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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통하는 원리 (고전 7:1-7 ) 본문

신약 QT

관통하는 원리 (고전 7:1-7 )

주하인 2008. 7. 11. 10:34

제 7 장 ( Chapter 7, 1 Corinthians )

 

 

 08.06.06  샘안양 병원 세미나실

 선교사 건강학교에서...

 그들에게 그 짧은 시간

 산부인과의 모든 것을 전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원리에 대한 것을 설명하기로 맘 먹었다.

 여성의 해부구조.

 그리고

 질병의 종류와 원인

 대처...

 짧은 시간에 가르치고 권면하니

 좋다는 반응들이셨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원리를 가르치시고

 옳게 살아오길 권면하신다.

  사랑하는 주님..

 화이팅 !

 

 


1.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가장 좋지만...은

가장 잘 준행할 준비가 되어서

최선을 다할 자 들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가장 나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수도사처럼 혼자 살면

영적으로 수지 맞을 수도 있으나

누구나 그럴 수가 있는가?


 
2.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안되는 자들은

결혼을 해야 한다.

음란의 영은 너무도 강하여

평범한 자들로서 이를 이겨낼 방도가 없다.

그러기에 결혼해서라도

이길 수 있으면 이겨야 한다.


 
3.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결혼하되

서로 최선을 다하여 

의무를 다해야 한다

 

 부부의 의무.

 
4.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5.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렇듯

최선이 아닌 차선의 방책을 마련한 이유에 대하여

확실히 천명을 하신다.

 

 


6.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주님은

거의 

특별한 경우가 아니시면

명령을 하시지 않는다.

대부분 '권면'이시다.

그것은 다양한 사람들의 특성에

가장 상황에 선한 방법을 택하길 바라시는 

사랑하는 마음이어서 그러시다.

 

 특별히

누가 명령하거나

틀을 짜서 하라 시키면

죽도록 싫어진다. ㅎㅎ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걸?

주님은

그것 마져 아신다.

그 분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권면을 하시며

우리의 

주님 말씀 안에서의

자유로운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를 지켜보시길 원하신다.

 

 하지만

세상은 너무도

주님의 선하신 의중을 넘어서는

선택을 하고

말씀에 대한 경외는 넘어서라도

무시하는 지경에 와

소돔과 고모라의 수준에 와 있기에

주님은 당혹스러우신 것이시다.

 

 


 
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오늘 말씀의 요지가

여기에 다 들어 있다.

 

 사도 바울이 홀로 산 것처럼

우리도 모두 그리 했으면 좋겠다 하신다.

그것은

영적 경건 생활을 추구함이

우리가 나갈 가장 선한 방향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각기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있다고 한다.

 

 이 말씀은

인간의  욕구에 대하여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이시고 계시는 것이다.

생존의 욕구

안전의 욕구

힘의 욕구...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어

그들 모두에게

한가지 요구를 내림은

어떤 사람에게는 심한 고통이 될 수도

다른 사람에게는 똑같은 주문이

굉장한 열정이 될 수도 있음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은사가 다르단 말씀에서 느껴지는

또다른 뉘앙스는 이렇다.

그 분은 그러시기에

각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그들을 그들의 상황에 맞추어 사랑하실 수 있다는

하나님의 자기표현 처럼 느껴진다.

 즉, 자기 뜻에 맞지 않고

어떤 원칙에 들어 맞지 않는 자들을

경멸하고 멸시하는 것은

인간의 것이지

하나님의 원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분의 대원칙은  은사에 따라 개별화된 '사랑'이시다.

보라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라고 나오지 않는가?

 어떤 사람은 철저히 수도자 처럼 영적으로만 달리되

다른 자는 결혼도 하고 그 안에서도

주님의 말씀대로 열심히 산다.

어느 것이 옳은가?

 

 주님이 원하시는 가장 좁고 직통길은

영적으로만 가는 길이지만

사람마다

삶이 다르고

은사가 다르고

상황이 다른데

모두 한 가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시다.

 

그러함에도

그 분 하나님은

궁극의 방향을 '사도 바울'의 모습을 통하여

어제의 그 기조로

부드럽게 말씀하신다.

 부드럽지만

그 말씀을 받는 우리는

금과 옥조로 받아야 한다.

그것이

주님이 예비하신 모든 영적운용 원리에서

심령천국의 평강 가운데 살다가

천국의 주님 보좌 곁에 영생을 누릴 기회가 될 것이다.

 

 난

오랜 시간  강골 괴팍 강팍 강력 울트라 불신자였었다.

그 이유가

내 맘에 들지 않는

기독교인들의 어리석은 - 매사에 분석해보면  다 엉터리 였었다.ㅎㅎ - 모습을 보며

그들이 믿는 예수님은 엉터리 환상이라고

단정을 내렸었다.

그러다가

지금 다니는 교단의 '수도자적' 분위기와 말씀을

아내의 베게 송사로 3년을 듣고야

마음이 누그러졌고

결국

성령님의 강권적 선택으로

꼬꾸라 졌다.

 

오랫동안 열심을 내었다.

수도자적 분위기란

영적 추구가 강력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러기에

금식

정확한 예배시간

금욕

........등이 조금 강한 분위기고

그것은 사도 바울이

오늘 말씀하시는

혼자사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을

혼자사는 게 좋다고 강조하는 (강요는 아니지만)

분위기의 교회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갈급했던 나는

내 게으른 성정에도 불구하고

첫 사랑의 놀라운 은혜와

깨끗한 설교와 모습으로 보여 주시는

목회자님을 보면서

정말 열심으로 다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갈급해졌다.

 

꼭,

저 모습만도 아닌데...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두가 '수도자'의 그것으로 살 수는 없는데..

하지만

그 깨끗함과 맑음에서 오는

영적충만감을 부인하기는 어렵지만

따라 할 수 없는 자의 한계에서 오는

좌절감은

자꾸만 날 당황시켰다.

죄책감이 커져갔다.

그것은 또 당황스러운 현상이었다.

출애굽이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성장에 비춘

당연한 과정이라지만

어딘가 모르게

이것은

인간의 전인적 원리에 어긋난 다는 생각을

금할길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타 교회를 보면 어딘가 모를

나른하고 기복적인 분위기는

더더욱 아닐 듯 싶었다.

 

 고린도 교회에서

주님의 은혜를 듬뿍 받으면서도

고린도라는 도시의

그 엄청난 음란의 유혹 앞에서 사는

교인들의 혼란이 이런 것일 수 있겠구나.. 하면서

이해가 간다.

 

 그러기에

바울 선생께서는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라는 말씀이 끄덕이게 한다 .

 

비록 음란이라는 예로써

쉽게 이해가 가도록 하였지만

주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의 어려움이

이처럼 몇마디로 극명하게 풀리게 할 수 있을까?

 

 내가 그랬다.

수년의 열심 끝에

수년의 혼란을  겪었으면서도

속으로 몸살을 앓다가 - 비단 나뿐일까?   교회에서 마음앓이 커지는 자들이? - 이제

큐티를  통하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찬양인도를 통하여

내 속이 정리되면서

난 하나의 답을 얻을 수가 있었다.

확정적으로..........

 

사람은 '전인적' 존재이다.

거기에는

영적인 부분도 있고

육신적인 부분도 있으며

둘의 상관관계에 따른 증상인 '마음판'인 혼적 부분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초두에서

인간의 욕구 - 현실요법에서는 다섯 가지 욕구라 한다 -에 대하여 기술했다.

이 욕구에 따라

사람마다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하는 조화로운 믿음의 형태가

이루어 진다면 훨씬 자유로운 믿음의 삶이 되지 않을까?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그러셨다.

말씀으로 권면하시고

치료로 육신을 고치시고

마음이 가난한 자를 위로하셨다.

 

 수도적인 분위기의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옳다.

그길은 사도바울처럼  훨씬 좋은 길이다.

하지만 세상에 살고 있는 분들은

세상의 삶에서

이렇게 살면 된다.

영적으로 치달리는 분들이

세상의 믿는 자들을 부족하다 손가락질 하거나

모두를 자신들의 모습으로 생각하는 것은

또한 편협한 일이며

조금은 세상적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성도들은

또 그들을 향하여

이상하다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작금의 전 분야에서 펼쳐지는

부처 이기주의

촛불시위

.....모두

자신 만이 옳은 분들이

세상에 편만해서가 아닌가?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조금은

넓은 시각으로 보라고 권면하신다.

모두가

주님 안에서

말씀으로 서 있기만 하다면

주님을 앞서지만 않는다는 전제가 된다면

어떤 것이든

옳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우리에게도

그리하길 넌지시 권하신다.

 

 

적용

 

1.  비판을 멈추라

 

2. 교만도 멈추자

 

3. 좌절도 금지다.

 

4. 그냥 따스한 눈으로 보다가

 주님이 말씀하시는 소리를

매일 매일 준행하다가

주님이 원하시는 그림이 보일 때

움직이자.

 교회와 교인들을 이해하겠다.

 

5. 성경 여섯 장 읽겠다.

 

6. 비판을 내려놓자.

 

7. 내 스스로도 수용하겠다.

 

 

 

 

 

기도

 

주님

마음이

음란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로

가벼워집니다.

아니

오히려

조금은 무거워 지는 듯도 싶습니다.

습관처럼 분석하고 비교하고 정죄해오던 삶의 패턴을

하나하나 놓기가 왜그리 힘이 든지요.

놓고 나면 이리도 가벼운 것을 요.

 

주님은 자유입니다.

오늘 특별히 그렇습니다.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저도 그리하고 싶습니다.

사람마다 은사가 다르고

성격과 마음이 다르고 상황이 다른데

내 관점으로 강요함은

주님이 싫어하시는 멍에를 지움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주여

늘 도우소서.

안되는 것

되게 하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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