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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아의 裸身, 그리고 視線(창29:21-35)

주하인 2007. 5. 10. 08:24

 

  제 29 장 ( Chapter 29, Genesis ) 
  
25.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께 봉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이까
26.  라반이 가로되 형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30.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고 다시 칠년을 라반에게 봉사

      하였더라 
31.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  
32.
  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

      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  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 하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34.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레위라   
35.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가

      그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생산이 멈추었더라

 

( 라헬과 레아도 이랬을까? )

 

 

 야곱이 잠깨어 일어나 보니 안력이 부족한 레아가 이쁜 라헬 대신 누워 있으니

얼마나 충격이겠는가?

아마도 그는 옷도 제대로 추스려 입지 못하고 우당탕탕 외삼촌에게 찾아가서 따졌을 것이다.

라반은 아마도 현대의 드라마에서 보는 닳고 닳은 중년 남자의 느끼한 웃음을 머쓱하게 지으며 야곱에게 라헬을 먼저 보내지 못하는 이야기를 하고 다른 조건을 걸었을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며 나뿐 아니라 대부분 주인공인 야곱의 농락 당함에 대하여 불쾌해 하고 화가 나기도 했었을 것만 같다.

그러면서 그를 중심으로 한 주님의 역사하심에 대하여 묵상을 하면서 야곱의 인간적 결핍성,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귀히 쓰이는 가문의 중심 축으로써 그가 선택 받을 수 밖에 없는 장점이 무엇인가, 그렇다면 그걸 내 일상에서 어떻게 적용시킬까 등이 주 관심이었을 것이다.

 

 

  오늘 아침은 현대의 통속 드라마 같은 구도와 인물설정과 그들의 갈등 탓에 묵상이 힘들었지만 31절에 여호와께서 레아를 보신다는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들의 作名에 그녀의 심사가 그대로 담겨 있음이 눈치 채여졌다.

르우벤은 '남편의 사랑'을 간구하면서도 그러지 못할 좌절을 하나님께 의뢰하는 여인의 아픔을

시므온은 라헬에 비하여  나은 점을 통하여 스스로 위안 받음을

레위는 한발 더 나아간 남편에 대한 기대를

유다는 여호와를 찬송할 의지적 여유의 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출근 버스안의  짧은 묵상으로는 더 진행하기 어려웠다.

 

 세미나실에 앉아서 묵상하고 있으려니

오늘은 목요일

외래 간호사들의 큐티 참여가 많다.

특별히 힘이 나는 시간이다.

인도하는 분이

레아에 대한 묵상을 이야기 하며 

레아의 여성으로 감당치 못할 아픔에 대한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고 하면서 눈시울을 적신다.

가슴이 아프다. 

주시려는 말씀이 분명했다.

나도 출근 버스 안의 내용이 그런게 아닌가?

여성,  '소외 받은 자'의 아픔과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번뜩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25절에 우리의 야곱이 잠에서 깨일 때 레아는 어떤 상태였을까?

입벌리고 나체로 자고 있었을까?

안력이 부족한 여자니 지혜도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었을까?

이게 일반적으로 누구도 생각을 하지 않지만 그녀는 멍청하니 야곱이 하는 대로 아무 생각도 없는 로보트 같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혹 아녔을까?

그러나 실제로 그럴까?

위에서 이름을 짓는 구절을 보았지만 그녀는 나름대로 깊은 상심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다.

남편이 될 야곱에 대하여 깊은 戀情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신심이 있는 -깊은 줄은 모르겠다.-여인이다.

절대로 눈이 흐리다고 바보는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아버지인 라반과 모의에 참여하며 어떤 마음을 지니게 되었을까?

아무 생각없었을까?

눈이 흐리다고 속에 흐르는 인간적인 감정은 없었을까?

아마도 회오리치는 상념이 그녀의 가슴 속을 휘몰아 쳤을 것이 분명하다.

 우선은 이렇다.

동생 라헬에 대한 복수심으로 흐뭇하기도 했을 것이며

반면에 미안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야곱의 자신에 향하지 않는 애정이 부담이 되었을 것이며

한편으로 죽고 싶을 만큼 밉기도 하고 좌절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아버지 라반의 말씀이 한편으로 감사하기도 하며 자괴감이 들기도 했을 줄 모르고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서 마음을 정리하기도 했을 것이다.

( 기도하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

 

 

아마도 그 모의에 참석한 그녀는 그날 저녁

자신의 방에 가서 아마도 조용히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예수님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이러한 상황을 어찌 버틸까 이 묵상을 진행하면서

한편으로 불쌍하게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하며

이 레아라는 여인이 가련히 느껴지며

한편 부족하고 불쌍한 것이

주님이 계시면

승리이고 힘이고 기쁨이 될 것이 분명함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묵상에서 조차 소외되어 온 이 가련한 외모의 불쌍한 레아는

위에 추정한 여러 이유로 밤새 잠을 잤을 리가 없다.

야곱과의 첫날 밤을 즐거움 보다는 긴장과 엄습하고 수많은 상념들로 고통스럽게 보내고 나서는 아마도 안경조차 없는 고대의 밤의 어둠 속을 뜬 눈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남편의 얼굴을 최대한 가까이서 숨을 죽이며 쳐다보면서 볼을 꼬집기도, 눈물을 흘리기도, 기도하기도 하며 꼬박 밤을 지샜을 것이다.

 

 불쌍한 女心

 

 이 여인이 아침에 눈을 뜨는 야곱을 보며 뛰는 가슴으로 가까이 쳐다보던 머리를 슬그머니 뒤로 돌려 침상에 누워서 안보는 체 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이 옆에 있어도 라헬이 아닌 그녀를 보며 아마 얼굴이 크게 찌그러 졌을 것이다.

그리고나서는 벌떡 일어나 허겁지겁 옷을 걸쳤을 것이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뛰쳐 나갔을 것이며 그의 머리 속에 레아라는 존재는 지워졌을 것이다.

최소한 그 순간에는 분노와 당혹과 라헬의 그림 만이 있을 것이다.

잊혀진 여인

레아.

 

 아마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레아는 깊은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면서 멍한 모습으로 흘러내리는 이불을 가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의 이쁘지 않은 나신 - 아마도 고대라서 목욕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때도 덕지 덕지 하지 않을까?    냄새도 좀 나구..ㅎ. 관심 끌지 못할 조건은 있다.- 이 들어나는 줄도 모르고

아마도 그녀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 어리석고 잊혀지기 쉬운...

총기마져 부족해 보이는 레아라는 여인의 일생이 안스럽기 그지 없이 다가왔다.

 

그래 난 어땠는가?

세상을 볼 때 나도 그 당시의 야곱처럼 본 경우가 많았다.

내가 판단하기에 어리석기 그지 없어 보이며

거기에다가 교만까지 한 듯한 자를 견디지 못한다.

난...

그들을 의식 속에서 지운 경우가 없지 않아 많음을 깨닫고 가슴이 막힌다.

알게 모르게 그들을 레아 취급하며

난 라반에게 울분을 토할 야곱처럼 당당하게 행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레아는 자신의 향후 행동 거취를 그랬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과거에도 그랬듯이 '운명'으로 받아 들였을 것이다.

가능하면 자신을 가장 낮추고 야곱이 찾아주면 그걸 감사해 하는 마음으로...

그러면서 라헬에게 빼앗기는 남편의 사랑을 가능하면 억눌러서 느끼지 않으려 했을 것이고

그것은 총명치 못해 보이는 그녀를 더욱 더 나른하고 매력없어 보이는, 쉬운 여인으로 보이게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한 그녀의 행태는 늘 그녀로 하여금 함부로 대해 지게 했을 것이고

사람들에게 곁에 있지만 기억되지 못하는 여자로서 스스로를 만들어 갔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있다고

하나님에게도 그럴까?

아니다.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보라.

여호와께서는 '보시고' 계시지 않은가?

라헬은 사람에게 인기가 있지만

레아는 하나님에게 그렇다.

라헬은 오랫동안 자식이 없지만

레아는 계속 안타다.

그것은 그녀의 삶이 도외시 되는 것 같고 약한 것 같고 가난한 것 같지만

실은 풍성한 삶임을 의미한다.

 그녀는 예수님의 계보의 시조인 '유다'를 생산하지 않는가?

그리고는 '찬송하리라"라는 의미로 그의 이름을 짓는다.

그것은 그녀의 삶이 좌절과 고통으로 점철 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전제가 되므로 오히려 찬송할  여지가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난 지금은 많이 없어졌으나 난  야곱을 쳐다보는 레아의 그 고통을 맛보지 않을 까 두려워 하는 마음이 많이 있었다.

부끄러움.

하나님은 하나님이 계셔서 위로하시는 레아의 일생을 통해

오히려 그런 낮은 자의 강함을 기뻐하는 마음을 허락하심이 감사햇다.

 

오늘 눈을 감고 묵상을 하던 중

하나님이 이 레아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해주셨다.

난 레아이기도

레아를 무시하는 야곱이기도 했다.

누구나 겪을 그러한 여러 입장의 변화 속에서

주님을 의식하지 않고는 누구도 이 죄악의 세상에서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가해자가 되기도 하며

알수없는 고통의 삶을 영위해가다가

잔뜩 짐을 짊어지고 사는게 인생이 아닌가 싶다.

그게 비록 기독교 인이어도

이런 레아적이고 비 레아적인 우리 존재의 다변성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지을 수 밖에 없는 숨어 있는 죄와 억울한 일들을 옳게 인식하고

매일 같이 주 안에서 내려놓고 씻김 받는 매일의 산제사를 드리지 않고는

불신자들의 그 고통을 그대로 안고 가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밖에 없음을 느꼈다.

주님이 그 고통을 감내하시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이유는

우리가 감당키 어려운 이전의 죄의 끈질김을 차단 시켜 주심이며

그것은 보혜사 성령으로 인하여

이제 있을 고통을 더욱 쉽게 이겨나가고

새로 생길 자 범죄들로 부터 쉽게 끊어 나갈 힘을 주시기 위함이다.

레아의 눈을 통해 본 오늘의 묵상은 참으로 생각할 바가 많다.

 

 

 

적용

 

1. 함부로 대했던 주위 약한 분들에 대하여 하나하나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회개하겠다.

 

2. 주님 앞에서만 고민을 해결하겠다.

  내 인생의 난점이 레아의 눈이 었음을 명심하겠다.

 

3. 외로움, 낮아짐, 슬픔, 약해짐.... 을 감사하는 하루로 살겠다.

 

4. 전인치유 찬양을 할 때 앉아 있는 수많은 레아들을 위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찬양한다.

 

5. 레아를 통해서도 잊지 않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유다 이름처럼 찬양한다.

 

6.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경 5장 읽겠다.

 

 

 

 

 

 

 

기도

 

  낮아지는 자에게 향하시는 주님의 원리를 오늘 도 보고 있습니다.

 내가 레아 같은 자를 얼마나 만들어 오고 얼마나 많이 야곱처럼 무시하고 있었는지 회개하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내가 또한 스스로 레아처럼 고달픈 삶을 엮어 가고 있을 때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러함에도 끊임없이 부족한 이 지체에 더 아름다운 것으로 씌워 주듯이

부족하고

아니

그보다 더 부족하다고 결핍의 감정을 느끼고 살던 저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지켜보시고 안스러워 하시는 눈을 느끼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늘 주여.

당신의 뜻이 아닌 것이 있을 수 없음을 알았고

 주여

당신을 의지하면 모든 것이 강함으로 바뀜을 또 깨달았습니다.

주여

레아 같이 여겼던 자들을 하나하나 회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소서 .

그들을 중보할 수 있는 긍휼을 허락하소서.

특별히 오늘 전인치유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주님.

혹여 감정적으로 경제적으로 소외 받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어 찬양으로 위로 할 수 있도록 지켜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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