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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하나님 나라가 제 소원입니다(왕하12:9-2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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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하나님 나라가 제 소원입니다(왕하12:9-21)

주하인 2006. 10. 27. 11:16

(열왕기하12:9-12:21)  
 

9 제사장 여호야다가 한 궤를 취하여 그 뚜껑에 구멍을 뚫어 여호와의 전 문 어귀 우편 곧 단 옆에

  두매 무릇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는 은을 다 문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그 궤에 넣더라

 현명한 열심...

산당 만 없었더라면...

 

18 유다 왕 요아스가 그 열조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구별하여 드린 모든 성물과

   자기가 구별하여 드린 성물과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에 있는 금을 다 취하여 아람 왕 하사엘

   에게 보내었더니 하사엘이 예루살렘에서 떠나갔더라

 어찌 이런 일이...

아무리 급해도 ...

주님의 것을 ...

 

20 요아스의 신복들이 일어나서 모반하여 실라로 내려가는 길 가의 밀로 궁에서 저를 죽였고 
 아...

 

 

 (주님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혼돈 뿐이다.)

  

 난 요아스를 보며

남 보는 것 같지 않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여러 이유로 해서 난 아직 집이 없었다.

그러다가 또 몇가지 이유로 약간의 돈이 생겼다.

그러나 막상 집을 사려는 시점에 폭풍처럼 집값이 뛰어오른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주님의 눈치를 살피며

죄는 아닌 줄 알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말씀대로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주위에서 많은 소리들...

'지금은 때다....'

 

묵상에서 받은 나름대로의 주님의 말씀이라고 생각되는 것... 실은 너무 혼란스러워 그것이 맞는지 아닌지 기도하려다가 나도 모르게 탁하고 옛날 버릇대로 해치웠다.

그리고는 마음이 불편하다.

우선 주님 뜻이 아니고 내 오랜 버릇인 산당의 결과 인 듯하여서. ..

주님 보기 죄송해서 가능하면 빌리는 것은 피했는 바 요번 일은 시류에 떠밀린 것 같아서이다.

그래...

어찌보면 그리 사는 것이 평범하고 옳은 것일 수도 있다.

난 바보고..

그리하니 이 나이까지 이리 살지..

생각이 많이 돈다.

그럼에도 알게 모르게 내 소유에 대한 덜 욕심 부리는 삶의 태도인지 몰라도 그 만큼 더 많은 영적 감응과 기쁨과 평강을 누리고 온게 사실이다.

 

( 어지러운 세상 중에..)

 

그런데

어제 부터 서서히 마음에 부담이 온다.

들리는 소리도...

 

 저녁에 가서 교회에서 많은 기도를 했다.

시간이 그리 오래 된지도 모르고 기도했다.

 

오늘 아침 나와서

요아스의 모습을 보니 어찌 이리 닮았는가?

 

 최근에 비교적 예전과는 다른 열심을 보이고

주님 앞에 선하게 서려고 노력했던 것이 사실이다.

마치 요아스가 성전에서 은을 받는 것과 같이...

 

그럼에도

요아스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약간의 자극에도 여호와의 전의 물건을 거두어 가는 패악한 행동을 한다.

그리고 결과로서 죽임을 당하고..

 

 주님께서는 개인적으로 이러시는 것 같다.

'주하인

 네가 잘해왔다.

 잘하고 있고..

 그러나, 근자 며칠 새에 보인 일은 자칫 40년 너의 축복 가운데 오점이 될 수도 있겠구나.

 요아스의 예를 들어 줄테니 보고 깨닫거라.. '

 

 하루에도 수십번 변하던 개인적 성향을 보아도

주위에 열정이던 자들의 냉랭함을 보아도

천사처럼 행동하던 몇몇 열심이던 분들이 마치 악인처럼 명분에 따라 180도 변하는 모습을 보고

요아스의 이러함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님을 다시금 확인 시켜 주시고자 함인 것 같다.

 

특별히   믿음의 거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승리도 성공도 아닌, 열정이었다. 란 '필립 얀시  '의 멘트가 눈에 들어온다.

 

누구도 안심하지 못한다.

틈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상에서 밀고 나온다 .

산당은 우리가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다.

 

날마다 벗겨내고 묵상하고 행동하고 주님께 눈물로서 회개하고 매일같이 결단하고 주님 성령님이 내 안에서 운행하시도록 십자가 앞에 내려 앉지 않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요아스를 보라.

한살 부터 여호와의 전에서 철저한 신앙인으로 커서

일곱살에 왕이 되어서

대단한 스승을 모시고

40년간을 왕위에서 평안을 누릴 확고 부동한 신앙인이 아니던가?

 

그가 무슨 대단한 잘못을 했다는 말인가?

단지 산당을 완벽히 제거하지 않은 그런 소소한 듯이 착각될 죄를 방임한 실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 완벽할 듯이 보였던 신앙인도

40년 끝에 '여호와의 전'을 뒤져서 공물을 바치는 대죄를 지어 버렸다.

아마도 그는 그 즈음에 그런 자신의 악한 행동이 악한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을 것 같다.

 

주위의 표변하는 신앙인 들의 논리는 다 그럴 듯하다.

그럼에도 그들의 결과는 180도 다.

인간적으로 이해가 간다.

 

스캇펙 박사의 '아직도 가야할 길'이란 책에서 보면

신앙은 과학의 눈으로 파고 들어 가면 어쩌면 '불신앙'이 당연할 듯이 보이기도 한다는 묘사가 나온다.

그것처럼

합리라는 눈으로 자신의 이성에 맞추어서 들어가다 보면 당연히도 하나님이 안계실 듯 보이게 된다.

 

문제는 산당이 그렇게 만든다.

자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잰다는 사실이 너무도 어이없지 않은가?

오죽 했으면 도자기가 장인을 평가한다고 성경에 탄식하는가?

 

날마다 자신을 돌이키지 않으면 그리된다.

그게 산당의 역할이고

그 증거가 요아스며

아마도 난 그 시초에 서 있는 것 같다.

 

난 이래야 했다.

조금더 인내하고 기도하고 주님의 뜻대로 인도 받아야 했다.

혹..

전세로 그냥 있고 돈은 날라갔어도

주님이 그걸 더 기뻐했으면 그렇게 했어야 했다.

마음이 편치 않고

묵상이 계속 그리 들려오는 걸 보면 그렇다.

 

이제라도 주님의 뜻에 대하여 깊이 다시 묵상하여야 겠다.

최소한 그래야 요아스의 어리석음을 떠나

필립얀시의 '믿음의 거장'까지는 아녀도

주님이 원하시는 꾸준한 믿음을 유지할 것이다.

( 주님나라를 위하여 이 땅을 산다.) 

 

 

 난 이 세상보다는 주님의 나라를 더 바란다. ... 

내 다짐성 고백이다.

 

 

기도

 

주님

용서하소서.

어리석을 듯 비쳐질 고백을 여기서 합니다.

그렇습니다.

어찌보면 묵상의 폐해라고 손가락질 받을 생각이 제 속에 떠 돕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주님

당신에게 판단을 맡깁니다.

최소한 그래야 요아스의 결과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 탓입니다.

아..

날마다 어리석은 것 같은 일을 유지할 의지와 열정을 허락하소서.

난 변치 않길 원합니다.

이제 저에게 필요한 것은

시류와 타협하지 않을 용기입니다.

이제라도 다시금 간절히 소원하오니

혹시 있을 앞으로의 결정에서

주님 뜻대로 가길 원합니다.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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