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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와 그 날을 위해 (마 24:36-44 )

주하인 2010. 3. 18. 09:18

제 24 장 ( Chapter 24, Matthew )

 

 

내릴 때가 되면

누를 수 있는

버스 손잡이

 

이제 내 속에서

요동치던

그 죄된 속성들도

이제

주님오실 그날을 위해

멈출 수 있길

간절히 원한다

 

이제

내게서 내리거라

이 악한 생각들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버튼 누르며 명한다

^^*

 

 

 


36.  그러나 그 과 그 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 날, 날짜

그 때 , 즈음


 날과 때를 어찌 알겠는가?

소수의 어떤 사람들은

그 날과 때를 아는 듯이

비 성경적으로 날을 정해놓고

세상 일을 포기하고까지

날과 때만 기다리다가 혼쭐이 난 경험들이 있다.

그들을 ' 종말론자'들이라 한다.

 

그들은 열심은 있되 지혜와 주님 이끄심에 순종함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과 반대로 생각하면 된다.

 그 날과

그 때는 모른다.

하지만 그 날과 때는 잊지 않고

세상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주님의 때와 날을 신경을 써서 살아야 한다.

 늘 주님 앞에 있는 나.

늘 주님 오실 때.

그 즈음을 신경을 쓰다보면

그 날은 반드시 올 것이고

그 날이 오면

주님의 위로가 있을 것 아니던가?

 즉,

'때는 늘 인식하되

날은 주님께 맡긴다'.

이것이 옳은 종말론적 삶의 태도이다.

 


37.  노아의 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노아 때도 그랬다

때를 아무리 말해도

때에 대하여 신경 쓰지 않고 살다가

'날'에 닥쳐서 모두 죽었다.


  
40.  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때는

깨어 있는 자에게만 해당한다.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그 때에 깨어 있는 자들 만이

그 날에 주의 임하심을 보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에 인자가 오리라
 그 때와 그 날.

이제 주님 오실 때가 다 되지 않았던가?

예비하고 있어야 하지 않는가?

깨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예수님 믿고

그 믿음의 시간이 늘어가며

조금씩 왜 믿는 자들이

주님을 찾을 수 밖에 없는가

세상의 그 발전하는 과학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종교, 영이라는 영역,

미지의 영역에 점차로 더 매달리게 되는가

어쩌면 그러한 현상이 나 주하인에게도

발생하는가

매일 하루에도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고

또 넘어지고

며칠 간을 주님이 안계신 것 같이 살다가

다시 일어서고.....

그러다가 점차로 넘어지고 일어서는 빈도가 줄어들면서

내 영적 두다리의 힘이 생기면서

난 깨달아 갔다.

' 아 주님은 살아 계신다.

 틀림없이 살아 계신다. '

그것은 너무나도 믿는 자로서 당연한 생각이지만

내 말하는 저런 표현은 생각을 넘어서는,

모태로 부터 받은 당연한 개념이 아닌

'확신'의 그것을 이야기 한다.

그것은 내 불신의 삶,

이전에 예수님을 모르면서 살아온

수십년의 삶 속에서 체득되어진

내 경험의 판단을 넘어서는

어떠한 것이 확실히 존재함을

이제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주님은 내 경험되어진 습관과는

너무도 다른 현상의 것을 나에게 체험시키면서

당신의 살아계심을 나에게 넌지시 알아듣게 하시고

그분이 임재하시면

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으로

영혼이 절절히 끓게 되는 현상들이 인식되어지고

그 인식의 시간이

팥죽 끓듯한 내 감각의 장난이라면

단지 몇회의 충동적 착각이겠지만

수도없이 되풀이 되면서

점차로 강해지고

점차로 오래되며 날 이끌어가시는 게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런 것이다.

월요일 아버지 학교의 체험을 예로 들었지만

수개월 만에 머리가 곤죽 박죽되고

실패로 깊이 좌절된 영혼을 가지고

억지로 스텝모임에 나가서

찬양의 은혜가 없으면 - 솔직히 내 감각에 뜨거움이 인식이 안되면 - 늘 찬양 자체가

막히던 경험을 넘어서서

그 분은 내 기도 부터 시작하여

찬양을 끝없이 뜨겁게 만드시고

내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는

'은혜로왔다'는 소리를 듣게 되고

그 소리가 이전 같으면

묘한 비틀림으로 인식되었을 부끄러운 감정이 들었을 일이

자연스럽게 인식되고

내 지은 죄와는 아무 상관없는 은혜가

내 영혼에 잔잔히 강하게 오래 남는 체험을 하고

그 것을 통하여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이 어지러운 삶의 왜곡이

그냥 견딜 만하게

마치 '그날이 감해질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내 삶속에서 인식되고

진짜 주님이 오실 종말의 그날에도

이같은 든든함, 성령의 붙드심이 날 붙드셔서

견딜만도 하겠구나 하는

말씀이 하나하나 인식되어 가게 되는 현상이 나오고

그것은 또다시

내 영혼에 순작용을 일으켜

말씀 만이 살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고

다시 은혜가 현상에 상관없이 가중되게 되는

그런 체험을 겪게 되어 오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나에게는 건너가야 할 장애물이 있다.

큰 장애물.

누구에게도 말 하지 못하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나의 인생을 크게 누르고 있는 것.

이제야 정확히 그를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는 개념.

이것은 나로 하여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데 힘이 들게 하여

가끔 가끔 나의 영혼의 바짓가랑이를 붙드는 것 같다.

 

 오늘 그 '날'과 그 '때'에 대하여 묵상하고 있다

그날과 그때가 올 때

난 주님을 어찌 마주할 수 있을까?

주님 구름타시고 영광 중에 오실 때

나는 과연 요새 겪고 있는 흔들림을 가지지 않고

은혜 충만할 때 하는 것처럼

두손 번쩍 들고

'주여 어서오서서'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요

 이 어려운 삶을 이제 거둬 주소서' 하고 기뻐 소리칠 수 있는가?

지금 주님의 은혜가 있을 때는

가슴 한구석에서 위와 같은 상상만 해도

눈물이 날 것같은 움직임이

따사롭게 동하고 있지만

과연 내 죄악의 순간에 있던 그때에 오신다면

난 머리 콱 조아리고 눈도 들지 못하고

깊은 좌절감에 빠져 있고 있진 않을까?

 

그렇다면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그 날과 그 때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장애물.

이 장애물이 싸이클릭하게 날 잡지 않도록

이제 정결화된 영혼으로

내 영혼의 메카니즘이

'상처'의 흔적이 더 이상 작용되지 않도록 하는

그런 상황의 그 때를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 아니던가?

 

 

3월 중순에 오는

눈치고는

참으로 많은 양이 내렸습니다

 

기도원의

깊은 영성은

그 밤을

차분히 만들었지만

이로 인하여

춥고 어두운 분들이

더욱 곤란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평강 가운데 거하는

주하인의

안심하며 내쉬는

기쁨의 숨결이

느껴지시는 지요^^* 

 

 어제 기도원에 갔다.

수요예배 대신

수영장에 갔다가 나오면 늦으니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마음은 누르고

반은 기대하는 습관이 들어가며 갔다.

눈.

참으로 많이 온다.

마음이 푸근하다.

어둡고 차가울 것이

따사롭고 분위기 있어 보임은

내 영혼이 주님의

내 영적 상태와는 상관없는 '은혜'로 그리하리라.

성령이 인도하시는 마음이시리라.

 성전에 앉았다.

참 많은 깨달음이 온다.

갈멜산기도원.

집 10분 거리의 이곳은

직장인 병원

근처의 우리 교회

내 집 안마당 같은 예술공원.

그 안에 있는 이 기도원이

주님이 날 사랑하시고 보호하시기 위한

내 생활 반경으로 만들어 주신 것 같아

너무도 축복받은 자 같은 마음이 들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철저한 주님의 보호.

 눈을 들어 주위를 보면

어디하나 주님의 사랑이 아닌 곳이 없다.

그 말이 진실임을 다시한번 느끼면서

깊어가는 눈내리는 초봄의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 날과 그때.

늘 변화없는 영적 평안함이 유지되기를 기원하시는 게

그 날과 때를

레마로 주신 오늘 묵상의 포인트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이제 불가능한 바램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나에게 온다.

 이전에는 어찌나 생각이 폭주를 했던지

그런 평온이 나에게 올 것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

내 죄,

내 악함,

내 어리석음

내 실수

내 상처...

그 어떤 것이든 주님이 나에게 주실

'그날과 그때를 맞이할 자격'에 대하여서는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더 이상의 죄가 날 붙잡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을 마주 볼때

더욱 기쁘게 마중 나갈 자격이 되지 않겠던가?

하지만 늘 고백이지만

나 혼자는 아직 되지를 않는다.

주님이 도우셔야 한다.

주님이 도우시기 위해서는

난 그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난 깨달아 가고 있다.

실수를 통해

죄지음을 통해서도 다시금 살아 움직인다.

난 흐른다.

주님이 내 속에서 흘러 흐르셔

성령의 물줄기가 내 속

내 영혼을 온전히 잡으시면

내 영혼에는 '생명의 폭주'를 경험하게 될 것이고

더 이상 '죄의 욕구',

그것이 비록 내 욕정이던

내 죄의 갈구이던

상처의 흔적이던 아무 상관없는

그때가 오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오게 될 것이다.

 

 

 

적용

1.  그 날과 그 때를 묵상한다.

 

2. 내 죄에 대하여 묵상한다.

  되풀이 되는 죄.

 그 되풀이를 멈출 수 있기 위해 기도와 간구로 아뢸 수 밖에 없다.

 

3. 감사한다.

 그래도 날 버리시지 않을 것을 믿게 되어 감사한다.

 더 나아질 때를 믿게 되어 감사하다.

 상처에 의한 것은 죄가 아닐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함이 감사하다.

 

4. 중보한다.

 나로 인하여 고통겪을 자들,

내 혀로 인해서 아플 자들,

내 눈으로 인하여 아파할 자들을 위하여

십자가 앞에 같이 데리고 나가듯

중보한다.

 

5. 기도한다.

 기도함이 살 길이다.

 주님 만이 답이다.

 

6. 성경 여덟장 읽겠다.

 주님...

 

7. 환우의 되풀이 하는 하소연을 듣겠다.

 그들의 어이없는 넋두리도 들어 주겠다.

 오늘 하루는 최선을 다해 착하겠다.

 

8.  주님 오실 때 가지면 안될 '죄성'을

 없애주시길 기도한다.

 

 

 

 

기도

 

주님

어찌하여 이렇게도 되풀이 되풀이

또 똑같은 곳에서 넘어지길

수없이 하게 되는지요.

다람쥐가 도는 쳇바퀴에 걸린듯합니다.

주님 오실 그 날에

과연 이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갈 수 없을것을 압니다.

그 날과 그 때.

그것에 대하여 주님 오늘 말씀하심은

그것이 질타라기보다

희망의 예언이고

그리하길 바라시는 지도의 언어심을

전 깨닫고 있습니다.

주님.

종말이 얼마나 무서운지요.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

늘 주님오실 그날을 사는 듯 살게 하소서.

조심하게 하시고

신중하게 하도록 도우소서.

되풀이 되는 죄로 인하여

더 이상의 에너지는 깍이지 않도록 도우소서.

그리하시기 위해서

절 도우소서.

절 만지소서.

저에게 힘주시고 이제는 깨달아 버릴 수 있도록 하소서.

이해하고 능력을 주소서.

죄에 허덕이는 자들을 어찌 말로 도울수 있게 하소서.

주여

간절히 소원합니다.

간절히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주님 곁으로 (펌)

첨부이미지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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