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흐름속에서 (행 21:37-22:11 ) 본문
제 21 장 ( Chapter 21, Acts )
주님
간절히
바라옵기는
오늘
이리하소서
제 안에
당신의
성령께서
강하게
흐르로록
그리하소서
37. 바울을 데리고 영문으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더러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뇨 가로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사도 바울님이 예루살렘에 오기전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보았던 것이
이런 소동이다.
이 소동을 통하여 군대의 천부장까지 나타났으니
그 보인 성령의 감동 속에서 보인 장면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분명코 성령은 한 장면을 사도 바울님에게도 제자들에게도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님은 하나님의 소명을 통해서
두려움을 넘어서는 뜻을 믿고 여기까지 왔다.
결과는 어떻든가?
이제 천부장이 없었다면 사도 바울의 로마행과 전 세계의 선교가 있었을까?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알 수가 없다.
천부장은 자신이 이용될 줄도 알지 못했지만
38. 그러면 네가 이전에 난을 일으켜 사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이런 허무맹랑한 소문을 듣고 가진 사도 바울에 대한 호기심을 통하여
그, 소요의 중심인물의 '변'을 듣길 허락하게 된다.
참 재미있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으로 어떤 일을 제한한 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다시한번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모든 것을 '선'으로 이루어 내시는 분이시다.
발없는 말이 천리가 가고
조그만게 크게 확대되어
사십 명이 사천명이 되고
유대인이 애굽인 자객으로 변화되어도
그 것을 들어 또 사도 바울의 '군중'에 대한 보호장치가 되니
세상의 어떤 것도 당황할 이유도
좌절할 이유가 될 것도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제 22 장 ( Chapter 22, Acts )
2. 저희가 그 히브리 방언으로 말함을 듣고 더욱 종용한지라 이어 가로되
또한 헬라말 뿐 아니라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니
군중이 '더욱 종용'하여 졌다.
나.
올초에 내 원함의 제목을 조금 적어 보았다.
그 중 '영어'와 '중국'어 조금 더...라는 제목을 기도하기로 했었는데
영어는 퇴근 시마다 나도 모르게 - 이게 중요하다.ㅎㅎ
솔직히 난 배움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안될 거란 두려움이 너무 많다.
그게 자식 들에게도 내려가서 내 보기에는 달란트들이 우월한데도 배움을 꺼린다.
그런데......... 말씀을 묵상하기 시작하면서 달라진게 있다.
나도 모르게 잘 배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성령의 역사의 한 부분이다.
진짜다. - 차 속에서 영어 회화를 하면서 미국 여행까지 다녀올 수 있을 정도까지는
늘어가고 있고.....중국어도 한달 전 부터 오랫동안 손 놓았던 기초 파트에서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언어 공부
사도 바울의 탁월함은 많은 부분에서 크게 쓰이고 있다.
나.
직접 고백했지만 수많은 세월을 허비하며 피해가고 있던 것을
아직은 크게 세상의 목적은 없지만
오십넘어 나도 모르게 공부가 되어가고 있음은
하나님의 나라에 일조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그러면서 현실에서 오시는 외국분들에게 도움이 되어질지 모른다는
막연한 타인을 위한 이유로 공부를 한다.
바울님은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니
그 성난 군중이 더욱 조용해졌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한 다국어 배움도 필요치 않을까?
오늘 나를 위한 나만의 메시지이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10.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다시 한번 정리하신다.
'누가 이르리라'
사도 바울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믿고 그대로 순종해 나간 사람이다.
누가 이를줄 알아야 움직이고 싶어하는,
정확히 보장이 없으면 두려워하고 움직이기 싫어하는
나의 옛 성품에 이러한 막연함은 '절대' 응하기 싫은
솔직히, 미련한 자들이 하는 일이라 생각했던 일이다.
그러나 이제 이런 막연한 일에 '확신'이 겹쳐지고
거기에 평강의 기운이 느껴지면
그게 하나님의 뜻일수도 있음을 막연히 이해하고 받아 들여간다.
생활 속에서 습관이 되어간다.
그걸 난.. 흐름.. 이라 이해하고 있다.
그 흐름 속에서 강하게 붙들고 있던 내 자아의 생각을
조금 힘을 풀고 두손을 풀어 놓는 것.
그걸 난 '영성'이라 받아 들이고 있다.
영성은 내 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머리 속의 지식이
조금씩 마음으로 내려 오고
그게 영혼 속에 움직이는 일정한 체계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라고
또 이해하게 되었다.
되었다.
하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는 '피동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싶다.
어느 정도..
내 원함과 주님의 말씀하심 사이의 조합.
그리고 그 조율 속의 흐름이 느껴지면
그냥 날 내려 놓고 그 흐름 속에 맡기는 것.
그래서.. 더욱 필요한 것이 '누가 이르시는 소리'를 듣는
빈도와 강도가 조금 더 늘어남이다.
내 자아가 크고 생각이 많을 수록,
또한 육성(육체의 성질)이 강할 수록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사도 바울님을 따라다니던 자들도 '빛'은 보았으나
소리는 듣지 못하지 않았던가?
오늘.
혹시 있을 어떠한 곤혹스러움도
자연스러움으로 이겨낼 수 있길 소원한다.
흐름...은 막힘이 없음이다.
막히면 돌아가고 그래도 안되면 넘어가고
넘어가기 위해서는 잠시 기다려서 시간이 채이면 그리되는 것이다.
그 흐름을 주장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을 기다린다.
늘 그렇게 내 눈이 바뀌길 원한다.
적용
1. 일찍 일어나 둘째를 깨워 식사를 하며 말씀을 읽게하고 내가 읽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눴다.
아이 제대후 자연스러운 말씀 나눔이 틀을 잡아간다.
아들이 생각보다 더 현실적임을 늘 바라던 것이
내 과도한 막힘은 아니었을까..
그 마져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이라면
인간의 눈으로 암담해보이는 장래마져
더 큰 소망으로 내려 놓을 수 있을 거 같기도하다.
왜 이리 엄친 아.. 들이 눈에 걸리는 지..
하나님의 뜻은 흐름인데...........
영성이 필요한 부분이다.
2. 언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겠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언젠가 쓰임 받겠지.. 서서히.. 천천히.. 흐름 속에서........
3.누가 이르리라.. 명심하자.
아무 것도 단정하지 말자.
너무 정확한 것을 기다리지는 말자.
그러기 위해서는 깨어 있자.
4. 성경 세장 읽겠다.
주님 이외에 내 삶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가 없다.
주님은 물론 논리를 넘어서는 분이시다.
이 어리석은 자가 움직이는 이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늘 충만해야 한다.
로고스이신 말씀.
레마가 되길 원하면서...
기도
내 주 하나님.
넓고 크신 은혜는
어찌 내가 다 말로 표현하고
어찌 내가 다 이해 하리요.
그 은혜와 그 사랑 안에서 내가 할 일은
오직 모든 일이 주님의 뜻 안에서 펼쳐지는 일상임을 인정하고
모든 일의 결과가 모두 선이심을 믿어 의심하지 않은 것 뿐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는 기다리겠습니다.
주여.
간절히 부탁드릴 것은
이 마음의 가끔가끔 올라오는
옛 성품들입니다.
말씀으로 이겨내고
말씀이신 하나님의 역사로 매일매일을 잘 버텨가고 있고
그럴 때마다 평화가 제 안에 이루어짐을 고백하고 감사하지만
이제 늘 그렇게 하소서.
늘 흐름이 자유롭게 하시고
늘 이기게 하시고
늘 평화롭게 하시옵소서.
제 모습으로 제 자식들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도구가 되게 하시고
제 주위에 모범이 되게하소서.
저로 미움이 사라지게 하시고
긍휼이 넘치는 자 되게 하시어
주님의 말씀을
오늘 사도 바울이 다양한 언어로 외치듯
세상에 저도 그리외치게 도우소서.
간절히 빕니다.
쓰임.. 때가되어 ........ 그리되게되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도구 되게
절 단련해가렵니다.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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