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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QT

기뻐되는 인내의 믿음(약1:1-11)

주하인 2012. 4. 20. 11:31

(약1:1-11)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열두 지파,  모든 믿는 자 들에게 말하신다. 

나 같은 리더급 (^^;), 제자급 신앙인이 아닌 자- 물론 , 현재.. 지만 ^^*- 들에게 까지

말한다.

 

특별히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

야고보서는

'행위' 쪽이 많이 중시되는 편이다.

그래서 '흑'아니면 '백' 의 비교적 명백한 것을 좋아하는 성향을 가진

나에게는 '인내' , '시련'.......등의 단어에는

바리새파냐 방종파냐....의 결정을 요구하는 것 처럼 들려

그냥 천천히........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나에 맞추어.....라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게... 그리 틀린 생각은 아니셨던지

나에 맞는 하나님과의 동행 방법이었던지

주님은 많이 인내하시며

나에게 내적인 튼실함을 기를 기회를 허락하실

지금까지의 시간을

허락하셨던 같다.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제 조금 강한 이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여러가지 시험'이라 하신다.

시험.....

참 많이도 건너왔다.

예산.....무의촌.... 개원.....불면.....사고...............................

아이구.....

그런데 '그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시는

이 말씀이 그때는 얼마나 어렵고 나는 가능치 못할 일로 생각되던지..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시는 말씀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성령이 인도하시면

가능치 못할일이 가능하게 되고

그것은 '내 내면'의 단순한 결심으로 인하여 출발되고

그 출발은 성령으로 인하여

놀랍게 평강으로 변해지는 것을 체험함이 쌓임으로

이제는 좀 더 적극적으로

시험을 당하는 것을 기뻐하고

시험이 성장의 가능성임을 인정할

마음의 여지 (버퍼)가 생겼음을

나 스스로 깨닫고 있다.

 

이제 '시련아 와라' 할 때가 멀지 않았다.

'그래 시련아 오거라

 내가 기뻐할 게다'  할때가 멀지 않았음이 느껴진다.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이유는 알았다.

알았지만 시련이 닥치면 전혀 기억을 못했음이 문제였고

조금더 지나서는 기억을 했어도

많은 논리적 단계를 거쳐서

마음에 이해를 심어 주어서 그랬지만...

이제는 다른 것을 좀 느낀다.

시련이 오면 그것을 가지고 '주님 십자가 '앞에 가져가는 습관이 되었다.

그리고는 꽤 많은 승리를 '미리 ' 얻곤 한다.

 

그렇다.

그런의미를 보아도

'시련'이 '믿음'을 증가시키는 도구임을

마음 한구석에 정착화되어가고 있다.

모두 '성령'님의 도우심 탓임을 인정한다.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제 '믿음을 위한 인내'가 얻어지기에 기뻐해야 함도

자동적으로 깨달았으면 좋겠다.

온전히 '인내'를 이룸이 그것이다.

그게 부족함 없는 '믿음'이다.

시련을 통한 인내를 얻음.

단순한 무직함이 아닌

주님을 위한 인내를 이룸을 아는 믿음.

 

 시련을 통한 주님 십자가에 동참함이

영혼 깊숙이 느껴지는 자동적 현상으로 나타나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지는 내가 되는 것.

그것이 온전하고 부족함 없는 '믿음'의 연단이다.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믿음으로 '구하라' 하신다.

그렇다.

지금까지의 성장한 자로서

당연히도 '시련'이오면

그것이 영혼으로 '자동적'으로 기뻐할 연단으로 바뀜은

전혀 우리의 의지력과는 상관없다.

그것은 그렇게 될 시간이 되어

그렇게 인도받을 자격이 되어 그리되는 것이고

인내 마져도 '주님이 주실 것임을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야고보서는 단순한 '행위 우선주의'의 장이 아니다.

그것은 '믿음'의 수준에 이른 자들이

믿음으로 인하여

기쁘게 인내하여 '믿음의 인내'를 자동적으로 영혼에 뿌리박게 된

'연단의 경지'의 믿음이다.

성화의 높은 경지를 말한다.

 

그것은 열두 지파 모두,

나 같은 낮은 믿음의 기독교인들까지 모두가 추구해야 할

궁극의 방향인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올 때

초짜의 낮고 천박한 영혼 그대로 들어오길 기뻐하지 않으신다.

기뻐하는 자식이지만

그 자식도 성장을 해야 기쁘다 .

주님은 오늘 나에게

기쁘게 인내하길 원하신다.

 

 

 

 내 주님.

지난 당직 ..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침 부터 너무 바쁩니다.

그래도 잘 마무리 되게 해 주심 감사합니다.

기쁨으로 중간에 이렇게라도

급히 묵상을 하게 해주심

더 감사합니다.

어쩌면 예전에는 이게 굉장한 인내가 필요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듭니다.

하지만 지금은 기쁨을 누리며 쉽ㄱ게 합니다.

그게 감사합니다.

주님.

주님의 인내.

주님이 원하시는 나의 영혼에 대한 인내의 말씀은

어쩌면 기뻐하면서 주님을 느끼면서 나가는 동안

나도 모르게 이루어지는 인내의 자동적 성장을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늘 거기에는 '기쁨'도 따름을 깨닫습니다.

다시한번..

감사합니다.

오늘도 잊지 않고

더 자동적으로 인내를 기뻐하게 하소서.

더욱 그리하소서.

부덕한 일을 보아도 기뻐하면서 참게 하소서.

내 영혼이 손해를 보면

모두 편해질 때

그리 자동적으로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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