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그때와 그 날을 위해 (마 24:36-44 ) 본문
제 24 장 ( Chapter 24, Matthew )
내릴 때가 되면
누를 수 있는
버스 손잡이
이제 내 속에서
요동치던
그 죄된 속성들도
이제
주님오실 그날을 위해
멈출 수 있길
간절히 원한다
이제
내게서 내리거라
이 악한 생각들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버튼 누르며 명한다
^^*
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 날, 날짜
그 때 , 즈음
날과 때를 어찌 알겠는가?
소수의 어떤 사람들은
그 날과 때를 아는 듯이
비 성경적으로 날을 정해놓고
세상 일을 포기하고까지
날과 때만 기다리다가 혼쭐이 난 경험들이 있다.
그들을 ' 종말론자'들이라 한다.
그들은 열심은 있되 지혜와 주님 이끄심에 순종함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과 반대로 생각하면 된다.
그 날과
그 때는 모른다.
하지만 그 날과 때는 잊지 않고
세상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주님의 때와 날을 신경을 써서 살아야 한다.
늘 주님 앞에 있는 나.
늘 주님 오실 때.
그 즈음을 신경을 쓰다보면
그 날은 반드시 올 것이고
그 날이 오면
주님의 위로가 있을 것 아니던가?
즉,
'때는 늘 인식하되
날은 주님께 맡긴다'.
이것이 옳은 종말론적 삶의 태도이다.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노아 때도 그랬다
때를 아무리 말해도
때에 대하여 신경 쓰지 않고 살다가
'날'에 닥쳐서 모두 죽었다.
40.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때는
깨어 있는 자에게만 해당한다.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그 때에 깨어 있는 자들 만이
그 날에 주의 임하심을 보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그 때와 그 날.
이제 주님 오실 때가 다 되지 않았던가?
예비하고 있어야 하지 않는가?
깨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예수님 믿고
그 믿음의 시간이 늘어가며
조금씩 왜 믿는 자들이
주님을 찾을 수 밖에 없는가
세상의 그 발전하는 과학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종교, 영이라는 영역,
미지의 영역에 점차로 더 매달리게 되는가
어쩌면 그러한 현상이 나 주하인에게도
발생하는가
매일 하루에도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고
또 넘어지고
며칠 간을 주님이 안계신 것 같이 살다가
다시 일어서고.....
그러다가 점차로 넘어지고 일어서는 빈도가 줄어들면서
내 영적 두다리의 힘이 생기면서
난 깨달아 갔다.
' 아 주님은 살아 계신다.
틀림없이 살아 계신다. '
그것은 너무나도 믿는 자로서 당연한 생각이지만
내 말하는 저런 표현은 생각을 넘어서는,
모태로 부터 받은 당연한 개념이 아닌
'확신'의 그것을 이야기 한다.
그것은 내 불신의 삶,
이전에 예수님을 모르면서 살아온
수십년의 삶 속에서 체득되어진
내 경험의 판단을 넘어서는
어떠한 것이 확실히 존재함을
이제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주님은 내 경험되어진 습관과는
너무도 다른 현상의 것을 나에게 체험시키면서
당신의 살아계심을 나에게 넌지시 알아듣게 하시고
그분이 임재하시면
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으로
영혼이 절절히 끓게 되는 현상들이 인식되어지고
그 인식의 시간이
팥죽 끓듯한 내 감각의 장난이라면
단지 몇회의 충동적 착각이겠지만
수도없이 되풀이 되면서
점차로 강해지고
점차로 오래되며 날 이끌어가시는 게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런 것이다.
월요일 아버지 학교의 체험을 예로 들었지만
수개월 만에 머리가 곤죽 박죽되고
실패로 깊이 좌절된 영혼을 가지고
억지로 스텝모임에 나가서
찬양의 은혜가 없으면 - 솔직히 내 감각에 뜨거움이 인식이 안되면 - 늘 찬양 자체가
막히던 경험을 넘어서서
그 분은 내 기도 부터 시작하여
찬양을 끝없이 뜨겁게 만드시고
내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는
'은혜로왔다'는 소리를 듣게 되고
그 소리가 이전 같으면
묘한 비틀림으로 인식되었을 부끄러운 감정이 들었을 일이
자연스럽게 인식되고
내 지은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은혜가
내 영혼에 잔잔히 강하게 오래 남는 체험을 하고
그 것을 통하여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이 어지러운 삶의 왜곡이
그냥 견딜 만하게
마치 '그날이 감해질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내 삶속에서 인식되고
진짜 주님이 오실 종말의 그날에도
이같은 든든함, 성령의 붙드심이 날 붙드셔서
견딜만도 하겠구나 하는
말씀이 하나하나 인식되어 가게 되는 현상이 나오고
그것은 또다시
내 영혼에 순작용을 일으켜
말씀 만이 살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고
다시 은혜가 현상에 상관없이 가중되게 되는
그런 체험을 겪게 되어 오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나에게는 건너가야 할 장애물이 있다.
큰 장애물.
누구에게도 말 하지 못하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나의 인생을 크게 누르고 있는 것.
이제야 정확히 그를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는 개념.
이것은 나로 하여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데 힘이 들게 하여
가끔 가끔 나의 영혼의 바짓가랑이를 붙드는 것 같다.
오늘 그 '날'과 그 '때'에 대하여 묵상하고 있다
그날과 그때가 올 때
난 주님을 어찌 마주할 수 있을까?
주님 구름타시고 영광 중에 오실 때
나는 과연 요새 겪고 있는 흔들림을 가지지 않고
은혜 충만할 때 하는 것처럼
두손 번쩍 들고
'주여 어서오서서'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요
이 어려운 삶을 이제 거둬 주소서' 하고 기뻐 소리칠 수 있는가?
지금 주님의 은혜가 있을 때는
가슴 한구석에서 위와 같은 상상만 해도
눈물이 날 것같은 움직임이
따사롭게 동하고 있지만
과연 내 죄악의 순간에 있던 그때에 오신다면
난 머리 콱 조아리고 눈도 들지 못하고
깊은 좌절감에 빠져 있고 있진 않을까?
그렇다면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그 날과 그 때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장애물.
이 장애물이 싸이클릭하게 날 잡지 않도록
이제 정결화된 영혼으로
내 영혼의 메카니즘이
'상처'의 흔적이 더 이상 작용되지 않도록 하는
그런 상황의 그 때를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 아니던가?
3월 중순에 오는
눈치고는
참으로 많은 양이 내렸습니다
기도원의
깊은 영성은
그 밤을
차분히 만들었지만
이로 인하여
춥고 어두운 분들이
더욱 곤란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평강 가운데 거하는
주하인의
안심하며 내쉬는
기쁨의 숨결이
느껴지시는 지요^^*
어제 기도원에 갔다.
수요예배 대신
수영장에 갔다가 나오면 늦으니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마음은 누르고
반은 기대하는 습관이 들어가며 갔다.
눈.
참으로 많이 온다.
마음이 푸근하다.
어둡고 차가울 것이
따사롭고 분위기 있어 보임은
내 영혼이 주님의
내 영적 상태와는 상관없는 '은혜'로 그리하리라.
성령이 인도하시는 마음이시리라.
성전에 앉았다.
참 많은 깨달음이 온다.
갈멜산기도원.
집 10분 거리의 이곳은
직장인 병원
근처의 우리 교회
내 집 안마당 같은 예술공원.
그 안에 있는 이 기도원이
주님이 날 사랑하시고 보호하시기 위한
내 생활 반경으로 만들어 주신 것 같아
너무도 축복받은 자 같은 마음이 들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철저한 주님의 보호.
눈을 들어 주위를 보면
어디하나 주님의 사랑이 아닌 곳이 없다.
그 말이 진실임을 다시한번 느끼면서
난
깊어가는 눈내리는 초봄의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 날과 그때.
늘 변화없는 영적 평안함이 유지되기를 기원하시는 게
그 날과 때를
레마로 주신 오늘 묵상의 포인트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이제 불가능한 바램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나에게 온다.
이전에는 어찌나 생각이 폭주를 했던지
그런 평온이 나에게 올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
내 죄,
내 악함,
내 어리석음
내 실수
내 상처...
그 어떤 것이든 주님이 나에게 주실
'그날과 그때를 맞이할 자격'에 대하여서는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더 이상의 죄가 날 붙잡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을 마주 볼때
더욱 기쁘게 마중 나갈 자격이 되지 않겠던가?
하지만 늘 고백이지만
나 혼자는 아직 되지를 않는다.
주님이 도우셔야 한다.
주님이 도우시기 위해서는
난 그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난 깨달아 가고 있다.
실수를 통해
죄지음을 통해서도 다시금 살아 움직인다.
난 흐른다.
주님이 내 속에서 흘러 흐르셔
성령의 물줄기가 내 속
내 영혼을 온전히 잡으시면
내 영혼에는 '생명의 폭주'를 경험하게 될 것이고
더 이상 '죄의 욕구',
그것이 비록 내 욕정이던
내 죄의 갈구이던
상처의 흔적이던 아무 상관없는
그때가 오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게 될 것이다.
적용
1. 그 날과 그 때를 묵상한다.
2. 내 죄에 대하여 묵상한다.
되풀이 되는 죄.
그 되풀이를 멈출 수 있기 위해 기도와 간구로 아뢸 수 밖에 없다.
3. 감사한다.
그래도 날 버리시지 않을 것을 믿게 되어 감사한다.
더 나아질 때를 믿게 되어 감사하다.
상처에 의한 것은 죄가 아닐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함이 감사하다.
4. 중보한다.
나로 인하여 고통겪을 자들,
내 혀로 인해서 아플 자들,
내 눈으로 인하여 아파할 자들을 위하여
십자가 앞에 같이 데리고 나가듯
중보한다.
5. 기도한다.
기도함이 살 길이다.
주님 만이 답이다.
6. 성경 여덟장 읽겠다.
주님...
7. 환우의 되풀이 하는 하소연을 듣겠다.
그들의 어이없는 넋두리도 들어 주겠다.
오늘 하루는 최선을 다해 착하겠다.
8. 주님 오실 때 가지면 안될 '죄성'을
없애주시길 기도한다.
기도
주님
어찌하여 이렇게도 되풀이 되풀이
또 똑같은 곳에서 넘어지길
수없이 하게 되는지요.
다람쥐가 도는 쳇바퀴에 걸린듯합니다.
주님 오실 그 날에
과연 이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갈 수 없을것을 압니다.
그 날과 그 때.
그것에 대하여 주님 오늘 말씀하심은
그것이 질타라기보다
희망의 예언이고
그리하길 바라시는 지도의 언어심을
전 깨닫고 있습니다.
주님.
종말이 얼마나 무서운지요.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
늘 주님오실 그날을 사는 듯 살게 하소서.
조심하게 하시고
신중하게 하도록 도우소서.
되풀이 되는 죄로 인하여
더 이상의 에너지는 깍이지 않도록 도우소서.
그리하시기 위해서
절 도우소서.
절 만지소서.
저에게 힘주시고 이제는 깨달아 버릴 수 있도록 하소서.
이해하고 능력을 주소서.
죄에 허덕이는 자들을 어찌 말로 도울수 있게 하소서.
주여
간절히 소원합니다.
간절히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님 곁으로 (펌)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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