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권선징악'이나 '계율'마져 들이대는

냉철하고 의지강한 자라면

이 땅에서 존경받기 쉬운 도구가

바로 이 '하나님의 뜻'이다.

저항하자니 머리가 송연하고

저항 해보았자 혼자만 바보되고...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자.

정죄는 죄다.

주님을 대신하려는 '건방진' 죄다. .

지레 짐작은 사람을 묶는 올가미다.

악을 덧 씌우려는 악한 자이다.

내가 그리 할 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뜻으로 남에게 강요하지 말자.

아무리 성스러워 보이고 주님의 뜻이라 판단 되는 일도

그 분의 동의와 기도와 상황의 판단하에

말씀으로 인도 받은 후 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 앞에

이 급박한 생각을 내려 놓아야 한다.

급한 성질을 내려 놓아야 한다.

 

 

주님

놀라우신 주님.

그래도 그래도

주님께서 말씀을 이어가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특별히 주님의 뜻으로 남을 함부로 정죄하고

조정하고픈 어리석고 강팍한 심사가

얼마나 더럽고 무서운 죄인질

내 스스로 깊이 깨닫게 해주소서.

남에게 적용시키기 보다

나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내려놓는 기회가 되길 원합니다.

주여.

주님은 사랑이심을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모든 엉터리 같은 이 세상의 벌어지는 일이

사랑 없음 탓임을 압니다.

아무리 좋은 사상도 논리도

주님의 뜻일 듯한 행동도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이해되고 동반되지 않으면

그것은 또다른 엘리바스의 소리인줄

잊지 않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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