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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의 떡과 물은 쓴가 단가?(왕상22:24-4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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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의 떡과 물은 쓴가 단가?(왕상22:24-40)

주하인 2006. 6. 8. 11:14

(열왕기상22:24-22:40) 

 

24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

25 미가야가 가로되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그날에 보리라

 미가야는 뺨을 맞았다.

마치 예수님의 고난을 순간 보는 듯.

내 속에서 순간 '수치심'이 올라오며 그래서는 안될 '복수심'이 불타오르려 한다.

 그러면서

때리는 자의 말을 보면서 어리석은 자 - 자신의 말이 진리에 기초하지 않은 미혹의 영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편리에 의한 이야기든 합리화를 시키는 어리석은 모습-의 포악을 보며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식이고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포악인데

진짜로 무서운 무식한 자가 포악을 부리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가 일어나려고 한다.

 

 그럼에도

미가야의 반응을 보면서 느껴지는 것이 있다.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그날에 보리라 '

 

 미가야는 담대하다.

전혀 흔들림이 없다.

그러면서 위풍이 당당하다.

 

 

 

 

27 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 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 고생의

   물로 먹이라 하라

 미가야는 '고생의 떡과 물'을 먹게 되었다.

그럼에도

미가야는 고생으로 안 받아 들이는 것 같다.

여전히 담대하다.

 

왜 그럴까?

이러한 불합리한 상황에서 그가 무엇때문에 담담할 수 있을까?

 

 미가야는 알고 있다 .

확실히...

그리고 전적으로 믿고 있다.

 

 "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

 

시드기야도 나름대로 믿고 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신분을 믿고 있고, 동료의 수를 믿고 있고, 권력을 믿고 있고.. 아마도 일부 자신의 영속에 알지 못할 어두운 영의 계시를 믿고 있었을 것이다.

 

 아합은 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애써 무시했다.

 

이런 차이다.

 

 알고 있고 듣고 있음에도 세 사람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크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마어마하게 다르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가져오는가?

 

' 생각'의 차이다.

( 친구가 되기 위함이 아니라면 이 고통을 어찌 참아내누... )

 

 

 미가야는 고생을 달게 받았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다.

그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전혀 의심치 않았다.

고생을 고생으로 받기 보다

하나님 역사의 한 과정으로 받았으며

결국은 자신의 입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과정에 즐거이 동참하는 것으로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몇번이나 부르조아의 푸념처럼 들릴 소리를 이곳에 올리면서 죄송한 마음이 금할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솔직한 나눔이 되기를 소원하는 마음에서..

그리고 감정적으로 본인이 느끼는 것은 옳고 그름이 없다는 생각에서 가끔 답답함을 썼었다.

 

( 권태... 인가?   작품 구상...인가? )

 

 

요새 그렇다.

어제 디스크 발병한게 조금 나아지는 듯하여

두시간 수술을 하고 나니

걷지도 못하겠었다.

 감기가 심하게 들은 집사람 수발하다가 보니

코 안이 얼얼하고 기침이 난다.

이제 곧 있을 대만 기독병원 손님 들 앞에서 Solo 로 찬양을 하기로 되어 있는데...

이비인후과 진료를 받으니 후배 선생이 비중격 비후로 수술하란다.

자주 편두통인지 머리가 아프다..

눈이 그 때문인지 가끔 안보이기도 한다.

원시가 생기려는지 글씨도 흐릿해진다.

머리에는 남들보다는 덜하지만 흰머리가 생긴다.

거울 볼 때마다 주름의 골이 깊어가고

코 옆가 입가에 윤곽이 짙어지고 눈 아래가 쳐지기 시작한다.

혈압약은 오래 먹고 있다.

회음부에 얼얼한 듯한 것이...ㅎㅎ

 그외 주위에 돌아가는 현상.

산부인과 미래

경제력.

관계.

자식........................

 

 

 수요 예배라서 성경을 들고 집사람, 장모님과 나섰다.

발걸음 옮기기도 어려웠다.

앉아서 예배드리는 동안 조여오는 통증으로 안절 부절 못했다.

 

살아갈 날이 많은데.. 어쩌나..  하는 생각이 몰려오려 했다.

 

저녁에 자려고 딱딱한 거실 바닥에 이불을 펴고 누웠다.

 불끄니 겨우 눌러놨던 두려움과 외로움과 좌절의 생각이 용틀임하려 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단 일초도 안되어서 이해할 수 없는 기쁨이 밀려왔다.

아.....

항상 그랬듯이

우리 주님은 내 예상을 늘 넘어서신다.

 

그러면서 쏟아져 들어오는 선한 생각들.

 

' 그래 기쁘다.

 주님 밖에 볼 수 없게 된 이 상황이 너무 기쁘다.

 

 그래 .

 주님 뜻이 아니시면 대만 기독팀 앞에서 노래 못하게 될거야.

 뜻이시면 아무리 막혀도 성대에서 좋은 소리가 날거야.

 난.. 그들 앞에서 노래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과 맺어진 어떤 역사를 위해서 주님이 날 도구로 찬양케 하실 거야.

 주님이 원치 않으시는 어떤 좋은 목소리도 필요가 없어.

 아..

 감기를 넘어서는 주님의 역사를 볼 기회야.. 전율이 다 느껴지네 !

 

  허리 아픈 거 받아들이지.

세상의 어려운 분 보다 버틸 여력이 없으니 이정도만 허락하시는 고난인가봐.........

 장래 !  

 주님이 원하시면 원하시는 대로 .... '

 

 생각지 않은 생각들이 물밀듯이 밀려오며 내 속은 진실로 기쁘게 변하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쉬어 있는 상태로 나도 모르게 찬양이 흘러 나왔다.

열두시.. 내 아들 방이 부스럭 거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아빠가 왜 저런 이상한 소리를 내는가.. 하고 당황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소리는 고음으로 아주 잘 나왔다.

 

아침에 일어나니

걸을 만하다.

목이 편하다.

 

 참 희한하지만 당연하다.

 

미가야의 당당함이 ........

일상의 아주 적은 . ..아닌 듯하지만 그런 .. 세미한 기적이 쌓이고

주님의 예기치 못한 임재하심에 의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이세상에 아무것도 없고

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굳어진 탓인 듯하여

반갑게 느껴진다.

 

 

 곧......

담담한 삶이 이어질 것이란 생각이 흐믓하게 든다.

 

 

기도

 

감사하신 분.

늘 동행하셔서

내 인생의 굴곡을 피시고

거친 부분을 깍아주셔서

평안과 기쁨으로

인도하시는 분.

 

감사합니다.

주님을 잊지 않고 살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약한 믿음이란 단련받지 못해 신뢰할 수 없는 믿음이다.

- 워렌 위어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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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망을 받아들이냐, 받아들이지 않느냐가 때로는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이 되기도 합니다.

알코올 중독, 그건 불행이지요?

어떤 사람이 알코올 중독이 되기까지 그는 여러 차례 책망을 들었을 겁니다.

왜 사람들은 책망을 거부할까요? 책망을 미움으로, 무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책망은 사랑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이 제게 내렸던 징계를 얼마 전에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쉬는 시간이었습니다.

놀다가 그만 유리창을 깼습니다. 선생님은 제 뺨을 때렸습니다.

전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무려 30여 년 동안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고도 말입니다.

그것이 제 안에 응어리로 남아 있음을 느낀 건 얼마 전이었습니다.

저는 늘 교사들의 체벌에 필요 이상으로 예민한 반응을 보이곤 했는데 드디어 그 까닭을 찾은 겁니다.
저는 30년 만에 선생님의 책망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돌아보니 전 늘 그 선생님을 용서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저를 가르쳐 주고 칭찬해 주신 그분의 은혜가 큽니다.

글을 쓰는 일에 부담을 갖지 않게 된 것도 그 선생님 덕입니다.

선생님은 제 글을 읽고 수업 시간에 크게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 후 글을 쓸 때마다 칭찬받았던 기억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전 그동안 선생님께 고마움보다 서운함을 품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제가 받은 은혜나 고마움은 모두 사라지고 섭섭함만 남는다는 걸 체험했습니다.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 자체가 교만임을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문득 그 선생님이 보고 싶어지네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 「파이프 행복론」/ 조현삼 (김영사, 2004)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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