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그래도 담담할 나 ( 행 23:3-24:9 ) 본문
제 24 장 ( Chapter 24, Acts )
2. 바울을 부르매 더둘로가 송사하여 가로되
그 밤에 천부장이 바울님을 모시고 서둘러 옮긴지 얼마되지 않아
대 제사장 일행이
아마도 그들 중 최고 유능한 변호사로 생각되는
더둘로를 데리고 와서
화려하고 능수능란한 언변으로
'송사를 ' 시작한다.
송사
그것을 듣고 있는 사도 바울.
그의 담대함.
그 담대함 속에 움직이고 있을 생각들.. 이 궁금하다.
4.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내가 보기엔
더둘로라는 사람이 총독에게 하는
그 아부의 말이 너무 번지르르해서 속이 울렁이고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절묘한 방어가 가증스럽고
관용해달라는 그 속의 꺼멈에 비한 아름다운 단어의 선택에 혀가 둘리고
약간은 그의 뛰어남에 속상한 비교도 생기려 했을 것이다.
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거기에 이제 본격적으로
그들이 온 목적에 대하여 익히 알고 있는 본색을 드러내는
그 눈 앞에 보이는 논리의 귀결이 드러남도 우습웠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송사'할 때 내가 바울님이었더라 묵상하니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을 것인데
거기에 '염병'이라 하고
'소요케 하는 자'라 하고
'괴수'라 하니
저들을 어찌 용서해야 할까 속이 뒤죽박죽 되었을 것만 같다.
그리고 , 그들 소위 배웠다는 분들이
가장 천한 목적으로 가장 나쁜 언어를 구사함이 엉터리로 보일 것이고..
여기까지는 그래도 '그들'에 대한 판단이다.
한편으로 내 스스로에 대한 생각은 어떠했을까?
과연 나는 저들의 송사에 '아니다.' 하고 말은 하지만
내 스스로의 이미지가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을까?
정말로?
송사
난 이것을 정말 싫어하는데 사도 바울님은 각오하고 그 소굴로 자청하여 들어갔다.
그것을 듣고 있는 사도 바울님.
그의 담대함.
그의 담담함
그리고 그 속에 움직이고 있을 생각들.. 이 궁금하다.
분명코 그는 위에 내가 바울님의 위치에 서 있다고 가정하고
그들이 송사할 때 들어왔을 여러가지 생각들에 대하여 추정해보았다.
한참을 열변을 토하는 더둘로 일행.
그들을 향해 한참 치달리는 내 생각들...
그리고 너무도 익숙하게 내 마음에 드는 화~,
변명하고 반대하여 그들을 누르고 싶은 호승심.
또, 내 속에 드는 '자괴감'........
그런데.........
사도 바울님은 '담담'하셨음이 분명하다.
성경의 분위기가 그렇다.
실제가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의 그 이야기 도중에 어떤 논리가 그를 지배하고 있었을까?
이게 궁금하다.
아마도, 그들에 대하여서는 ' 용서해달라'고 주님께 중보하지 않았을까?
또한, 자신을 공격할 때 다가올 '트라우마'는 없엇을까?
아마도 담담하게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을 듯 싶다.
타인에 대한 긍휼.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다.'
' 복을 이어받게 하심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함을 이유로 나를 공격하는 자들에 대하여
용서할 나름의 힘 - 항상은 아니지만 ㅎㅎ -은 생겼다.
주님은 그것을 가능케 하셨고 ㅎ
그것은 나의 또다른 자신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이 송사할 때 그들이 찌르는 데 대하여
'나 스스로에 대한 흔들림' 마져 아무렇지 않을 자신은 없다.
실은, 이 부분에서 아직 약하다.
어쩌면 '나를 스스로 보호'하기 위하여 타인을 더욱 용서하지 못하는 게
나처럼 성질 급한 자들의 깊은 내막은 아닐까?
다시말하면 자신감이 있는 자들은 흔들리지 않고
흔들리지 않음은 담대함이다.
성품적으로 담대한 분들은 다르지만
잘 흔들리는 나에게는 이 부분에서 묵상할 포인트가 잡힌다.
레마로 주시는 말씀처럼 느껴진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님의 입장으로 돌아가
그가 과연 '선천적으로 담담하고 담대할 자격이 있을까?' 하는 물음이다.
그는 분명코 살인자고 율법의 수호자에 가까운 자였다.
아마도 그가 아닌 다른 사도 바울2가 세워졌더라면
그는 죽이려고 모의하는 40인에 속해서 41인이 되지 않았을까? ^^;
또한 그는 ' 배역자'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역겨운 .. 자 일 수 있다.
즉.. 여러가지 타인에게 공격 받을 수 있고
자신을 비하하면 비하할 거리가 많다.
아니.. 최소한 오늘 같은 상황에서 저들의 그 교묘한 송사에 대하여
당당하게 흔들리지 않을
그 담대함이 있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인간적으로는............
그렇다면 그가 그 담대하고 담담한 이유를 알면
주님이 나에게 다시한번 허락하실 '레마'를 얻을 수 있지 않는가?
그 이유.
출근하는 찻속에서 계속 묵상하니 이해가 된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삼년의 광야 연단을 거쳤다 한다.
이때 깊은 자기와의 만남이 이루어 졌을 것이고
그것은 단지 우리가 얘기하는 '소명'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소명.
인생을 전부 걸어 이루어나가고 싶은 가치..
뭐 이렇게 정의 되어 있는 세상의 이해로는
저런 임계상황에 다달아서는 아마도 많은 흔들림이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오늘 묵상하는 바는
임계 상황에 다달아
그들 공격하는 자들의 날카로운 거짓 비방을 기다리는 동안.........
사도 바울님의 머리 속에 들었을 생각들의 회오리..
그 시간 동안의 '화~ 내지 좌절' 이다.
그런데 결론은 사도 바울님의 잠잠함은 내내 유지가 되었을 것이고
그의 머리는 '명경지수'처럼 맑았을 거란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소명이라는 이름의 또다른 큰 논리에 의한 지배로는 불가능하다.
흔들린다.
최소한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추후의 결과는 있어도
흔들림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고
그런데도 그렇지 않은 담담함은
사도 바울에게는 다른 무엇이 더 있었다는 이야기며
그 무엇이 오늘 내가 받고자 하는 레마다.
레마는 받아서 내 영혼에 깊이 깊이 간직하는 시간을 거쳐야 할 것이지만
그 받음이 벌써 칠팔년을 되어간다.
묵상 , 큐티...
그렇다면 그 깊은 정답은 무엇인가?
삼년간 어떤 과정을 거쳐
그의 인생을 거쳐 쌓아온 그의 인생관, 세계관을 뒤 엎을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그는 말씀으로 인하여 강한 자기 인식이 생겼을 것이다.
' 난 옳다. '
어떻게...........옳은가?
위에도 말했지만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배역자, 배신자.. 라 하고
오늘은 저리도 강렬한 단어로 그의 정체를 흔드는데..
그의 그러한 자신감, 확신은 성경에 곳곳에 나온다.
'나를 닮으라'
결국 그의 확신은 인간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망상이 아니고는 ...
그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철저히 자신을 들여다 본 것이다.
어떤 이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했던 인생길을 걸어온 자고
이제 이후로는 더욱 명확히 살 자.......라는 게 그의 자신에 대한 확신이다.
그런 확신은 다시 말하지만 논리로는 안된다.
그는 성령으로 깊이 깊이 바뀌인 자라는 것이다.
그것은 단 한번의 다메섹 만남이 이루어낸 결과라기 보다는
삼년간 자신 속의 여러 찌기들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들어내고 확인작업을 거치고
예수 보혈로 씻김 받고 또 들어내고 말리고............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거다.
나.
많은 부분 주님 앞에 말려간다.
아직도 젖은 찌기 들이 가끔 날 흔든다.
송사라 생각되어지면 흔들리는 마음이 생긴다.
평화가 흔들린다.
그러나 , 이제 조금 더
주님과의 공동 작업이 지나
내가 단단해지면
난 담담한 바울님과 같이 될 것을 믿는다.
그것을 위해 주님이 나에게 여러 현상을 허락해 오셧음을 믿는다.
그래서, 내 삶이 점점 사랑스러워져 간다.
변화 없고 여전히 고독하고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으며
어쩌면 내 ... 들도 똑같아 보이는지
현실에 의하여 흔들리려 하지만
이제 점점 단단해져 간다.
송사에 덜 흔들릴 것 만 같다.
감사하다.
내 하나님을 알게하여 주심이 정말 감사하다.
그 하나님이 내 모든 생각의 답이 되어 주신다.
주님은 내 길이시다.
내 길의 등불이시고
내 삶의 반석이시다.
적용
1. 나를 사랑하자.
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예수님의 보혈로 씻김을 받은 자.
성령의 보호를 매일 받는 자...
내 죄가 나를 송사하더라도 또 변한다.
난 흔들리지 않을 굳건한 보장 안에 있는 자다.
2. 성경 세장 읽겠다.
3. 담담한 바울 님을 묵상하자.
잡혀서 송사를 듣는 그분.
그 분의 머릿 속의 차분함.
그 이유를 묵상하자.
4. 타인을 긍휼히 여기자.
5. 세상을 불쌍히 여기자.
송사하는 그들을 가만히 인내하고 바라보자.
생각과 판단을 금하자.
기도
주님.
아시지요?
저의 부족한 점요?
도우소서.
도우소서.
그래도 난 주님 안에서 의로운 자임을 믿게 하소서.
저 혼자는 되지 않사오니
주여.. 온전하신 주님이 그리하여 도우소서.
모든 거 맡깁니다.
송사에 흔들리지 않는 자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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