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같은 성령 다른 표현 선한 결과[행21:1-15] 본문
부제) 다른 표현을 통하여 보여지시는 사랑의 하나님의 실재
그러고 보니
잊고 살았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임하시고
그들의 입에서
모두 다른 방언 들이 튀어 나왔었음을 ...
어쩌면 그 다름들
그를 통하여 표출되는
이 3차원 세상에서의 여러 다양함들....
그것은 실재하시는
하나님의 또다른 사랑의 배려이며
우리 부족한 인생들의
심리 하나하나 마져 매만지시는
살아계시는 증거이심을 ....
그랬다.
그 다른 표현을 통하여
바울님은
어쩌면 아직도 일말의 남은
인생의 위로를 느꼈을 것이며
그것이 어쩌면
하나님 위로의 또다른 표현이심이 깨달아지고
그 분의 영혼 깊이 감사함으로 갈무리 되어
앞으로 행하여질
그 험난한 선교와 순교의 여정중
한번씩 쉼을 허락하는 감정적 버퍼로서
작용하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것..
그 세세하고 세밀한 부분 마져
하나님의 뜻이시다.
성령의 운행으로 합쳐지는
다르지만 또 똑같은
하나님의 뜻이란 말이다
그게 깨달아지게 하시니
난..
매일 말씀을 묵상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로
성령의 은혜시다
할렐루야
어쩌면
인생의 지난한 다양함에
내가 지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갑자기 틀어놓은 찬양이 귀에 들어왔습니다.
그 다름이 다름이 아니라
위로, 은혜, 같은 성령이라고
주께서
이리
찬양으로 위로 하시는 듯하여
긁어다 붙혔습니다 ^^*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예언하는 네 자매 뿐 아니라
선지자까지
그것도 직접 유대에서 내려오기까지 하며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제대로 있을 사실을
'성령'이 말씀하시는 대로 말한다.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그리고 '하나같이 입모아'
예루 살렘 가지 말라 막는다 .
'성령임재로 인한 예언'
'동일한 의견'.....
주의 뜻.......아닌가?
그게 맞는 거 아닌가?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런데 '바울'님은
" 내 마음을 상하게 " 한다고 하기까지 하며
질타한다.
그런데.. 그게 정말 상하는 마음일까?
그 때의 사도 바울님의 눈에는
'눈물 한방울' 있지 않았을까? ^^;
이런 '츤데레' ㅎ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같은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말씀하셨을 것이고
그중에는 '선지자'도 있고 예언하는 빌립보님의 4딸이 포함되었으며
제자들도 기도하는 사람이었을 것이고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지 않았거나
그들에게 임한 성령이 '착각'이었을 것이며
'바울' 님에 임한 성령님만 옳은 성령이었을 것이라는 ..ㅠ.ㅠ
그래서 그분에게마 '주의 뜻'이 임하였을 것이라는 가정은
정말 모든 믿는 자,
기도하는 모든 자,
성령 사모하는 모든 우리들에게
얼마나 많은 실망과 더불어 영적 트라우마가 될 것인가?
이 사도행전에 표현되는 모든 '성령'의 역사들이
다 거짓이고
다 허무하고
다 엉터리라는 전제가 아니던가?
그렇지 않은 것이 맞고
그들에게 '동일하신 성령님'..
하나님의 뜻이 동일하게 그들 모두에게 임하셨고
그것이 모두 '주의 뜻 가운데 '있음을
당연히
인정한다면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원.. ^^*)왜 같은 성령에 사로잡힌 열렬한 주의 백성들의 입에서다른 결과가 나왔을까?
사도 바울님께서는
주의 뜻이 '예루살렘'에 가는 게 맞다면
왜 나머지 모든 기도하는 자들,
성령 충만한 분들의 입에서는
'예루살렘'에 가지 않는게
'주의 뜻'인 듯 한목소리로 막아서게 되었을까?
과연 어느게
주의 뜻이신가?
이땅에서 기독교인,
그래도 '기도'하는 자..
그래도 성령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중생', 성화를 사모하게되어좁은 길을 가거나
사모하는 자들의 모든 분들에게
'주의 뜻'을 사모하고
성령의 은혜를 갈구하는 우리에게
내가 가는 길이 정말 '주의 뜻'이 맞던가?.......
한번씩 돌이키고 회개하고
다시금 주 앞에 기도하여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나가는 그 어떤 일들이
과연 옳은 길인가 어찌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분명코 '말씀'에 근거하여
기도하고
은혜받고
깨달음 얻고
열정적으로 나가는 내 인생의 방향이
만약
'바울님처럼 뛰어난 영적 리더'들의 받은 그것과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오류라면.............
그거야 말로 인생을 걸고 추구하던 모든 것이
다 헛된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하는가?
두려운 일 아닌가?
어찌 생각하면... ㅠ.ㅠ
그렇다고 '내것 '만 옳다고 주장하는
바울님의 그것처럼
남의 것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독불장군처럼 나가는 것은
또 어떤가?
남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겠는가?
손가락질 받고 하나님의 이름을 나로 인하여 더럽히게 되고
그런 나를 보고 실족하는 누구는 없지 않겠던가?
하나를 구원하려다 두 셋을 더 실족시키는.. ㅠ.ㅠ...
무엇이시던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바울 님도 옳고
바울님 이외의 모든 분들도 다 옳다.
바울님에 대한 '주의 뜻'은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선택'임을
'그의 영적 수준'에 맞추어
반드시 행해져야 하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으로 이루어지는게
'주의 뜻'이시며
그 안에는 '주의 뜻' 가운데
주 예수께서 그러하셨듯
세상을 위하여
오직 홀로 하실 수 밖에 없는
극단의 사랑,
십자가를 갈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이
'사도 바울'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완전성화'된 분,
이긴 자의 선택은
우리와 다를 수 밖에 없으며
그 '사랑의 표현'은 당연히도 '범인'인 우리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
반면,
우리들은 '사랑의 표현'으로
바울을 향해 움직이는 안타까운 '인간적 사랑'이 될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이 비록 '주의 뜻'인지 정확하게 인지되지는 못해도(어찌 완전 중생, 성화되어 하나님의 뜻이 곧 내 뜻이 되는 이긴 자들이나 예수님의 사랑하심, 긍휼하심 .....과 같은 수준이 될 수 있을까... ^^;)
그 분을 사랑하는 긍휼지심(그러고 보니 '긍휼'이 바탕인 것이 바울님과 그 외의 모든 분들과 공통이 아니던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다른 결과로 나왔지만 그 바탕의 흐름은 동일하다 ! 긍휼이 공통이다. 사랑이 공통이다. ..) 로 인하여
저러한 다른 표현이 되어지는 게 아니었던가?
그렇다 .
세상에 다양한 사람과 비례하여,
아니 동일한 사람이라도 다른 상황에서 다른 선택의 결과 가 나올 수 있으며
당연하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자신의 주장만 하는 것은
'미숙한 ' 자신의 성장만 드러내는 것임........을
오늘 모두 다른 마음이지만
동일하게 허락되어진
'바울님'께 허락되어져 표현하시는
'주의 뜻'이
그래도
하나님께서 '조금 더' .. (그렇다. .. 조금 더 일 뿐이다.. 세상의 그 어떤 선택도 무시될 이유가 없다. 다른 것 뿐이고 그 것이 '긍휼과 사랑'에 근거한 하나님의 뜻이시라면 더 받아 들이고 내 내면, 우리의 영혼에 받아들일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게 옳은 성령의 인도하시는 방향을 향해 나가는 것이다) 기뻐하시는 방향임을
내 안에 받아 들이고
영혼에 갈무리하며
세상 살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게 '옳은 '..
그게 그래도 조금은 더 내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맞는 것 같다는 깨달음이
오늘 말씀을 들으며
가슴이 깊이 온다.
그렇다.
기도하고
회개하고
성령의 은혜 받고
마음이 풀어지고
감동과 감화로 영혼이 절절 끓는 듯하여
내 행하는 이 삶속의 모든 것이
하나의 오류가 없는 듯..
힘이 있고 행복하고 차분하고.....기쁘고 .. 하는
그 어떤 나름의 확정적 느낌이 있을 지라도
같이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맞추어
그 분의 선택이 틀린 것 없을 거 같을 때...
그동안의 내 '오래된 선택'은
탁 자르고......
내 것이 옳은 것임을 주장해왔었음이
깨달아 진다.
바야흐로 '고집'이다.
내 그동안의 선택과 해온 고생들이 '헛것'이 되는 아쉬움이나
나를 새롭게 지어가시는 '하나님의 작업'들이
한순간 모래성처럼 스러져 갈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들이
어쩌면 '미련한 공포'로 다가와서 일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하시는
'같은 성령'을 믿고
같은 기도를하며
같은 은혜 가운데
같은 회개와 같은 의견으로 행하던 분들의
예기치 못한 '다른 주장'에 대하여
그게 '하나님의 뜻'.. '하나님 나라의 원칙'..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원리에 어긋나지만 않으면
'과감히 받아 들이는게 ' 옳은 것.......(그래.. 그냥 그게 성숙한 자의 마땅한 일을 넘어서는 .. 옳은 것'이다 ^^*) .. 이고
그것이
'말씀'을 통하여
오늘처럼 '레마'로 오기에
그런 다르지만 틀리지 않는 상황을
어쩌면(오늘이 어쩌면 그 하루가 될 수 도 있다.. 매사 매시... )
마주할 매일을 대비하여
정말 깨어서 매일 말씀 묵상, 매일 큐티하는
삶의 태도를 내려 놓으면 안되겠다는 깨달음이 온다. ^^*
그래서,
다행이도
나. ..
옳은 인생의 행로를 취하고 있다고
주님이 어루만지시는 게 느껴짐이 진정 감사하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
사는 것이 온통 풍파의 고해.. 임은
원죄적 숙명의 우리들인 것을
불신자들도 그리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기쁨과 감사와 넘치듯 흐르는 사랑과 긍휼의 행로,
바로 '성령님 안에서 사는 자의 어떠함'도
때로는 이렇게 '부딪치는 ' 인생의 갈등에서
완전 자유하지는 못하게 함을
오늘 동일하신 성령님안에
같이 열심히 기도하는
심지어는 선지자와 예언하는 자,
제자들까지에게도 다가옵니다.
주여.
말씀을 통하여
다른 것이
하나님 안에서
매일 말씀을 보고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는 자들의
성령 안에서 의 '다른 것'...은
절대로 틀린 것이 아님..
그마져 ... 주님의 뜻 가운데 있음을
다시한번 깨닫습니다.
어쩌면 '바울님'의 입장에서도
그가 '선교 로봇'이 아닌 바
모든 사람들의 '걱정과 눈물'이
한편으로는 '심적 위안'과 '감사'의 다른 느낌이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그것이 '하나님이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다른 표현.. 이고
그러함이 없는 냉랭함으로
모두 하나로 '바울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떠미는 형국이었다면
그거야 말로 소름끼치는 일이었을 것임을
지금 다시 깨닫습니다.
주여
다르지만 공통된 것이
'긍휼'이고
그것이 '사역'만큼 중요한 것임을
주께서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계시며
정말 중요한 주의 뜻은
세상을 향한 '선교'의 큰 사랑에
서로를 눈물로 위로하는 긍휼에 바탕이 된
'자잔한 사랑'..
예루살렘 행을 막아서는 안타까운 사랑의 표현도 배려하시는
그 '소소하고 세밀한 인간 심사의 흐름' 마져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
진정 살아계셔서 실재하시는...
그래서 오늘 우리의 모든 아픔을 다 아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야흐로
더 깊은 실재로 다가옴이 아닌가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
주여.
부활하시고
허락되어진
실재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거룩하고 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들어
감사하고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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