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그와 내가 크게 다른 것은 없었구나(렘 20:7-18 ) 본문
제 20 장 ( Chapter 20, Jeremiah )
세상아
네가
언제까지
날
흔들려느냐
세상아
네가
언제까지
날
혼란케 하려느냐
그래
그러려면 그래라
그래도 난
주의
강한 나팔 되리라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예레미야님이 속내를 털어놓습니다.
주님 앞에서...
" 주님.
주님이 권고하셔서 제가 권고를 받았고
주의 뜻이 저의 뜻보다 강하셔서 받아 들이긴 하였으나
저는 조롱거리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하루 종일 날 비웃습니다
주여
생각해 보세요.
말할 때마다 강포와 멸망 이야기만 외치니
주의 뜻대로 말씀을 외친 것으로 인하여
아니나 다를 까 저는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주님의 이름을 들추지 않으리라 생각하면
제 속이 불타는 것 같고 골수가 사무치는 것 같아
답답하여 그럴 수도 없습니다.
무리의 비방을 듣고 있습니다.
사방으로 나에겐 두려움 뿐입니다.
그들이 고소할려면 해보아라.
우리도 그렇게 할 것이다...라 합니다.
친한 친구 조차도 제가 타락하기를 기다리고 있고
원수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그 톤이 그냥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하소연 하고 있네요 .
그냥 하소연이 아니고 넋두리 하는 듯합니다.
아니 '절규'하는 듯합니다.
주님 뜻을 따르자니 세상이 울고
세상을 따르자니 심장이 타는 듯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질곡에서
울부짖네요.
예레미야님의 절규가 이어지네요.
11.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는 고로 나를 박해하는 자가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치 못하므로 큰 수욕을 당하오리니 그 수욕은 영영히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
음이니라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두려운 용사이십니다.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기에 나를 박해하는 자가 넘어질 것이고
강력한 치욕을 당할 줄 압니다.
( 이제 결심했습니다 )
여호와께 노래할 것입니다.
너희도 따라 찬양하라.
이 가난하고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님의
고난과 갈등과 그분의 실존의 눈물이 보이는 묵상이다.
그러면서 그 분의 땀흘려 주님을 찾는
그 노력이 보인다.
세상을 쳐다보자니 하나님의 뜻에 걸리고
세상에 적응하자니 심장이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고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따르자니
세상의 핍박이 몰려옴을 경험하고 있다.
그에겐 그것은 엄청난 두려움임을 확실히 알 수가 있고
현실의 절박한 위기임도 아주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묵상구절이다.
또한 친한 친구들에게 등돌림 받는 절절한 외로움도 남의 일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 도달하면 난 어떻든가?
이전 이전에는 혼란이 들이 닥치면 그냥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가 그 갈등으로 터질 것 같으면 TV나 다른 매체에
눈을 쳐박고 넋을 놓고 있거나
연락 잘 안하던 친구나 지인 들의 전화 번호부를 뒤적뒤적이며 조언을 찾았었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 마음이 멍해져 느끼지 못하게 된 후에야
미적미적 주님 앞에 - 돌아보면 이것이 은혜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 나와 다시
부족한 신앙의 모습을 이어가곤 했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머리가 복잡하고 터질 때에도
억지로 억지로 주님 앞에 나가기 시작했다.
주님의 이 연약한 심성을 이쁘게 여기신 터
집이 바로 기도원 근처라서 언제든지 힘없는 다리 끌고
주님 성전 앞에 나갈 기회를 허락하셔서
늦은 밤에도 '예레미야님의 저 행운'을 흉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상태, 갈등의 상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가면
머리가 빙빙돌고 집중을 할 수 없어
기도하려고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심한 에너지를 소모하여
주님 앞에 앉는 것 자체가 힘이 들었었으나
어느 순간 부터인가 '통쾌한 끊어짐'이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사도행전에서 '주님 앞으로 부터 통쾌한...' 이라는 구절 비슷한 것이
항상은 아니지만 체험되기 시작하였다.
그럴 때 기도원을 내려오는 내 발걸음은
그 밤깊은 시간을 소리소리 질러 찬양하고 싶은 충동을 자제하기 어려움이 느껴질 경우가 자주 있다.
세상의 누가 내 이 기분을 알랴...
그럴 때는 눈물이 나올것 만 같다.
참 감사하고 나 만이 세상에서
이 온전한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은
아버지와의 달콤한 비밀을 약속하고 가슴 떨어하며 기뻐하는
어린 아이의 그 묘한 내밀스러운 기쁨이 가슴에 차오르는 경험을 자주하고 있다.
그렇다.
그게 주님을 믿어가며 점점 갈증이 늘어가는 이유다.
갈등 중의 실존의 절절한 위험 속에서 기도하던
예레미야님이 아래처럼 갑자기 외치는 이유다.
' 여호와께 노래하라 찬양하라'
하지만 예레미야님의 갈등의 내용을 보면서
조금은 나랑은 다른 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분은 철저히 주님의 일을 하다가 받는 '조롱'이며 위험이며 '갈등'이지만
나는 겨우 '관계'- 가족, 먹고 살아가는 일...-에서 얻는 갈등으로
그 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훨씬 부족한 의의의 갈등이란 것이다.
하지만, 그 분과 그릇이 다르다고 큰 고민은 할 필요없다.
난 종재기 그릇보다 적은 그릇으로 타고 났을 뿐이고
그것은 그 분 하나님이 날 그리 만드셨기에
그냥 그 정도의 갈등 밖에 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나에게 주어진 갈등 상황 속에서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는 것은 다름이 없고
이처럼 작은 강도의 고난이지만
내가 느끼는 정도는 예레미야님의 그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일상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위해' 인내하게 하고
'예수님을 위해' 받을 수 밖에 없는 연단임을 인정하기만 하면
치졸한 듯한 내 인생의 갈등 들이
모두 다 주님의 영광을 위한 갈등 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기에 오늘 내가 보는 것은
예레미야님의 고난의 내용의 거대함, 위대함..등의 크기를 보는 것이 아니다.
난 그 분이 갈등한다는 것을 보고
그 분이 갈등을 혼자 억누르고 가라앉히려 노력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가져감'을 보고 있으며
그 상황 그대로, 있는대로 '주님 앞에서의 절규'로서 아뢰고 있음을 보고 있으며
그로 인해 마음이 '뻥 뚤어지는 통쾌함'을 공감하고 있을 뿐이다.
성경에서 나오는 것이 '축복'하고 '예언'하고 '공의'를 보이는 무서운 소리만
뜬 금없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이처럼 살아있는 오늘의 내 모습과 하등 차이없음을 보이고 있으시다.
그러면서 내가 앞으로도 문제를 만날 때마다
그것을 해결하여야 할 방향이 이것이고
이처럼 주님 앞에서 온전히 하소연하고 절규하는 기도로서 얻어지는
그 영적 통쾌함을 기억하시길 원하시는 것이시다.
그 통쾌한 기억이 쌓여가면
영혼은 '샬롬'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며
그 샬롬의 지속적 이어짐은 '배에서 생수의 강' 즉, 성령이
큰 폭포처럼 흐르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예레미야님의 절절한 갈등과 실존과 위험과 .......그를 해결받은 통쾌함과
찬양하는 삶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간증'으로 듣고 있다.
즉,
그 분 선지자들이
'그 모진 삶을 어떻게 이겨냈을까'라는 것을
단지 하나님의 은혜..때문일 것이라는 짐작을 넘어서는
확실한 증거를 보는 듯한 묵상이다.
적용
1. 주님의 뜻과 어긋나는 의도, 죄의 의도를 느낄 때마다
가슴이 타는 듯한 갈등을 느낌이 감사합니다.
주님의 사랑인줄 압니다.
주님이 날 , 나와 비슷한 제재를 받는 모든 분들을 사랑하시는 증거임을 알았습니다.
주여. 사랑해주심을 너무 감사합니다.
제약은 사랑이다.
고난은 사랑의 표현이다.
2. 갈등.
모든 갈등은 주님에게 가져가야 한다.
이런 나를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 매달리셨다.
그 고통은 나를 이해하심이다.
3. 나를 조롱하는 세상의 유혹.
한걸음 관조해 볼 수 있겠다.
4. 주님의 통쾌한 해결을 기억하자.
주님 앞 기도의 유쾌한 기억을 잊지말자.
늘 주님 앞에 가져가자.
현실은 달라진 것 없어도 마음이 풀어짐을 자주 느낀다.
돌아보면 결국은 축복으로 바뀜도 기억하자.
난, 간증덩어리다.
5. 자식들 문제... 조금 더 인내하자.
6. 성경 일곱장 읽겠다.
7. 기쁨의 찬양 드린다.
8. 어떤 문제든 주님께...
기도
주님
오늘은 예레미야님의 속내를 보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옆에서 말씀하시는 듯하게 묵상구절이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실감이 납니다.
그분의 말씀 내용은 나랑 차원은 너무도 달라
비록 그 분의 절규가 불쌍하기는 하지만
이전에는 '나같은 자의 것도 들어주실라나... '하고 지나갔던 적이 많았습니다.
대부분의 묵상구절에 만나는 저러한 속내를 들어내는 말씀에
전 '귀족'들의 세상모르는 투정을 바라보는
하층 계급의 시선 같이 현실감이 떨어진 투정이 내 속에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이제는 아닙니다.
제 착각였던 것을 저도 모르게 깨달은 것 같습니다.
주님의 살아계심의 체험 덕인 듯 싶습니다.
기도에 대한 주님의 위로가 성경의 내용과 비슷하게 체험된 탓인것 같습니다.
거기에 내 그릇이 작음도 주님이 허락하심을 이해하니
스케일은 달라도 제 삶의 겪는 모든 것도
주님 앞에서 겪는 주님의 일임을 깨닫게 된 이유도 있는 듯 합니다.
주여 .
감사합니다.
어찌보면 그것은 제 영혼의 커가는 증거이고
어찌보면 그것은 주님의 축복의 증거인 듯 싶어
너무도 감사합니다.
그 분 예레미야님도 저랑 다름없는 고민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어
참으로 기쁩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주님 앞에서만 고민하고 외치겠나이다.
주님 앞에서 찬양을 드리는 삶을 살겠나이다.
오늘 가능하면 주님께 노래를 열심히 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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