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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한마디 만하셨다 (막15:1~15)

주하인 2007. 4. 4. 08:57

2007-04-04 마가복음 (Mark) 15:1~15:15
 

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2.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3. 대제사장들이 여러가지로 고소하는지라 
 

5.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기이히 여기더라 

( 속에서 끓어도 주님으로 녹이겠다. )

 

 

 분위기는 살벌하다.

 새벽부터,

온 공회가

더불어서 시끌벅적하다.

그리고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즉시' 넘겨주었다.

그 법정에서 '여러가지'로 고소하였다.

 

 표현 하나하나가 그 당시의 분위기가 눈에 보이는 듯 선하다.

만일 이런 상황에서 내가 예수님 처지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시퍼렇게 질려서 말도 못했을 것이다.

머리 속은 텅비었을 것이다.

더구나 예수님은 인간이지만 신이시다.

태어나시기 전 부터 십자가의 고통과 과정이 너무도 무서움을 잘 아실 것은 불문 가지 !

그 분이 얼마나 무서우셨으면 마지막 기도에 피가 섞여 나오셨을까?

 

아마도 나라면 기절했을 것이다.

아니면 조금이라도 불안을 덜기 위해 많은 말을 했을 것이고

동정의 눈빛에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기 위해 이리저리 둘레둘레 정신 없이 쳐다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빌라도의 물음에 가능하면 정성껏 대답했을 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주님은 다르시다.

그분은 '유대인의 왕'이냐는 다소 조롱 섞인 물음에 당당히 대답하셨다.

그렇다고..

 그리고 나서는 일체의 물음에 답을 안하셨다.

 

 

 얼마 전 길거리에서 교통사고가 났다.

자칫하면 큰 사고로 연결 될 뻔한 접촉사고였다.

거기에서 난 분노를 참지 못했다.

맘 속에서 난 내 당위성을 알고 당당하게 야단했고 잘 해결되었지만

난 오랫동안 주님께 죄송했다.

 

 오래전에 들어논 보험이 디스크가 보상이 됨을 알고 신청을 했으나 깨끗지 못한 변명 일색이 싫어서 항의했다.

 점잖히 하거나 얘기하고 기도하면서 기다렸으면 될 것을

난 하나하나 조리있게 따져나갔고 분명히 그 쪽에 잘못있음을 표했다.

그리고는 잘 해결되었다.

그러나 난 속상했다.

주님 앞에 올바르지 못했다.

회개는 했지만 난 이렇다.

 

참지를 못한다.

가능하면 입을 닫지를 못한다.

특별히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반드시 관철시키고야 만다.

그 과정에서 상대방이 어떤 느낌일지 뻔히 알면서도 빛이 되지 못한다.

 

 오늘  묵상 구절에서 주님 예수님이 아니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인내와 온유와 확고 부동한 자기 인식을 보고 놀라고 있다.

 

 얼마 전 아버지 학교에 가서 강사님의 말을 들어가면 무릎을 탁 쳤다.

그동안 나름대로 느끼고 이해는 하고 있었던 것을 몇 마디로 정리가 되어 버렸다.

 

 '양심'이 있다.

양심은 '아버지의 그림자'란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가 평소에 자식에게 해 온 행태가 그 분의 곁을 떠나도 그대로 남아서 자식의 행동양식을 결정하는 것이란다.

물론 양심이 없거나 약한 사람은 제외하고 말이다.

 

 이런 것이다.

아버지가 사납고 혼내기만 잘하는 부모라면 그 양심은 혼날까봐 두려워서 지키는 양심이 된다.

그러니 지키기는 지키지만 그 자식의 평생은 얼마나 힘들겠는가?

공감이 갔다.

나쁜 짓 별로 못해보고 큰 도덕적인 사람이 나다.

속은 뒤집히고 가슴은 타들어 가지만 양심에 비추어 어긋나는 것은 절대로 못했다.

그렇지만 난 스스로 나쁜 사람, 속상한 사람이다.

 

반대로 사랑을 받고 큰 가정의 자식의 양심은 부담이 없고 건강하다.

그냥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에 어긋나기 싫어서 안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마음에 부담이 없다.

얼마나 가벼운 삶인가?

 

 난 예수님을 믿고 점차로 많은 일에 부담이 없어진다.

화도 덜낸다.

내는 빈도도 줄었고 강도도 엄청 줄었다.

주님에 대해 죄송해서 죄를 안지으려고 한다.

기회가 있어도..

 그럼에도 아직은 조금씩 혼란 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Blame에는 두렵다.

내 자리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자신이 없다.

그러면 말이 많아진다.

변명이 잦아진다.

내가 옳다는 생각이 들면 목소리에 자신감이 들어가고 반드시 관철 하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 예수님의 모습은 놀랍다.

배우고 싶다.

그게 앞으로 나이든 내가 지켜나가야 할 모본이다.

그분은 왜 그러신가?

그분은 하나님과 늘 교통하시는 분이시기에 그렇다.

그분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 지 너무도 잘 알고 계시다.

'스스로 유대인의 왕임을 강하게 인식하고 계시지 않은가?

유대인의 왕 뿐인가?

모든 만물의 왕이시지.

굳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기에 '내가 그니라'라고 짧은 대답으로 마무리 하신 것이다.

그리고는 침묵을 지키셨다.

 

 나도 주님 안에서 내가 사랑 받고 있는 자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자꾸만 그 분의 사랑에 실망을 드리기 싫어서 말을 닫아야 할 것이다.

 

오늘 묵상이 '짧은 답'과 더불어 '침묵'이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떠한 마음인지 확실하면

굳이 남의 말이 어떠하여도 상관없음을 가르쳐 주시는 내용이시다.

 

주님은 내 마음 아신다.

 

난 많은 면에서 편해졌다.

앞으로는 더욱 괜찮은 사람이 될 것이다.

주님이 계시기에

주님이 날 사랑하심을 알기에

나도 주님을 기뻐하기에.

 조금 더 기다릴 것이다.

늦게 눈 뜬 내 인생의 참 의미에서

주님께서 어떤 방향으로 날 이끌어 가실 지 더욱 확연해지는 그 날이 오면

난 확실히 내 인생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설 것이다.

그리고 남에게 선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내 행동은 더욱 무거워 질 것이고

눈빛은 더욱 더 선해질 것이다.

나오는 입의 말이 훨씬 부드러워 질 것이고

흔들림없는 나의 모습은 많은 자로 하여금 쉴 그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쉼이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안식의 그림자가 될 것은 그 때쯤 분명해 질것이다.

 

누구의 질타도 나에게는 가벼운 바람이 될것이다.

누가 던지는 돌도 나에게는 아픔이 되지 못할 것이다.

난 외풍에 상관없는 중후한 예수호 인생항모의 주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적용

 

1. 인내하겠다.

    화날 일 3번 참겠다.

 

2. 소망교회 티슈제작할 사진  찍으러 간다.

   주님 보고 한다.

    내 속에 희생이라든가 도와준다는 개념 생기지 않도록 기도한다.

 

3. 침묵하겠다.

    교회에서도 웃기만 하겠다.

 

 

 

기도 

주여.

다 아시는 하나님

미리미리 깨우쳐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감사하며 늘 동행하시는 주님의 흔적을 또 발견하게 되어 기쁜 하루입니다.

오늘 특별히 말 조심하라는 말씀을 주시는 듯합니다.

주여 주의 사랑안에서 하나 하나 바꾸겠나이다.

가까운 곳으로 부터 조심하겠습니다.

아들 혼내지 않겠습니다.

엉터리 같은 일이 벌어져도 주님 생각함으로 참도록 노력하겠나이다.

잊지 않도록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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