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꽃같던 그녀가(창30:1-24) 본문
제 30 장 ( Chapter 30, Genesis )
1.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 하나님을 잠시라도 떠나면 우리의 본성은 금새 드러납니다. ^^;;;)
앙칼지기도..
얼마나 삶이 고달 팠으면 그러할까 불쌍하기도 하지만
주님을 보고 더 인내 했더라면 어땠을까?
성경의 창세기가 재미가 없어지겠지만
그녀 라헬의 생이 훨씬 편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2.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
을 대신하겠느냐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들먹임은 그의 믿음의 깊음을 보이는 발언은 아니다.
우리도 부부싸움할 때
'내가 하나님이냐?' 라고 소리지르며 싸우는 경우가 없지 않아 있을 것 같은
그런 발언의 소지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의 소리는 몇가지 점에서 생각할 바가 있다.
우선 그는 성정이 교활하기는 하지만
믿음은 가슴 깊숙한 곳에 뿌리 박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추후 그의 인생을 하나님이 결국 이끌어 가실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 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임을 또 암시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하지 않고
사람의 방법대로 난 자식들의 이름은 '단', '납달리', '아셀' 등의 아들과 '딸' 등
열두 지파에는 속하거나 속하지 못하는 딸이다.
반대로 레아에게서 난 '레위', '르우벤', '유다'나
22.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
24.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
보라 !
결국 하나님이
라헬에게서 결국 낳게 될 '요셉' 등은 창세기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아들이다.
그렇다면
처음에 나오는 인간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의 차이가 이를 극명히 증명하는 것이다.
오늘의 묵상의 내용은
'주님 뜻대로' 따르는 삶에 대하여다.
주님 뜻대로 사는 삶은
기다려야 함을 전제로 한다.
( 주님을 떠난 편협한 생각은 사람을 변하게 합니다. )
라헬을 보라 .
얼마나 많이 기다리는 가?
기다리다 못해 꽃처럼 아름답던 그녀가 표독스럽기가 장희빈 같게 변하지 않던가?
이제는 성질을 못이겨 자기 시녀를 남편에게 보내고
합환채라는 고대 비아그라까지 탐내며 戀敵인 레아에게 타협까지 불사하게 되는가?
이것은 인간의 취약함을 보이는 것이며
하나님을 알고 뜻대로 기다리는 것이 얼마만큼의 인내가 필요한 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다.
반면 소위 합리적이라고 말하고 세상적인 방법은
즉각적으로 결과를 볼 수 있기에 현대인에게 적합한 방법이다.
그러나 반드시 갈등을 초래하고
그 결과물은 그리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한마디로 말하면 받으면 반드시 치루어야 하는 댓가가 있다.
물론 , 그 결과물 조차 하나님이 쓰신다.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으로 쓰시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하나님에게 조르는 것은 야곱에게 따지는 아내 라헬과 큰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다.
주님께 집중하며 기다려야 한다.
지치지 않도록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
주님의 선하신 뜻에 맞추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
그 뜻에 맞추는 결과가 기쁨임을 알아야 한다.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서 기다리는 것.
말은 쉽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리 뜻대로 살고 있는 가?
실은 자기의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뚜렷이 알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지 알아야 그게 기다리는 여유가 생기지 않겠는가?
Calling과 calling.
소명과 부업.
비젼 등의 내용으로 생각해야될 인생의 목표.
그 목표가 하나님의 뜻과 맞는 경우가 힘이 있는 삶이 될 것이고 그것이야 말로 언제까지라도 주님의 인도하시는 대로 기다리는 삶의 전제가 되지 않을까?
내려 놓기 위해서는 내려놓지 않고 내려놓고를 확실히 아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개인 마다 너무나 다를 것이다.
자신의 인격이 하나님의 성품과 너무도 닮아가 주님 부르실 그날에 장성한 겨자나무 같은 자가 되거나
이기는 자가 되거나 순교자가 될 목표를 가진 것도 그 한 목표가 될수도 있다.
이 땅의 삶에서 그러한 자는 '무소유'와 '주님의 청빈함'을 닮음이 목표가 될 수도 있다.
어떤 자는 '선교'의 비전으로
어떤 자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위해 구제로
어떤 자는 불쌍한 자들을 위하여 '위안'을
각처에서 어디에서든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를 아는 향기'를 내는 것이 궁극적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이 될 것이다.
야곱은 아직 소리를 지르는 바 '내가 하나님이냐 !'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깊이 모르는 자이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지만
아직 하나님이 그에 주시는 소명을 모른다.
그가 만일 그 소명을 알았다면 이 라반 근처에서 어리석은 삶은 더 짧아 졌을 것이고
그 아내들의 성화에 좀더 덜 얼이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누가 야곱의 혼란을 경험하지 않고
라헬의 표독을 거치지 않고
레아의 왕따 심정을 거치지 않고
시녀의 맘대로 쓸려 다니며 나이든 노인의 후처 노릇을 하는 것 같은 억울함을 거치지 않고 삶을 영위해갈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나도 이 땅에서 혼란스럽고 왕따의 외로움을 오랫동안 괴로워 했었고 억울한 마음으로 분노의 삶을 살아왔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제 야곱이 하나하나 깨우쳐 가듯이
하나님의 내 삶 속에 영위하심을 느끼고
그분의 임재를 서서히 이 세상의 삶에서 펼쳐가려고 무진 노력을 하고 있다.
이제 시간이 지나고
내가 좀더 그 분을 겸허히 서려고 노력하면
그 분은 내 삶을 좀더 힘있고 거침없는 그것으로 바꾸어 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다.
다니엘 서10:12에서 "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주하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 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하신 그 말씀이 가슴에 온다.
내가 주님 앞에서 깨달으려 결심한 그때가 난 분명히 있다.
오랜 시간의 큐티를 함께하고 세상의 것을 잠시 뒤로 물렸던 바로 그 때가 나에게 겸비하였다고 칭찬한 그때 인 듯 싶다.
내 말로 인하여 오신다는 그 말을 매일 같이 체험하고 사는 그 날이 빨리 왔으면 한다.
적용
1. 오래 참겠다.
2. Calling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3. 가족을 위해 기도하겠다 .
기도
하나님.
귀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늘 주님을 촛점을 맞추고 살 수 있기를 원합니다.
도우소서.
오늘은 너무 분주했습니다.
집중도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뜻에 따라 기다릴 수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막연한 세상의 것 보다는
주님의 뜻대로 위엣 것에 온전히 가슴 떨려하는 소명의 삶이 새롭게 저에게 찾아오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라헬이
야곱이 기다리다 흔들리는 그 약함의 인내가 아니고
기쁨으로 한없이 주님을 기다릴 수 있는 그런 때가 오기를 소원합니다.
예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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