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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송아지 변소에 버리기(왕하10:25-3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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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송아지 변소에 버리기(왕하10:25-36)

주하인 2006. 10. 23. 09:17

(열왕기하10:25-10:36) 

27 바알의 목상을 헐며 바알의 당을 훼파하여 변소를 만들었더니

 

 

 통쾌하다.

바알 당을 깨부수고 변소를 만들다니..

변소 , 즉 latrine 은 영어 사전에 보면 공사장에 땅을 파서 만든 간이 화장실을 의미한다.

 예후라는 인물은 굉장히 시원시원하다.

기름부음 받자마자...

 

29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이 '금송아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출애굽하고 나서

( 예후가 기름 부음 받은 오늘 묵상시점까지 열정적으로 행하는 것 처럼

  우리가 예수님 영접하고 성령으로 충만해 있었던 그 시절이 어느정도 지나서)

홍해통과하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10계명을 받고 있는 사이에

아론을 필두로 한 지도계층의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만드는 사건을 생각 나게한다.

 

 과연 '금송아지'의 정체는 무엇인가?

한걸음 떨어져 성경을 읽는 객관적 입장으로 보아서

저것은 분명히 죄임을 알고

어리석은 것이 저들임을 너무도 당연히 알지만

과연 성경 속의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이나

예후와 같은 입장에 들어가서

그들의 그 당시의 문화와 생활 속에 이입(移入)되어서도 그리 쉽게 금송아지가 죄임이 느껴지지 않을 수가 있다.

 마치 내 삶이 잘 사는 것 같고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 같지만

왠지 모를 이유로 그리 주님 앞에 신실하지 못할 것 같은 것과 비슷한 이치로..

 

30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 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참으로 희한한 내용.

금송아지가 큰 죄인데...

정직한 일을 잘 행하였고, 주님 뜻대로 준행했다고 칭찬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주님께서 사람의 속을 모르신단 말인가?

알고도 묵인하실 다른 이유가 있는가?

아니면 죄가 아닌가?

 

 예후는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이다.

어린이의 믿음 중에 솔직하고 담백하고 순종적인 믿음이다.

그리고 금송아지 죄는 어린이로서 어느 정도 용인 될 수 밖에 없는 죄란 의미가 아닌가 싶다.

똥칠을 해도 아기 때는 그리 미워 보이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커서도 똥칠을 하면 그건 '치매'나 '정신병'과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후는 이제 겨우 한번의 기름 부음으로 하나님의 선택 안에 들어와 있는 어린 아이 같은 신앙이다.

그런 자가 '바알의 죄' 를 벗기 위해 몸부림을 친 것은 기특한 일이다.

아직 금송아지의 죄를 이해하기도 그에게는 벅찬 상태일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은 그에 맞게 대접을 하여

칭찬도 하시고 복도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죄에는 등급이 있고

성장에 따라 벗어나야 할 죄가 달라진 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마치 마음 속으로 음란한 생각을 하고 회개하는 현상은 사춘기 이전의 아이에게는 별로 중치 않은 현상인 것과 비슷한 이치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을 믿고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고 또, 성장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벗어나야 할 죄가 달라진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난 어떠한 입장에 와 있는가?

 아이인가?

어른인가?

사춘기의 믿음인가?

 

그렇다면 내가 벗어내야할 금송아지 죄는 무엇인가?

 아침 묵상구절 아래에   신앙을 무력화하는 요인은 핍박이나 위협보다는 오히려 문화와의 타협에 있다.

(- 토니 캠폴로  )고 씌여 있는 글이 의미심장하다.

 문화라는 이름 하에 들어오면 , 다수의 선호...라는 형식으로 들어오면 흔들린다.

그게 진실인 듯 싶다.

그런데 자꾸만 우리의 믿음은 힘을 잃어간다.

아침에 나도 모르게 일찍 일어나서 잠시지만 묵상하며 만나던 그 기쁨이 어느덧 서서히 잊혀져 간다.

깜짝 놀라 눈을 감고 주님을 찾지만 어느샌가 그 기쁜 은혜의 기억은 가물거리기만 한다.

 그게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한 주님의 의도적 메마름인지

아니면 정말 금송아지를 용인한 내 잘못 탓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확실히 이전과는 다르게 주님과 만나던 시간이 줄어들고

아침에 거의 안빠지던 큐티를 자주 빼먹고

주님을 찬양하며 기도하며 느껴지던 그 눈물의 감동이

습관처럼 변해가는 것 같은 생각이 조금씩 드는 걸 보니 어쩌면 내 속에도 알게 모르게 금송아지가 들어와 있는 것 같다.

 금송아지가 나에겐 어떤 것인가?

과연 무엇인가?

주님 안에서 주님의 은혜를 받은 이후의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나에겐 바알의 당을 변소로 만드는 일에서만 정지하여 있지 말고

금송아지 죄가 무엇인지 깨닫고 알아내야 만한다.

 

 무엇이 금송아진가?

 

 

 

32 이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이스라엘을 찢으시매( reduce the size of Israel)

 예후에게 축복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영토를 낮추신다.

 

 바알 죄를 없앤 상으로 4대의 축복을 하셨지만

더 성장하며 성화되지 못한 이유로 그 주위를 약화시키셨다.

 

 

묵상

 

1. 난 어떤 상태인가?

 

2. 나는 과연 내 모난 품성을 변소로 만들어 놓았는가?

 엊저녁 또 바알의 성품이 나오려 했다.

다행이 잘 건넜지만 아직도 먼 길을 더 걸어야 할 것만 같다.

마침 주님은 예후를 통하여 며칠간 느끼도록 만들어 주시고 오늘 아침 특별히 또 개인적 묵상을 허락하신다.

 '변소로 만들어야지~ ? "

 

3. 나의 금송아지는 무엇인가?

 자꾸만 느끼는 거지만

난 나의 달란트에 너무 많이 의지하는 것 같다.

내 취향에 맞지 않으면 나도모르게  저항을 하는 것 같다.

그러면서 내 시간에 맞게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허락을 한다.

내 편만 용인한다.

 주님은 순종을 좋아하시는데...

참 버리기 어렵다.

내 안의 저항이 꽤 있다.

 

3. 금송아지를 버려야 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

 

 

 

기도

 

주님

아직도 갈길이 요원함을 느꼈습니다.

그토록 잘 유지했다고 나름대로 자위하고 있던 순간,

엊 저녁에 또 바알의 무리들이 저를 그냥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변소로 만들기를 원합니다.  

주님 도와 주세요.

회개합니다.

 

아울러 제 안에 달콤하게 뿌리 박아

신앙과 불신앙의 경계를 모르도록 녹아들어서

어떤 때는 현란한 모습으로 유혹을 하고 있는 금 송아지 같은 죄를 알게 하시고

벗어내도록 도우소서.

주님

원하시면 절 절제하도록 하소서.

금송아지를 확실히 구분할 지혜를 주세요.

그리고 그 송아지를 벗어버릴 의지와 용기와 당위성을 허락하소서.

 

주여

주의 뜻이 아니면 아무리 유혹적이고 달콤하더라도 없앨 용기를 주세요.

 

주님....

마음이 답답한 것이

그리고

금송아지가 자꾸만 묵상 중 눈에 걸리는 것이

저로 하여 주님이 깨닫도록 하시는 의미인 줄 압니다.

오늘 하루 특별히 지키소서.

간절히 간절히 소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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