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그날이 와도(마 24:15-28) 본문
제 24 장 ( Chapter 24, Matthew )
겨울이 아니어도
눈은 내리고
계절이 아니어도
깊은 추위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해 진지
오래지 않아
밤이 이토록 깊어질 수도 있고
얼마 오지 않았던
눈이
이토록 차가운
눈 꽃으로
피어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밤이 깊어지니
가로등은 더욱 밝게 보이고
쌓인 눈이 많아지니
어두움은 하얌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날은
결국 오고야 말겠지만
깨어 있는 우리에게는
고통은
어차피 감해질 것을
우린 알고 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성경에는
이해되지 않는 구절들이 가끔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내 상황을 거의 맞게 인도하시지만
가끔 이 어리석은 자는
깨닫지 못할 때가 있다
오늘 묵상구절.
어제에 이어 '종말'에 대한 것이라
무슨 말씀인지는 어렴풋이 알겠지만
팍~하고 깨달아짐이 오질 않는다.
'읽는 자는 깨달은 진저'
읽는 것
다 깨달아지면 좋겠다 .
깨달아지면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으면 좋겠다.
바뀐 것 더 이상 내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대리석에 글 새긴 것 처럼
내 안에 뿌리박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20.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겨울.
춥고 힘들고 궁핍한 시기.
안식일
주님 안에서 쉬어야 할 날.
너무 힘들거나
주님의 일에만 신경써야할 날에
종말의 힘듦이 다가와
더 어려워지거나
주님의 일에
주님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게 되길 기도해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기도.
기도가 부족하니 넘어지지 않던가?
기도가 부족한 자들의
영혼의 겨울은
길어질 수 밖에 없다.
그들은 구원을 받았더라도
영적인 겨울을 지나가게 될 수 밖에 없다.
산다는 것.
그리 녹녹하지 않다.
아니다.
오히려 살을 베는 동장군의 칼날 같은 바람을
맨 살로 맞는 것 같이 고통이다.
내 인생.
더럽게도 - 죄송 ^^;;- 어렵고 힘들었다 .
살기 싫은 나날의 연속이었던 자가
주님의 안식안에서 거하면서
겨우 숨통을 돌리고
그 분의 놀라운 평안 안에 안식하려 하다가도
내 변하지 않는 어이없는 내면은
자주 날 붙들어 바닥으로 내 팽개쳐지도록 할 때가 있다.
안식일.
그 거룩한 날은 더욱 거룩히 보내야 함에도
안식일을 '일요일'로 보내다가
종말의 아픔을 맛볼 때가 없지 않다.
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아픔.
개인적 종말도 아프다.
'돌위에 돌하나도 남지 않는다'시던
어제의 묵상이 절묘한 표현이라 생각이 든다.
철저한 파괴의 아픔.
처절한 상실의 고통
바닥을 치는 외로움의 쓰림....
그것이 '종말'이 아니던가?
나.
개인적 종말을 경험하고 있다.
늘 그렇게 살던 자가
한동안 주님의 은혜 가운데
편안하게 살다가
또.......................
이럴 때 몸부림치고
모든 것을 다 Withold한 상태로 멍하니 지냈었다.
'그러면 그렇지...
나 같은................'
그러나, 그럼에도 그렇지 않았다.
어제 저녁.
월요일 아버지 학교 스텝 모임.
'이래서 가겠나.. '했다.
가서 찬양하고 중보기도하고
아무런 의욕도 없이
자격도 없이
가증스러운.. 나.. 같은 자가.. 하는 생각이
날 잡으려 한다.
종말.
이 외로움을 거기간다고.......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갔다.
그러니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거기는 중보의 장소다.
주님이 좋아하신다.
주님은 내 생각과 하등 상관없이
당신의 뜻대로 날 이끄시길 원하신다.
그러다 보면 무엇인가 달라질 것이다.
그게 순종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갔다.
가니 '찬양'리더 하시는 형제분이 안보인다.
멍한 머리로 동갑내기 가정사역 전도사님께
'내가 인도할까요' 하고
전혀 계산에 없던 소리를 발하고 말았다.
그러니 하라신다.
그래서 그냥 '기타' 준비하고 조율하고
찬양집 가져다가 보면대에 올려놓고
마이크를 집어다가 마이크 지지대에 올려 놓고
잭을 기타에 연결하여 앰프 볼륨 조절했다.
악보를 보면서 몇곡 흥얼 거리며 선곡했다.
은혜가 없거나
내 스스로 정결치 않으면
찬양의 무대에 선다는 것은
'주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이중적인 나'의 모습이라 생각했던 것이
이전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들을 내려놓았다.
그냥 '은혜'가 있는 곳은 어디든 가고
억지로는 아니되
상황이 허락이 되면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설 수도 있고
그것은 무엇인가 주님이 나에게 가르치시길 원하실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개념으로 내 생각이 바뀌었기에 그리했다.
찬양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다.
그 리듬에 날 맡기고
그 찬양을 작곡하신 분의 간절한
정제된 기도의 언어와
그를 통해 만들어진 찬양기도를
수많은 사람들이 불러가며 공감하고
그 공감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과정에서
허락되어지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한 것들의 모음집이 악보집이고
그 악보 중의 나에게 '임팩트'가 느껴지는
그 어떤 것을 그냥 가사에 집중하여
기도하는 것이 '찬양'이며
찬양의 곡의 흐름은
그 기도를 영혼 속의 흐름에 맞추어 가게 하는 것이다.
그 기도 중에 내가 회개하게 되면 회개하고
그리하고 주님이 받아 주시면
나에겐 은혜로 느껴질 것이다.
축복이면 축복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영광의 노래면 노래고
내 심사를 주님 앞에서 받들어 올리는 노래이면
주님이 그대로 받아주실 것이다... 라는 것을
난 알고 있다.
그래서 아버지 학교 찬양을 인도했다.
많은 분이 기뻐하신다.
10시 넘어 집에 오려는 데
동갑내기 전도사님이 내곁으로 다가와
'집사님과 난 통해요.
집사님이 찬양으로 은혜를 뿌려주시니
설교도 쉬워 졌어요.'
난 그 분의 설교에 은혜를 받았었다.
그날..
그 분은 하박국으로 설교를 하셨다.
'끝까지 인내하면... '이라는 요지다.
'여기까지 인내했는데.. '하는 선지자에게
주님은 ' 조금 더 있으면 더 큰 환란이.. '라 하시니
마치 '일제'시대 해방을 맞은 우리 민족에게
' 곧 6. 25가 있을 것이다'라 예언하시면
그 얼마나 견디기 힘든 말씀이시겠냐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의 메시지는 희망이시었던 것이다.
끝까지 견디면..
끝까지 견딘다는 것은
종말의 아픔만큼 아픔을 이겨내는 것이다.
나.
내 잘못으로 개인적 종말 같은 고난을 겪지만
깨어 있으면.. 이란 희망이 든다.
오늘 주님이 그날을 '감해주시리라'하신다.
감한다.
이전에 덜 익은 자였을 때,
내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찬양도
기도도
말씀 묵상도 내 마음대로 접곤 했다.
물론 아버지 학교 같은 모임도 안 갔었다.
하지만, 조금은 더 자연스럽게 된다.
그러니 똑같은 내 죄에 의한 종말적 곤란이지만
덜 죄스럽고
덜 고통스럽고
조금은 더 희망이 생긴다.
이것이야 말로
그날을 감해 주시라라는 것 아닌가?
이제 곧
지구적 종말의 그날이 오고야 말 것임은
누구도 믿으려 안하지만
그 누구도 마지막 날이 가까워 감을
솔직히 부인할 수 없는 날들이 되어가고 있다.
자원고갈.
인간 들의 타락.
기후.
잦은 지진
쓰나미
암.. 등의 세기말적 병의 발발.
문명이기의 극도의 발달.
....
성경에 나오는 마지막 징후들이 전세계 적으로
폭팔적으로 나오고 있는 지금이
종말적 세상이 아니던가?
진짜로?
이 날에
믿는 우리,
그 중에 '기도하는 ' 자,
'깨어 있는 자'에게
그날의 고통을 감해주신다 하니 얼마나 소망이 있는가?
나.
비록 힘들지만
견딜만하고
그 견딜만한 이유가
주님의 은혜임을
아주 조금만 생각해도 아주 쉽게 알 수 있을
오늘.
그 날이 감해질 것은 더더욱 쉽게 추론할 수 있다.
이제 기도해야 한다.
읽고 깨달을 진저.. 깨달아야 한다.
주님의 은혜 가운데
내 영혼 깊숙이 받아 들여야 한다.
어렵지만
깨달음이 감사한 하루하루다.
적용
1. 성경 여덟장 읽겠다.
2. 힘든 날이지만 힘들어 하지 않겠다.
주님이 붙드심을 느낀다.
죄인이지만 죄의 정죄는 주님께 달렸다.
난 그냥 그 분 앞에 서 있겠다.
회개도 주님이 시키실 것을 믿는다.
3. 가만히 있겠다.
가만히..
가만히..
4. 깨달을진저.
깨달음을 주시오소서.
5. 기도하라.
기도
주님.
저 죄인입니다.
살을 에는 듯 죄책감이 몰려 오려 합니다.
그리고 불쌍한 마음도
외로움도 다가오려 합니다.
마치 내 주위에 돌 위에 남은 돌 하나 없이
모조리 사라진듯 괴로워 지려 하기도 합니다.
주님이 날 모르신다 하실까
두렵기가 한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냥 있습니다.
주님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하소연하고만 싶지만
주님이 받아 주실까 하는 두려움도 없습니다.
그냥 주님 께 모든판단과 인도하심 맡깁니다.
주여 .
절 용서하시고 붙들어 주소서.
그날을 감해주신다는 하나님
제 죄를 감해주시고
제 고난을 조금은 감해주시고
더 이상 되풀이 되지 않는 깨끗함으로 빠르게 설 수 있도록
그 기다리는 시간을 감하소서.
저의 영혼이 이제 어두운 겨울을 지나
새로운 봄이 유지가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신약 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때와 그 날을 위해 (마 24:36-44 ) (0) | 2010.03.18 |
---|---|
택하심 받은 자들에게(마24:29-35) (0) | 2010.03.17 |
병아리 처럼(마 23:24- ) (0) | 2010.03.14 |
안으로 부터 (마 23:23-28) (0) | 2010.03.13 |
진실을 보는 눈(마 23:13- 22) (0) | 2010.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