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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여야 하는가[암4:4-1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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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여야 하는가[암4:4-13]

주하인 2024. 12. 8. 07:23

부제) 나는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는 주하인이다

        누구나 다 주하인이어야하고 주님의 자녀이어야 한다

 

ㅇ산 밭 농막 콘테이너 & 창고

어제 ㅇㅅ 밭에 드디어

노란 농막 컨테이너가 들어왔다.

 

얼마전 풍파에 넘어졌던 

 

그래서 그 폭설 뚫고 일으켜 세워진

온전한 '스틸 창고'와 더불어

참으로 이 황량한 땅,

지난 봄이후 내내 

기쁨의 땀, 

흔들림없는 감사의 노력으로 

마침내 일구어지고 소출 보게 하신

저 황량할 수 있을 

초겨울 밭을 

완전히 꽉채우는 느낌이다.

 

저 작은것에 기뻐할 수 있음

그를 통하여

모든 것이 합력하여

가장 선한 방향으로 이끌어주셨음이

바로

하나님이 허락하심임을

우리는

우리 가족과 나는

절대로 확신할 수 있다.

 

그래서 

저 작은 것에 

저리도 환호할 수 있음이다

온 천하를 감싸시는 하나님의 품안... 그 안에서의 자유 ^^*

보라

바야흐로 

온 세상을 감아 안으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아내의 등뒤에서 감싸 안으심을

느껴지게 하시지 않으시는가?

삶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 현재가 어떠함에도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주하인이고 

주하인들이며

하나님의 사랑받는 

하나님의 철저하신 긍휼 안에서 걸어가고 있는

주님의 자녀들임을 말이다

할렐루야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5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벧엘과 길갈에 대하여는 아래에 잘 정리 놓았다. 

영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지만

또한 '타락'과 '왜곡'의 대표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수은제'에 대하여도 아래에 정리 해놓았다. 

 

오늘 말씀에 

'범죄'와 '죄'

아침마다 3일마다 '희생'과 '십일조'를 드리면서도

버젓이....그렇다.. 버젓이 그런다 ㅠ.ㅠ

 수은제와 낙헌제를 

그곳 , 가장 신성한 장소에서 

가장 훌륭한 신앙인의 율법적 형태로 ㅜ.ㅜ; 드려진다.

그러하지만 

놀랍고 무섭게도 

동시에

'죄와 범죄'가 번연히 지어진다.ㅠ.ㅠ  .. 

 

 행위따로 마음따로

삶따로 믿음따로..

'믿음'따로 '현실' 따로....

니골라당 아닌가?

 

지금의 상황 아니던가?

주말 믿음... 썬데이크리스찬.. 그를 훨씬 뛰어넘는

신앙인들의 타락.

죄가 만연하면서도 '믿음'에 대한 정보는 넘치는... 

 

 

 그런데 그것을 

주께서는

"너희가 기뻐하는 대로"라고 

한마디로 정리해 놓으셨다.  ㅠ.ㅠ

 

 무슨 말씀이신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고 움직인다면

어찌 저런 일이 있겠는가?

 

 '내'가 중심이 되고

내가 누군지 모르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안하기 때문이 아니던가?

 

보라.

모든 '신성한 행위' 와 동시에

'죄와 범죄'가 일어나는 이유 !

 정말 하나님을 의식하고

자신이 하나님으로 인하여 존재하고

하나님이 아니시면 '나'란 존재가 있을 수도 없다는

이 당연하고 당연한 이치가

우리의 영혼에 깊이 자리잡는

즉, '정체성'을 제대로 가지게 된다면

어찌 ..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저들... 

자신들의 기쁨과 목표가 우선이 되어 있음이고

하나님과 관계된 일체의 행동은

자신을 위한 '축복'의 도구이거나

오래 살아온 습관과 관습의 일부로 밖에 느껴지지 않기에 

저런 일들이 벌어지는 거다 .

 

그렇다 .

'내가 누군지'

내 정체성을 확실히 안다는 것.

그리고 그 정체가

'하나님을 전제로 하지 않은' 모든 것은

다 '엉터리'라는 것을 늘 인식하고 있다는게

정말 중요한 일이다. 

 

 요며칠.

전 세계를 경악하게 하며

바야흐로 대한 민국을 뒤흔드는 

극단적인 일이 벌어졌다. 

그것도 '대통령이 자기 민족'을 향해 

'처단'이라는 단어를 들먹이며

이 대명천지, 이 민주주의가 가장 앞서나가는 나라..

대한민국..

사회체제가  이 부족한 세상에서

그나마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오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벌어졌다. 

 

 바야흐로 '계엄'.

 

그런데.. 

그 이유를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다. 

단지, 술이나 '정신이상'.. '아내를 보호하고자 '하는 이유만이

유일한 가능성으로 짐작될 뿐이다. 

 

 그 모든것... 

맞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꿰뚫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는 것!' .

"정체성''의 혼돈.. 말이다. 

 대통ㄹ 이라면 

대 통ㄹ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이 뚜렷하다면

대통ㄹ은 국민을 위한 자이고

그렇다면 위함이 되어야지

어찌 처단'이 되는가???

 

 그것.

자기 정체성이 약함이며

그 정체성이 오직 '자기의 만족'이 중심이며

그 만족의 분야는 

오직 '자기 마음대로 라는 통제의 욕구'와

'사랑하는 아내를 보호하는 남편이라는

아주 아주 작은 '소자아'가

정말 중요한 대ㅌㄹ 이란 

큰'자아'를 눌러 버리게 되도록 하는

성장과정의 오류; ..

좋은 머리와

9수는 했지만  마침내 검사가 되고 

전임대통령의 눈에 들게 만든 '거짓 이미지..( 올곳은 청렴결백한 .. 대쪽같은'.. )

세상이 만들어준 이미지가 겹치며

바야흐로 '저 자리'에 떠밀려 올라가게 된거고

그에 따라

저 약한 '정체성'을 지니

미성숙하지만 강한 기회와 IQ와

세상의 갈채를 빌미로 한

사단의 혼돈이 

저이를 저러하게 몰고 가게된 동기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누구도 제어할 상황이 없어지자

그 바닥에서 용트림하고 있던

세상을 향한 그의 교만과 포악은

제어할 힘을 잃고 튀쳐나온거다. 

 

 그렇다. 

자신을 모르는 자... 

그 끝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며

그러한 결과는 

세상을 망치고 

자신을 불태우는 거다. 

 

 

6 또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를 깨끗하게 하며 너희의 각 처소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KJV로는 '너희 이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나온게 마지만

NIV로는 I gave you empty stomachs (너희 위를 비우며 ^^;)라 나온다 .

배고픈 고난 ㅠ.ㅠ

 

 

8 두 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하게 마시지 못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내가 곡식을 마르게 하는 재앙과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팥중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 내가 너희 중에 전염병 보내기를 애굽에서 한 것처럼 하였으며 칼로 너희 청년들을 죽였으며 너희 말들을 노략하게 하며 너희 진영의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1 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인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 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되풀이 되풀이 되는 고난에 대하여 묘사하시며

되풀이 또 되풀이 하시며

그 모든게 ''너희가' .. 하신다. 

'하나님께로 '

'돌아오지 아니한 이유'.. 라신다. 

 

 바야흐로 

ㅇㅅㄹ씨의 저 일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자의 극단적 실체화 -세상에 있지않은 실례라고 외신에서 지적하고 있다.. 누가 있어 저런 짓을 하는가?.... 난 마지막 시대.. 예수님 재림의 때 가 곧 가까운 대환란의 전조라 생각한다.    미친자?  이런 표현으로 부족한 일 이 아니던가?   정말 무섭고 두려운 자.. 아니던가?  ㅠ.ㅠ,.. 그러한 일이 이 시대 , 이 대한 민국에서 실제로 벌어진 것은 대 환란의 전조 증상으로 허락되어진 일이다.   깨달으라고.ㅠ.ㅠ -은

이제 곧 세상에 

어쩌면 이곳 저곳 도처에서 벌어지게 될 것이고

그때마다 주님께서 

'너희가 누구인지 모르느냐?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마지막 시대의 경고이니라" .. 하시는 것의 

시초라 하심이시다. 

 

 

무엇인가?

왜 나에게 

오늘

이 말씀을 주시는가?

 

 

나.

나는 나 자신을 잘아는가?

 잘 안다. 

'주 하인이자

주님의 사랑 받는 아들이며

난.. 울 가정의 가장이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울 가정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가야 하는 자다. 

 또 한 그러함을 통해서 올바르게 세워져 가는

내 '올바른 정체'를 

세상에 드러내게 하는 작은 도구가 됨으로 

그나마 

내 삶의 작은 반경에서 

돌이키고 또 돌이키며

주님 앞으로 돌아와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진정 어떠한 것인지... 

그게 비록 

나처럼 정말 적은 삶의 반경에서 조차

주님을 인식하고 사는 자의 어떠함,

그 평강과 평안을 세상에 드러내 보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조금이나마 

세상에 알리는 것을

'사명'으로 허락받은 자'가

내 정체로 

인식하고 

살아가고 있다.  ^^*

할렐루야.

 

 그런데.. 

그러한 나는

과연 오늘은 또어떤가?

혹시 '내 가정'.. '내 손녀들의 기쁨'... 이 우선되어

하나님은 잊혀지고 있지 않은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오직 크고 놀랍고 대단하며 거창한 일'에만 국한되어 있기에

내 가정을 위하는 것이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라는 

또 약간은 비틀린 착각을 하는 것은 아니던가?

 

 그 중심... 

나와 이웃과 하나님 사이의 중심을 잡는 것.. 

아무리 내가 누군지 정확히 알더라도

관계 속에서 매사매사 우리는 '선택'을 해야하는 

부담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매일 매일 중심을 잡는 말씀 묵상이 필요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이 

내 영혼과 마음을 주장하시도록 하기 위한

기도와 돌이킴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는 

아직은 유약한 믿음

내가 '정말 하나님의 뜻'가운데서

좁은 길을 선택한 '주하인'임을 

자주자주 잊게 되며

어느새 '하나님은 잊혀지고'

'하나님을 이유로 사는 나'.. 라는 

묘한 비틀림의 '나'... 

내가 중심이 되어 하나님을 모시는 나... 로 

왜곡되어버릴 수 있는게

이 땅의 삶이다. 

 

당연히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단의 영적 도전은

절대로 우리를

'이 영적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즉.. 

나는

주님 뜻대로 

이 인생광 야를 걸어가는

영적 전사이다. 

 

 

 

12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13 보라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이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니라

그 올바른 개념을 

'매일 '

'네 하나님'

"내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심으로 

붙들고 살아가야 함이다. 

 

그게.. '그 분의 이름'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내 삶속에서 드러내고 살아가는 것이다. 

 

 주님.

참으로 옳고 쉽지만

어찌도 이리 '복잡하고 쉬이 잊게 만드는 지요'...

 

살다보면

말씀을 붙들고 살다보면

그 뚜렷하고 명확하고 확실한 이유에

너무도 많은 '왜곡'과 '혼돈'의 논리들이 자리 잡으려 

용트림하고 

드디어는 이 시대에 들어

'포스트 모더니즘'.. 

내가 주인이고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라는 주장이 

온 세상을 횡행하는 주 가치가 되어가며

'올바른 정체성'... 

'진리'를 헷갈리게 하는

정말 어리석은 시대에 달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ㄷ통ㄹ'이 '자기 백성'을 향하여 총칼을 휘두르는

전대미문의 결과를 보여지고 있습니다. 

 

유사이래 처음이고 

한번도 있지 않았던 현상이라고

외신이 놀라고 있습니다. 

 

그러함... 

시대의 마지막 현상이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을 알지도 모르지만 하나님과 관계없이

철저히 '이세벨' 같은 ㅇ내의 입을 들어

가스라이팅하는 사단에 마음을 빼앗긴 결과로 

저런 극단적 상황이 벌어져 버린 거라 보여집니다. 

그 이외 어떠한 설명이 가능하겠습니까? ㅠ.ㅠ

 

 

정말.. 이제 

세상은 마지막 전조증상을 보입니다 .

정신차려야 겠습니다. 

하나님을 인식하고 사는 자들.. 

더욱 깊이 

더욱 매일

더욱 항상

주님을 인식하고 사는 자로서 

세상을 살지 않고는 

쉬이 넘어질 거 분명한 듯합니다. 

 

주여.

부디 제가 누군지.. 

왜 이시대의 어려움이 

개인적 어려움이 벌여지고 있는 지

하나님 뜻 가운데서 돌아보고

어서어서 돌이키는 회개의 삶이 되어야 겠습니다. 

 

더 주님 앞으로 다가가야 겠습니다. 

 

주여.

부디.. 

저 

어려운 인생의 성장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

 

그나마 옳게 서 있는 지금까지 

절 붙들고 끝없으신 긍휼의 사랑으로 붙들어 주신 하나님.

주님의 그 크신 실재를 잊지 않게 하소서.

내 올바른 정체.. 

하나님 안에서 허락되어진

이 인생 시나리오에서

하나님을 기뻐하시게 하는 '내 삶의 주인공'으로서

오늘도 또 

최선을 다해 살게 하소서.

 

주여

나머지.. 

그 시나리오 중 아직 잔존한 어려움들... 

주님께서는 다 아시오니

조금 더 가볍게 하셔주소서.

감사하며 

간절히 비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님께 영광올리는 기도합니다. 

아멘

 

 

 

--- 벧엘과 길갈에 대하여

벧엘과 길갈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신앙 전통에서 중요한 장소로, 각각 독특한 영적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선지서(특히 아모스서와 호세아서)에서는 이들 장소가 타락한 종교적 중심지로 비판받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두 장소의 영적 의미를 균형 있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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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벧엘의 영적 의미

**벧엘(베텔, Bethel)**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집"을 의미하며, 성경에서 여러 중요한 사건과 연결됩니다.

긍정적 의미

1.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에서를 피해 도망가던 중 벧엘에서 꿈속에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는 사다리를 통해 하늘과 땅이 연결된 환상을 보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받습니다(창 28:10-22).

벧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의 장소로,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특별한 공간으로 인식되었습니다.



2. 예배와 헌신의 장소

야곱은 벧엘에서 돌기둥을 세우고 그것을 기름 부어 하나님께 헌신의 서원을 합니다.

이는 벧엘이 하나님의 임재와 예배를 상징하는 장소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줍니다.




부정적 의미

1. 타락한 종교의 중심지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1세는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려 했습니다(열왕기상 12:28-29).

이로 인해 벧엘은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되었고, 선지자들은 이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호세아 10:5-8, 아모스 3:14).

아모스 5:5에서는 "벧엘을 찾지 말라"고 경고하며, 형식적이고 타락한 예배 행위를 거부하십니다.



2. "벧 아웬(악의 집)"

호세아서는 벧엘을 조롱하여 "벧 아웬(집 아웬, 악의 집)"이라고 부릅니다(호 4:15). 이는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본래 의미를 상실하고, 우상숭배와 부패로 변질된 상태를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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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길갈의 영적 의미

**길갈(Gilgal)**은 "돌무더기" 또는 "굴러가다"라는 뜻을 가지며, 여호수아 시대에 중요한 사건들과 연결됩니다.

긍정적 의미

1.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와 새로운 시작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넌 후, 길갈에 12개의 돌을 세우며 하나님의 기적을 기념했습니다(수 4:19-20).

이곳에서 이스라엘 남자들이 할례를 받고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했으며, 여호와의 구원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수 5:2-9).

"길갈"이라는 이름은 "수치가 굴러갔다"는 의미를 담아, 애굽에서의 노예 상태가 끝났음을 상징합니다.

2. 하나님의 임재와 예배의 장소

길갈은 가나안 정복 초기에 중요한 군사적, 종교적 중심지로 사용되었으며, 여호수아와 백성이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며 머물렀던 장소입니다.



부정적 의미

1. 타락한 예배와 형식주의

아모스와 호세아 선지자는 길갈이 형식적이고 부패한 예배의 상징으로 변질되었음을 지적합니다(호 4:15, 9:15, 아모스 4:4).

하나님께서는 길갈에서 드려지는 제사를 거부하시며, 그들의 제사가 죄를 더할 뿐이라고 책망하십니다.

2. 심판의 상징

길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거부하시고 심판을 내리시는 장소로 묘사됩니다. 호세아 9:15에서는 "길갈에서 내가 그들을 미워하였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죄악과 반역을 책망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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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벧엘과 길갈의 공통적 교훈

1.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우선

벧엘과 길갈 모두 하나님과의 만남과 예배의 장소였으나, 형식적이고 외적인 종교 행위에 치우치면서 본래의 영적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참된 예배는 단순히 장소나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와 삶의 정의와 공의 실천에 있습니다(아모스 5:24).

2.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경외

하나님은 장소보다 그곳에서 드려지는 예배자의 마음을 보십니다. 벧엘과 길갈은 각각 변질된 종교의 예로 사용되며,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중심이 아닌 형식에 치우칠 때 동일한 위험에 처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3. 변질된 영적 중심지의 경고

과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던 장소도 잘못된 예배와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교회와 예배도 동일한 경각심을 가져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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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벧엘과 길갈은 각각 하나님의 임재와 언약, 새로운 시작의 상징이었으나, 잘못된 예배와 부패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장소로 변질되었습니다. 이들 장소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참된 예배와 순종, 그리고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

 

 

 

--- 수은제(酬恩祭)에 대하여

수은제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드리는 제사로, 일반적으로 화목제(平和祭)의 일부로 이해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드린 제사입니다. 화목제는 제물의 일부가 하나님께 불로 태워 드려지고, 나머지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과 제사장이 함께 나누어 먹는 특징이 있습니다(레위기 3장 참조). 이는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 간의 화목과 감사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수은제는 단순한 의식적 감사가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구체적인 은혜를 인정하고 응답하는 자발적 감사의 제사로 드렸습니다. 이는 개인의 신앙 고백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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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룩과 제사

성경에서 **누룩(발효균)**은 주로 부정함이나 죄를 상징합니다. 이 때문에 번제나 속죄제와 같은 속성상 순결과 온전함을 요구하는 제사에서는 누룩을 포함한 제물을 금지했습니다(레위기 2:11). 그러나 화목제와 같이 감사와 기쁨을 나타내는 제사에서는 예외적으로 누룩을 사용한 떡도 허용되었습니다(레위기 7:13). 이는 모든 제사가 동일한 기준으로 운영된 것이 아니라, 제사의 목적과 성격에 따라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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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서의 관점: 제사의 본질에 대한 비판

아모스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본질적 의미를 강조하며, 단순히 형식적이고 외적인 제사 행위에 매몰된 이스라엘 백성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1. 형식주의적 제사 비판

아모스 5:21-24에서 하나님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며 멸시한다"고 말씀하시며, 단순히 제사를 드리는 행위 자체에 만족하는 태도를 책망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 그 자체가 아니라, **정의(미쉬파트)**와 **공의(체다카)**가 강물처럼 흐르는 삶입니다.

2. 누룩을 넣은 제물의 의미

아모스서의 논지에서 중요한 것은 누룩이 들어갔는지 여부가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자의 마음과 삶의 태도입니다.

누룩이 포함된 제물을 드렸더라도 그 마음이 진실하지 않다면, 하나님께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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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룩을 넣은 제물을 불사르는 것이 옳은가?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누룩을 넣은 제물을 불사르는 것은 제사의 목적과 맥락에 따라 다릅니다.

속죄제나 번제에서는 부적절합니다.

그러나 화목제에서는 감사와 기쁨의 상징으로 허용될 수 있습니다.

아모스서의 교훈에 비추어 보면, 제물의 형태보다는 드리는 자의 태도와 삶의 의로움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단순히 형식적 규정을 지킨 제사는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정의와 공의를 무시하는 위선적 행위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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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수은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제사로, 누룩을 넣은 제물도 특정한 경우 허용될 수 있지만, 핵심은 제사를 드리는 자의 마음과 삶입니다. 아모스서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형식이 아니라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삶임을 강하게 강조합니다. 따라서 누룩의 사용 여부를 넘어,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살아가며 예배하는지가 더욱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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