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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 확신된다면(눅24:13-35)

주하인 2012. 4. 9. 08:52

(눅24:13-35)

 

바라옵기는

우리 가족 모두

주님의 부활을 확실히 체험하여

인생의 모든 것으로

찬양드리는

삶을  살게 하소서

 

 


15.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셨어'도

우리와 동행하심에도

우리는 어쩌면 '서로 이야기'하고 '문의'하느라

즉, 세상 일에만 집중하느라 눈이 가리어져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을까?

특별히,

오늘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다음날'이다.

주님의 부활하심을 기쁨으로 맞이해야 한다.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글로바와 친구 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것을 믿지는 못했다.

 날씨는 좋고

아마도 종달새 높이 날며 지저귀는 상쾌한 아침 길이었을 텐데도

그들은 아직도 마음이 슬펐다.

 

부활을 알면서도 믿지 못하는 자.

날이 밝아도 마음은 흐릴 수 있다.

그러나, 그래도 주님은

사모하는 자에게 다가오신다.

 

 


27.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그리고  사랑하는 자들에게

자세히 알려주시기도 하신다.

하필이면 12제자에게보다 먼저 글로바 등에게 오셨을까?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것 만은 알 수 있다.

 

 

28.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더 가려고 하시는 예수님이시만

청하고 간구하면 더 머무신다.

 

부활절,

불신자의 시절에도

교회 근처 지나가다

서울에서 일년 다니다가 천안북일 고등학교로 내려가기 전의

바로 그 고등학교가 미션 스쿨의 이유로

'부활절 달걀'을 먹어본 수없는 많은 시간을 제외하고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벌써 13년 째 맞는 부활절이다.

 부활절이 달걀 먹는 행사에 지나지 않던 나에게

'부활'이란 단어가 심상치 않음을 이해하게 되기 시작한 것은

수년.......

그러면서 점차로 부활이 주시는 그 의미가

죽음이 더 이상 우리에게 힘을 미치지 못함을 의미한 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조금씩 가슴에 부활의 의미가 내려오고 있다.

 

 어제  목사님이 말씀하신다.

"3년간 철저히도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그 분의 인품, 그분의 사랑,

그분의 교훈을 체험한 '제자'들임에도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순간적으로 배반하고

모두 다시 옛 생활, 어부로 돌아간 것을

갸롯 유다 한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확히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게 하고

한명도 빠짐없이 , 심지어는 새로 뽑힌 맛디아 사도 마져

모두 순교하게 한 사실은

'부활'을 경험한 탓이다....

죽음은 더 이상 그들의 문제나 관심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라 명쾌히 설명하셨다.

맞지 않은가?

지난해에도 '부활'에 대하여 알고 예배를 드렸다.

성찬식도 드렸다.

그 이야기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올해는 새롭게 다가온다.

 

이제 죽음이 더 이상 '나',

살아있는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자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

 

 나.

자주 '죽고 싶었던 자'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생각해오던 자.

그런데 어쩌면 그것을 그리 생각하게 하는 것은

모든 두려움이 죽음에서 근원하는 것임을 알고

너무 큰 두려움을 의도적으로 마비시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의 모든 행동 동기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한다.

태어나면서 부터 죽어가는 유한한 인간들이기에

기를 쓰고 후대를 잘길러 자기의 유전자를 보존하려 하고

늙으면 죽음에 가까움을 현실로서 인식하는 것이기에

늙어보이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젊어지려 하는 것이다.

세상을 보면, 미쳐가는 것 같다.

절대로 죽음을 이야기 하지 않으려 하고

장수가 모든 사람의 궁극적 목표인양 그리 살고 있다.

그러나, 결국은 마주 해야할 '죽음' .

 

예수님을 영접하고

참 편안해졌다.

난, 천국을 보장 받은 자이기에

이전에 죽음에 대하여 '저항성' 마비에서

그냥 조금씩 받아 들일 수 있는 단계로 변해갔다.

그러나 ,부활이 주시는 진실은

이땅에서도 '천국'을 누림이다.

죽음이 더 이상 우리를 흔들 수 없음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한참 머리를 굴려야 '부활'이 믿겨진다.

 

그것은 마치 글로바 근처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카리스마'를 가지시고 근처에 이르셨음에도

깨어서 깨닫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막연히 그들은 뜨거워짐을 느낌에도 인식하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예수님이 함께 동행하셨음을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다.

 

이제 오늘 나에게 바라시는 말씀은

더 깊이 예수님의 부활을 느껴보라시는 것 같다.

그래서 '내 일상'에서 부활하신 하나님이

어떠한 의미이신 지 체험해 보라신다.

 

나.

자주 넘어진다.

그러면서도 일어나는 힘이 점점 세어짐을 느낀다.

그리고 짧아진다.

그것은 '부활'이다.

매일 죽음에서 매일 부활함이다.

예수님을 알면서 일어남을 배웠다.

일어남의 의미,

일어나야 하는 이유를 알고

일어나는 힘을 느꼈다.

도우시는 힘을 느꼈다.

이제 자동이 되어야 한다.

오늘 더욱 가까이 이르신 예수님의 동행을 체험하자.

 

 

 

적용

 

1. 부활하신 예수님을 느끼자.

 어쩌면 그 분은 익숙한 주위의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다.

 매일 부활

 

2. 날이 밝고 쾌청하다.

 그날도 그랬으리라.

 부활하신 주님의 날 같은 밝은 날을 감사하자

 

3.  더욱 가까우신 예수님을 자동적으로 깨닫길 기도하자.

 

4. 죄로 넘어지지 않도록 기도하고

 넘어져도 얼른 부활하는 회복을 기대하자.

 남을 위하여 인내하고

 나를 받아 들이자.

 

5. 성경 세장 읽겠다.

 

6. 예수님의 삶을 보면 '고난'과 '부활 ', 승천'이다.

  내 삶에 허락된 모든 '좌절'과 '힘듦'과 '고난'은

내 자아의 죽음을 통하여

새로 부활하는 '천국인의 성질'을 가지게 하심이다.

 '겸손', '온유'....... 이러한 천국시민의 성품을 회복하기 위해

 이땅의 갖은 어려움을 당하고

 그로 인하여 이제 곧 있을 '천국'의 삶을 영원히 편하게 누리게 된다면

 이땅의 어려움은

 그나름의 가치가 있지 않은가?

 부활하신 하나님을 믿으니 모든게 희망이다.

 

 

기도

 

주님.

집중이 잘 안되었습니다.

주님이 주시려는 말씀은 이해가 되었지만

한 가지로 물흐르듯이 정리가 안된 느낌입니다.

자주 환우 분으로 끊긴 이유도 있지만

아직 '부활'의 그 명쾌한 승리가

제 영혼에 물흐르듯 흘러 들어옴이 느껴져야 마땅하지만

이토록 자꾸 끊기는 듯하고

의지적으로 해석해야 느껴지는 것은

글로바등과 같이 아직 깨어서

부활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저도 그런 듯 합니다.

주여.

간절히 소원할 것은

주님의 부활을 더 확실히 확신 케 하소서.

제 영혼에 늘 함께 하시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아직 제 안에 남아 있는 진득한 자아의 오류들이

주님의 보혈로 사라지게 하시고

제 인생이 주님의 부활로  더욱 힘있어 지게 하소서.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

부활로 인하여 더욱 확신하게 하소서.

머리 속의 논리적 근거가 아니고

영혼이 그리되게 하소서.

모든 버거움, 다 가져가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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