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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QT

곧(막1:12-20)

주하인 2015. 1. 2. 08:41

부르소서

제가 곧

모든 붙듦 털고

주께 가리다

 

비추소서

주여

제가 곧

두손 들어

주를 찬양하리다

 

이 밝은 마음

이 귀한 기쁨

이 놀라운 감동을

세상향해

기뻐 노래하리다

 

12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곧'

'at once'

즉시.

지체하지 않고.

 

 '무엇 후의 곧'이던가?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사랑하고 기뻐하시는 아들이란 말씀을 듣고

곧.. 이다.

 

그리고는 '성령'께서

전적으로 그를 광야로 '몰아내셨다'

표현이 진해서 그렇지

우리, 성령의 인싸이트를 받은 자들은 안다.

그 하나님, 성령님을 통하신

성령 하나님의 밀림을 받는게 어떤 것인지..

 

비록 우린 예수님처럼

곧 응하지 못하서 이지...

 

오늘 특별히 '피동적' , '타력적' 기독교의 특성에 잘 나타나지며

그 타력적으로 밀려서 광야로 가지만

거기에 '곧'응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전적인 밀리기 위한  선택'이

바탕이 됨을 보여 주고 계시다.

예수님은 양같으시다.

하나님의 말씀이시면 단 일초의 지체함도 없으시다.

 


18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제자들도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랐다.

이것보라.

제자 같은 신앙인들이 되기 위해서는

'곧' 반응하는 선택이 필요하다.

 

그물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문제.

걸리는 생각들.

미련.

고민거리들... 아니던가?

  

20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보라.

여기에서도 '곧'이다.

심지어는  아버지와 모든 재산,권리들도 다 버리고 갔다 .

 

그것을 '곧 ' 버려 두었음은

'예수' ,

그 하나님의 실제적 헌신이신 분의

따르라는 말씀이 현장에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렇다.

부르심에 '곧 ' 응답하기 위해서는

'예수' 님이시나 '제자'로서의 영적 품성이 우선 바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 선천적인 영적 감수성 뿐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모하는 마음' , '깨어 있는 영성'이 아니던가?

그래야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아 볼 수 있다 .

그리고 부르심을 들을 수 잇다.

또한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다.

 

나.

돌아본다 .

걱정되는 부분이 있어왔던 부분이 이것이다

부르실 때 '곧' 응답 못할 것.

왜 이던가?

많은 선한 생각들과 더불어 내 속에는 의심의 생각들도 많았다.

아픔을 , 특별히 말로 인한 상처가 많이 있이 커왔던 자라

많은 부분 생각을 하고 '부정적 '결론에 도달하여

인생이 그리 힘이 많지 없었었다 .

이런 상황에서 어찌 '옳은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기회가 많았을까?

그러나, 점차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총, 성령님의 함께하신 은혜의 시간이 지나면서

말씀으로 생각들이 모여들어

마치 자석 주위의 철가루같은 흐름이 형성이 되어

이제는 '곧'이 가능할 지점까지 가까이 왔다 .

하지만,

곧을 막는 또 다른 문제들도 있다.

세상에 대한 관심과 욕심.. 도 있을 수 있다.

특별히 난 그리 욕심은 없으나

'하고 싶은 것'과 '쉼'에 대한 욕심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부르실 때 '곧' 보다는

잠시 멈칫 할 때가 없지 않을 듯 싶다.

 

 오늘 이 부분.

내 바램이나 욕정이나 자유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조금은 내려놓고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내 안에 조금 더 높여 보는 기회가 되길 바라시는 것 같다.

묵상할 포인트다.

 

그렇다면 이들,

예수님 뿐 아니라

예수님과 그래도 가까운 품성을 지닌 '제자'레벨에 속한 자들이

모두 '곧'을 선택하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그들은 '천국'의 소망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

제자들.

무식한 자들이라서 어쩌면 형상화된 소망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들 안에 흐르는 어떤 소망이 공통되었을 것이고

예수께서는 그것을 알아보셨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부르셨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곧' 따르게 되었을 것이다

 

곧 따르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을 버려야 하는 아픔이 있다 .

아..

아픔보다 더 큰 '성령의 몰아가심'으로 인한

영적 팬터시,

심령천국의 감동이 있을 것을 알아야 한다 .

그들은 이 길이

이 '어부'와 '세상 사람들 속의 파묻힘의 안전감' 보다

훨씬 의미 있음을

예수님의 '오라'는 소리에

금새 깨달았을 것이고

그것은 '아픔'을 넘어서는

'소망'의 소리였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

나.

주하인.

이제 지난해, 12.31까지

거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완벽히 정리 해주셨다.

 

 지난해 돌아보면

가족이 회복되어 한데 뭉치게 하시고

집이 인테리어가 잘되어 만족스럽게 되고

빚을 정리해주시었으며

며칠 남기지 않은 시간에

4개월여를 끌어오던 '직장문제'를 완전히 해결해주셨다.

거기에 12.31, 몇시간 남기지 않고

그동안 킥보드와 자전거로 출퇴근 하며

욕심을 내려 놓았던 차 까지

알고 지내던 아버지 학교 형제님 통해

좋은 것으로 계약하게 까지 되었다

아.

이만큼이면 하나님의 세상적 축복도 많이 받지 않았던가?

 

이제 새해.

첫 묵상.

하나님이 나에게 '곧'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자던가?

버리고 '선교사'로 나가라 시는가?

아니면 나와 무관한 이야기시던가?

아무리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아도

주님은 그런 것을 나에게 바라시는 것은 아닐 것이다 .

그렇다면.. 곧..을 통하여

내게 무엇을 하길 바라시는 것인가?

 

주신 모든 것.

이제 내 육신의 편안함을 통하여

세상에 빠지기 보다

영은 그것과 상관없이 언제든 내려 놓을 수 있을 만큼

욕심을 경계하라시는

하나님의 가르치심이 우선인 듯하다 .

새로운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언제라도 부르시면 털 수 있을 만큼

미련과 욕심을 가벼히 하라는 말씀이시고

성령의 인도하심,

그 드라이브에 나를 맡기기 위해서는

소유와 별개인 영적 가벼움,

쉽지 않겠지만 영적 청빈함을 위하여

더욱 말씀과 기도에 침잠해야 한다는 이야기 이신 듯하다 .

 

새로 출근할 곳이 '미션' 병원은 아니다.

그래서 어쩌면 영적 도전이 지금보다 힘들 수 있다

그럴 수 록 더음 마음을 내려놓고

믿는 자로 자기 부인하며 가야 한다 .

오라시면 가고

버리라시면 그러할 가벼움으로 그래야 한다 .

 

 

주님.

오늘도 주신 말씀

가슴에 잘 새기기를 원하나이다.

이곳.

며칠 남지 않았지만

마무리 잘하길 원합니다.

특별히 오늘

성령을 사모합니다.

곧 .. 순종하는의지.. 마져 주께서 주시옵소서.

성령으로 그리하시고

성령으로 하시는 말씀에

곧 순종하고

밀려다니는

저와 하나님의 앙상블을

이세상에 현실화된 모델로서 보이는

제가 되길 원합니다.

신행일치..

삶과 신앙의 별개가 아닌

삶속에서의 영성,

그 중심에 '주하인' 제가 모델이 되길 원합니다.

이 어이없는 세상에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빛이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시대와 다른

이 시대에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밀림 받은 자의

현실적 변화가 어떠한지

그래서 '영원'이 우리의 영혼에 어떠한 의미인지

부족한 저희들에게

그 안에서 변화하는 절 보고 같이 느끼게 하소서.

 

그래서

조금이라도

답답해 하시는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이

저로 인하여 해결되는 도구가 되길 원합니다.

 

오늘

곧.. 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리하길 선택합니다.

깨닫게 하시고

밀리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 거룩하고 사랑 많으신 이름 받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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