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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

고통과 함께 춤을(왕상20:1-12)

주하인 2006. 5. 31. 08:21

(열왕기상20:1-20:12) 

 

3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처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

 

 어제 '헨리 나우웬 '의 '춤추시는 하나님'이라는 책을 읽었다.

요지는 이것이다.

 

 '고통은 없애버릴 수도 없다.

고통을 피하려면 그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간다.

고통은 누구에게도 허락된 피할 수 없다.

오히려 고통은 우리를 더 깊은 차원에 들어가게 하시려는 주님의 뜻이다.

 그게 우리의 운명이라면 그걸  헤쳐나가는 방법을 아는게 중요하다.

방법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다섯가지 '스텝' 을 익혀서 고통 사이를 미끄러져 나가듯 춤추며 이겨나가는게 원리다. '

 

 오늘 묵상을 펴들고 아합을 묵상하려니 참으로 힘들다.

교훈적인 내용도 아니고 엘리야 이름이 한번이라도 나오는게 아닌데,

갑작스레

이쁘지 않은 이방인 들 이름이 마구 나오면서

암울한 형국이 펼쳐지고 있다.

 

 '사마리아'를 30인의 왕과 협약한 아람왕이 둘러싸고 있는....

 

 예수님 믿는 자들도 저런 상황에 빠져 있는 상황이 묵상에 나오면 답답해 지는데, 전혀 관계가 없는 자들이 지들..ㅎㅎ.. 자기들끼리 고통 겪는 게 마치 세계 타이틀 권투 전에 관심도 없는 권외 경기를 보내서 시간끄는 느낌이라서 지루했다.

        그러나...

아합의 답답한 심사가 읽혀져 온다.

 엘리야를 통해 그의 잔악한 심통을 맘껏 부리던 자가

자기가 감당치 못할 듯한 거대한 힘이 눌러오자 기도 못피고

모두 바치겠다고 서약 , 맹세를 하며 벌벌 떠는...

 

 신자든 불신자든 누구에게나 고통이 온다.

그런데 오늘 불신자의 예표 아합왕이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왕인 그도 '고통'을 맞고 있다 .

예외없이..

 

남에게 고통을 주며 희열을 느끼던 새디스트 같던 그가 이제는 역으로 더 심한 고통을 맞보고 있다.

 

 그러나...

나우웬의 고통 이겨나가기와는 달리                                            

너무도 평범한 우리처럼

그도 역시 '고통 벗어나기' 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어쩔 수 없다.

 우선 무조건 쩔쩔 매며 다 들어 주려 한다.

자존심이고 무엇이고 챙길 틈도 없다.

그냥 도망가려고 만 한다.

 그러다가

장로들의 의견이 집결되자 어느정도 힘이 생겼는지 한번 맞붙어 보려 하고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고통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볼 수 있다.

거의 대부분 , 인지상정 상 고통은  무조건 피하려 한다.

아합이 장로들의 의견을 들어 맞부디치려는 결단도 실은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지 결코 고통에 대하여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대처는 아니다.

 아니..

애초에 고통에 대하여 대처하기란

하나님이 전제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가끔                                                                            

입지전적 불신자의 전기를 읽으면 고통을 대처하는 적극적 사고에 대하여 나오고 성공하는 사례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 이 땅위에서 경제적 , 한시적 보상에 그치고 있다.

 

 그런데

믿는 우리 하나님의 자녀 , 예수님의 형제들은 원초부터 다르다.

 그 고통을 통하여 세상의 성공 뿐 아니라 더 큰 행복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인격적 성숙

주님의 향기

성령의 평안 ... 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 될 뿐이다.

 

 주님을 의식하고 그 분과 함께 이겨나가는 고통에 대한 유연한 대처는

고통이 차후 에 또 있을 시라도 대처할 힘이 생기게 되고 고통이 고통으로 오기전에 미끄러지듯이 춤을 추듯 빠져나갈 수 있는 요령을 익힐 수 조차 있게 된다는 것이다.

 

 나우웬 그 분이 말년에 오랜기간 거했던 '데이브레이크'라는 중남미의 장애촌의 사람들이 미국이나 선진국 들에 비해 훨씬 더 행복해 했다는 사실은 이런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된다.

 

 

 오늘

아합의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아직도

세상에서 오는 혼란을

그대로 몸으로 받으며

마치 그 , 아합처럼

도망가려고만 하고 당황하기만 하는 내 모습을 그대로 보는 것 같아

그의 어리석음이

동정이 간다.

 

허나

난 주님 예수님을 의식하기 시작했고

여러 면에서 그분의 뜻을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뜻과 내 의지를 맞추는 작업을 조금씩

훈련하고 있다는 사실이 인식이 되고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세상의 모든 고통과 환란 속에서도

주님 예수님을 껴안고

미끄러지듯이

그 고통의 폭우 속에서도

춤을 추듯이

피겨 스케이팅 하듯이

스텝 밟아 빠져 나올 얼마 남지 않았음을 기대한다.

 

 

 기도

 

주님.

아합 같은 접니다.

 

포악하기도

쉽게 두려워 하기도

결단 없기도

유약하기도

세상의 은금에 눈을 못떼고

썩어질 것에 탐욕을 내려놓지 못하며

아직도 아쉬워 하고 안타까워 하고 있는게

주하인 올시다 .

 

이제

삶의 필연적인 요소인

환란과 고통 속에서도

우리 주님의 팔을 꼭 붙들 수 있기를 원합니다.

 

처음에는

달달 떨면서 온통 넘어질 까 두려워 했지만

이제는

주님을 아프게 의지하던 제 팔에 힘을 빼고

두 다리에 조금씩 힘이 가해지며

엉키지 않게

우리 주님의 인도하심에 맞추어

멋지게 미끄러지는 스텝을 밟아

이리 저리

춤을 출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주님의 손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뜻밖에 어려움이 찾아올 때 내가 하는 첫 행동은 무엇입니까?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고 행하십시오.
● 하나님을 배제한 채 인간의 힘으로 벌이는 갈등은 상처만 깊어질 뿐입니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에 대한 교훈을 얻으십시오. 

 

 

 


  
 
 
  위기는 하나님을 신뢰할 것인지를 결정하게 만드는 하나의 전환점이다.

- 헨리 블랙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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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현재 상황에 직면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면서, 비탄에 빠져 가슴을 쥐어뜯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성경은 전쟁의 소문과 전쟁과 혼란과 박해의 와중에도 그리스도께서 승리와 영광과 위엄으로 다시 오실 것을 우리가 서로 위로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잠자리에 들면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때로는 아침에 일어나 동이 터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어쩌면 오늘이 그분이 다시 오시는 날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날이 올 때까지,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시고, 따라서 우리도 일해야 합니다.

혼란과 절망이 가득한 세상 가운데서 우리는 기도해야만 하고, 고통을 완화시키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만 합니다.

그 영광스러운 책임이 여러분의 삶에서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 「희망」/ 빌리 그레이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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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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