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그 뒤[눅9:51-62] 본문
53.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예수님 일행의 요청에 대하여
그들은 받아 들이지 않았다.
'거부 당함'
54.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제자들.
예수님의 능력을 받아 한참 기세 등등하던 '보통 사람'들의 모습.
'우리가... 명하여.. 불을..'
내 모습..
55.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하지만 예수님은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그냥 돌아서가시었다.
62.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어찌 그러하실 수있을까?
나...
거부당함에 아주 민감한데.
솔직히 거부당해도 그 자리에서는 아무렇지 않고 당당하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솔직히.. 나 .. 부족해서 인지
가끔..속상한 마음과 함께 되풀이 해서 그 거부의 잔상이 올라오고
화가날 때가 많다.
착한 사람들은 안 그런가?
난.. 그래서 거부 당한다 생각이 들면 그 자리에서 시원하게 내 의견을 피력하거나
거부하는 자의 잘못에 대하여 질타를 해서 끊기를 원한다.
그게 가끔은 언성이 높아지는 원인이 되기도.. ^^;;;
예수님은 어찌 그러실 수 있을까?
일단, 그들은 예수님의 상대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하시다.
하나님이 인간...과 싸우실 상대인가?
호랑이가 하룻강아지랑 싸우던가?
또 .. 그분은 원죄가 없으신 분이시기에
아마도 나 같은 되씹는 속상함을 간직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래도 그 분은 인간의 그 속을 다 알고 체험하시고 이해하시고 계신다.
보라.. 그래도 가장 사랑 받는 제자인 요한들이 보이는
저 밑도 끝도 없는 오만과 , 내 속과 비슷한 '울화통'을 ... ㅠ.ㅠ;;
얼마나 안타까우실까?
나.
주님의 그 아무렇지 않으심을 원한다.
저런 일이 이 불신의 세상에서 여지없이 발생할 때..
난.. 주님의 저 당당함을 배우고 싶다.
나도 이제 하나님의 속성을 많이 받아 들이고 있찌 않은가?
'은혜'의 기억이 내게 얼마나 많은가?
전적으로 사랑 받고 있는 자로서
그런 울화가 스며들 상처가 아물어간지는 오래 된다.
예수님은 또 '사명'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심이다.
그 분은 그분이 누구이신지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이..어이없는 자(거부하는 자.. 그리고 그 뒤에 그 어이없음에 반응하는 어이없는 제자들.. 누구라 할 것 없는
세상의 모든 인간들의 부족한 어이없는 속성)들을 위하여
공생애 동안 조금이라도 더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알려
그들이 그런 어리석음이 예수 십자가를 모본으로 달라져야 할 것을
알릴 그런 사명...말이다.
천국을 인도하실 사명.
또한 그 분은 치유의 하나님이시다.
원죄가 없으시기에 스스로는 치유될 이유가 없지만
상처가 많은 우리네 인생들이
저런 일에 대하여 '아파하고' 되뇌이는 것을
치유하심이 예수님의 표본으로 완전한 '인격'을 보이심이다.
그렇다 .
예수님은 모델이시다.
우리네 인생들이 성화가 되면 어떻게 되어가는지 닮을 모델.
그리고 제자들 조차 남아 있는 저 어이없는 '원죄의 흔적'들.
그러니 내 '그 뒤의 되뇌이는 억울함'이 이해가 가신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이기도 하리라.
그렇다면 오늘 내게 주실 것은 무슨 말씀인가?
'화 나는 일이 생길지라도 분은 나되 화로 표현하지 말라' 신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상황은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도
되뇌이게 될 '억울한 속상함'이 두려워질 것도
예수님의 모본으로 자연스러워 질것이며
그러한 모든 이유는
내가 '말씀을 내 인격의 흐름의 기초'가 되는 신념으로 선택했고
성령이 그를 운행하시어
오늘 하루 성공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감사하다.
그 일 뒤.
난.. 점점 더 성장된 자가 되어 갈 것이다.
주여.
말씀으로 또 하루를 엽니다.
아침 일찌기 일어나게 하셔서
다행히 묵상을 완성하고 가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내 속을 그대로 들여다 보게 하시는
제자들의 저 불을 뿜는 어리석음과 대비되는
진정한 능력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참고 인내함이
억울한 것을 누르는 현상이 아닌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는 자의 자연스러움,
사명이 확실한 자의 수준이 다른 여유로움이 보입니다.
주여.
최소한 제게는 그리 보이게 하십니다.
제 부족한 어이없는 수준에서 말입니다.
주여.
제게 주신 말씀,
오늘도 잊지 않고 살게 하시사
예수님 닮기를 원하고 살게 하소서.
승리하게 하소서.
그 뒤의 어리석음보다 오늘 하루 살아갈 앞으로 의 일이
어떻게 더 성공적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인지
그 모든 것이 예수님 닮을 노력과 선택에 따라 달린 것을
잊지 않고 살게 하소서.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간절히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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