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그냥 일어나다[행4:19-28] 본문

신약 QT

그냥 일어나다[행4:19-28]

주하인 2018. 2. 6. 09:19



19.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머리에 돌로 찍혀 정신을 잃고 쓰러져 밖에 버려질 만큼 충격을 받으신

사도 바울께서



20.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제자들이 둘러서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냥 '일어나서' 갔다. ^^;

 


21.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그리고는 정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복음을 전하는데 매진했다.

 아..

이후에도

이 구절에도

머리에 돌로 찍힌 후유증으로 고생했을 것을 의심할

하등의 뉘앙스가 없다 ㅜ.ㅜ;;



22.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마음 한구석에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의 위대함과 더불어

그 일의 감당키 어려웠던 심정을

한켠 내 비춘다.

"마음을 굳게 하여'라...

그리고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한다...

행간 행간, 단어 단어 하나 마다

그의 조심스러운.. .그러면서 너무도 힘들었던 과정이 읽히지 않는가?

그렇다.

그가 뭐 로봇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복음 전파 로봇?'

그도 사람인 이상

고통과 두려움 뿐 아니라..

(나 같으면 ..'어찌 사람을 돌로 .. 이런..이런..$%^&*()_..'하는 미움과 원망의 생각으로 또한.. ㅠ.ㅠ;; )

어렵고 힘들었겠지만

전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그의 완전한 성령충만함으로 인하여

그의 아픔이 극복이 되고

그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성령체험을 극적으로 한 자들, 중생한 자 들의 공통점인

고난이 유익인.. 그 것을

그 영혼이 절절히 알기 때문이지... 어찌.. 인간의 능력으로 그랬을 수 있을 까 싶다.


그러면서

그 절박한 두려움과 심한 고통에서 그를 견디게 하여 주심,

그리고 신속히 회복하게 하심에 대하여

나름 '그럴 수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같이 느끼게 할 수 있음은

어느새 나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있는 증거인듯 해

한편으로 대견하기도 하다 .

이런 것이다. 

내 아주 어릴 적.. 미련한 것은 내 천성인지라

동네 친구들과 동네형이 이끌던 우마차(牛馬車)를 타고 가다가

불현듯 눈에 비친 구슬을 발견하고는

아무생각없이 그 밑으로 뛰어 들어가 구슬을 집어드는 순간

괴성을 지르며 날 붙들면서 병원으로 옮기는 '형'의 손길을 느꼇다.

그냥.. 엉덩이 밑이 뜨근 하다는 것만 느꼈는데

병원에서 내 왼쪽 대퇴골절이라 하면서 기브스를 해주는데

그제야 아픔을 느낄 정도였던.. ㅠ.ㅠ;;

 아내의 머리수술.. 깊은 어려움이면서도

마음 한켠에 깊은 잔잔함과 거의 강제적인듯한 (^^;) 평온..

얼마전의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겪은 고난...

그 과정에서 '육신, 마음, 영'의 전적인 평화 (어릴 적은 하나님의 전적인 미리 구원하심으로 이해한다. )와

고통마져 감해버리심의 체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 그것은 다시 생각하면

앞으로도 있을 '종말론적 상황' 조차

믿는 자들에게는 '그날을 감해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진다는 이야기기도하여

한편으로 든든해진다.


그리고..

실은 오늘 말씀으로 내게 다가오시는 부분은

'미움'.. 부분이다.

두려움 부분이다.

그렇게 자신을 돌로 찍고 내다 버리고... (사람을.. 어찌.. ㅠ.ㅠ;;) 하는

그들 유대인들에 대한 절절한 미움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도 바욺님은

한톨의 미움을 보이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들을 '복음'으로 이끌기 위해

더욱 열심히.. 아무일도 없다는 듯

자신과 제자들을 독려한다 .

"마음을 굳게하고

 이 믿음에 머무르라"


이거.

중요한 '복음' 전파에 차질이 있을까 두려워 하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그 마음을 들게 하시고

그러한 선후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그러하신 절절한 임재를 느끼게 한다.

거기에

그 후에도 '미움'이 올라오지 못하게 하시는

온전한 치료자 하나님을 느끼게 한다

그렇게 변하는 '모델' , 모범자 사도 바울님을 보게 하신다.

 나도

그리 될 개연성을 느끼고

그리되길 선택하고 기도 한다.

이 '원망 많고 욱하는 욱쟁이' 주하인이 그렇다.


주여.

지금 ..

생각만 해도 '욱'하고 올라오려 하는 것을 느낍니다.

말씀의 이 구절을 지나면서

바울님 대신 나를 집어 넣어

저런 버려짐을 당햇을 때 과연 나는 어찌 행동하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그 미움의 강도,

상대적으로 커지는 두려움의 강도와

아픔에 대한 고심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데도 '대범'한 사도바울님의 그것..

그 담담하고 담대한 모습이..

절대로 인간의 혼자 결심,

그 만의 대인의 풍모로만은 설명되지 않는 부분인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그리 따라가게 되는 인간 바울님의 '하모니'를 보는 듯 해

앞으로

주하인 .. 제가 따라가야할 모델을 보는 듯해

마음 한켠이 든든하기는 합니다.


주여.

참.. 안되는 이 '울컥'과' 욱'의 깊은 부분에 있는

하나님을 적대하려는 어둠의 세력이

제게 힘을 쓰지 못하게 하소서.


매사에 '일어나게 하소서.'

또 일어나

또 부활한 삶을 살게 하소서.


주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사오니

저도 그리되게 하소서.

내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함을 알고

주께서 도우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을 아오니 주여...

저를 그리되게 하소서.

오늘.. 그리되게하소서.


또 일어나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하루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기도 하였습니다.

아멘






'신약 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들과 말씀[행15:22-35]  (0) 2018.02.09
오늘은 듣자 [행15:12-21]  (0) 2018.02.08
도망도 기뻐할 수 있는 삶[행4:1-18]  (0) 2018.02.05
이 땅 기쁨 하늘 영생[행13:44-52]  (0) 2018.02.04
부활의 정서[행13:32-43]  (0) 2018.02.03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