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같은 고난 다른 결과 (왕하 24:8-25:7) 본문
제 24 장 ( Chapter 24, 2 Kings )
17. 바벨론 왕이 또 여호야긴의 아자비 맛다니야로 대신하여 왕을 삼고 그 이름을 고쳐 시드기야라
하였더라
20.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하심이 저희를 그 앞에서 쫓아내실 때까지 이르렀더라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니라
제 25 장 ( Chapter 25, 2 Kings )
2. 성이 시드기야 왕 십 일년까지 에워싸였더니
3. 그 사월 구일에 성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의 양식이 진하였고
7.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저의 목전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갔더라
여호야긴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다가
바벨론 왕으로 인하여 몇달도 못되어 죽고
그 삼촌인 시드기야가 그 바벨론의 손에 의하여 왕으로 세워졌으나
시드기야는 바벨론을 배반하고
십일년 간을 모진 고난 끝에
(문제는 그의 악함 때문에 모두가 ... ㅜ.ㅜ;)
결국은 자식들이 죽는 것을 마지막으로 본 후
그의 두 눈은 빠졌다.
그리고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아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읽어가며 그들의 '여호와 앞에 한결 같이 악함'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악함이 왜일까?
왜 그토록 고통 당하는 데도 악함을 버리지 못하던가?
그것은 '악함'이 악함인 줄 모르는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우리는 성경이라는 너무 뚜렷한 지표 -그러기에 가장 행운아들이다 ^^* -를
들고 보기에 그들이 악함을 쉽게 알 수 있지만
삶 속에서 스며들듯 들어와 있는,
악한 줄도 모르는 악함이 정말 우리에게는 없는가?
교회를 옮기고 성장 반을 같이 하던
나름 비교적 신앙생활 오래했던 분의 '제사 ' 문제에 대하여
완고한 입장을 보면서
관습이라는 이름의 악함이 얼마나 뿌리깊게
우리 영혼을 잠식하고 있는지 알면서
더 이상의 입을 닫은 기억이 있다.
그거....
말도 안되는 우상인데도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참 많다.
주위에.......
난 안그럴까?
내 악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교묘함으로 위장하여
주님은 아시겠지.. 라는 생각으로 합리화 하고 있는 것은
또 얼마나 많을지..
그들, 왕들은 모든 정보가 집합되는 최고의 자리다.
매시간 매순간 자신의 문제 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백성들의 이야기를 취합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 내려야 하는데,
과정에서 안타까운 인간적 아쉬움이나
그럴듯하게 받아 들이고 싶은 유혹이 얼마나 많은 자리일 것인가?
1.000개 잘하다 하나 잘못 판단하면 그냥 쉽게 물들어 버리는 자리 아닐까?
그게 악함 아닌가?
사단의 영은 또 얼마나 강한가?
기도 이외에는 물리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들, 악한 왕은 악한 왕처럼 보이지 않는 왕일 것이다.
그냥 어쩌면 적당히 ' 동성애'를 눈감아 주고
적당히 '대 타협'하고
적당히 인간적이라는 이유로 넘어가고......하는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부드러운 리더들일 수도 있다.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주님은 악하다 하신다.
최소한 리더는 그에 걸맞는 강한 결단이 필요하다.
매일 자신을 돌아보고 말씀 가운데 자신을 내어 놓는 묵상과 기도가 필연이다.
그렇지 않으면,
주하인처럼........^^;; .. .. 조용히 재야에서 주님을 묵상하고 오실 날을 기다리던가..
그릇 작은 자들에게는 덜 회초리가 가해진다. ㅜ.ㅜ;;
또, 되풀이 되는 고난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된다.
고난.
처절히 주님 앞에 서려 했던 히스기야 왕이나 요시아 왕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철저히 악한 므낫세 왕.
오십오년을 장수하였지만 그 삶이 평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내적인 황폐함은 살았지만 죽음보다 더 힘든 삶이 었으리라.
우울증.
살아있지만 내면은 지옥의 삶과 같다고 누가 고백한 적이 있다.
엘리야.
그 뜨거운 성령 충만의 선지자도 우울증에 빠지니 팔다리에 힘하나 없을 정도로
아주 깊은 나락에 빠져 있었다.
므낫세.
가치도 없는 자라 정확히 그 내면을 묘사는 안되었지만
그의 삶은 죽음이나 진배 없을 것이다.
단지, 지옥 백성은 양심이 마비되어 덜 느끼는 듯 하지만
그 마음의 황량함은... 이구..
오늘 보여지는 두 왕의 '고난'.
한 왕은 몇달 못버티고 죽고
또 한 왕은 11년간 왕 위에 있기는 했지만 그 대부분이 '기아'와 '공포' 와 '미움','불안',.. 등에
허덕이며 살다가 결국은 아주 비참한 결과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악하디 악한 왕이 어떻게 '장장 11년 '간을 버텨냈을까?
애굽의 강력한 의리 , 혈맹의 동지애일까?
그런 거 같지는 않다.
단 한마디도 성경에 묘사가 되어 있지 않다.
지금 미국이 우리나라의 혈맹으로 인식되어 있음은
우리 세대 사람들의 많은 영혼에 새겨져 있지만
11년간 그 의리를 지키기 위하여 저런 고난을 감수할 사람은
현 세상에는 최소한 없을 것만 같다.
뱃속에서 부터 바벨론을 혐오하도록 지어진 사람인가?
그것도 논리적 근거는 없다.
왕으로서 혹시 조공을 바치는게 아까와서 독립하려는 마음은 아니던가?
자존심은 강해서 그들의 총독 격 왕이 되었지만
정치적 독립성 때문에 그랬던가?
그러나 그렇다 하기에도 너무 기간이 길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가 바벨론을 저항하기를 저리 강하게 한 이유는?
아마도 '선민 사상'이 아닐까?
자신이 악하다는 사실도 모르는 왕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찌 감히 신생 바벨론 같은 하찮은 나라에... 라는
개념이 있지는 않았을까?
문제는 여기다.
고난이
비록 그들의 신앙이'옳거나 옳지 않거나 '
전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어서
누구나 필연적으로 거쳐갈 수 밖에 없다 한다면
그 기간을 어떻게 받아 들이고 이겨나가냐 함이
'옳게 믿는 자' 와
' 악한 자' 들 사이의 차이가 아닐까?
옳은 신앙인.
최소한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여 기도하고 겸허할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는 자들은
고난이 올 때 얼른 주님의 뜻을 먼저 구한다.
악한 자들 역시 어쩌면 나름의 하나님께 소리질러 외칠 수 도 있다.
그러나 관점이 다를 것이다.
믿는 자들은
' 주여 구하소서.
그러나 주님의 뜻이시면 뜻대로 하소서... ' 하였을 것이고
악한 자들은
'주여 도우소서. 살려주세요. ..' 가 기도의 주 포인트일 것이다.
분명코 나중의 기도도 선한 자들은 할 수 있다.
단지 차이는
우리 선한 자들은 ' 주님의 뜻'에 순응할 마음이 기본이고
악한 자들은 '응답' 이 기본이라는 이야기다.
그 차이는
그 응답의 여부와 강도의 차이에 있질 않다.
믿는 자들의 영혼은
고난의 존재 여부, 앞으로의 어떠할지 여부에 큰 상관없이
그 평강과 기쁨은 날로 커져가게 되어
주님이 원하시면 훨씬 더 큰 현실의 풀림도 있을 수 있게 되지만
악한 자들의 그것은 점점 더 파괴되고 황폐화 될 것이다.
므낫세를 분석했던 것 처럼...
그렇다면 다시 시드기야로 돌아가본다.
그...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의지할 데도 없다.
소리쳐 외쳐도 들어주는 자가 없다.
고난은 고난으로 끝이 아니다.
고난은 영혼의 황폐를 가져오며 마음은 점점 불로 덴듯 아파질 것이다.
가슴은 뻥 뚫어지며 점점 그 공허는 커지고
외로움은 그 가슴을 짓이기며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는 결국
자식들이 눈 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봄을 마지막으로
그는 영원한 어둠 속으로 말려 들어가게 된다.
살아 있으되 산게 아니다.
살아 있으되 그는 지옥을 헤맨다.
밖에서는 온갖 소리가
이전 보다 훨씬 뛰어나게 발전된 청각을 통해서 들어와
그의 보이지 않는 육신 속에 갇힌 영혼에 난도질을 하게 될 것이며
왕으로서 나름 누리던 맛갈 스러운 미각과
남자로서 누리는 갖은 여성의 기억들은 아직도 멀쩡한데
바벨론 이방 땅에서 포로로 잡혀온 그의 육체의 촉각을 통해 들어오는
그 결핍됨과 허전함은 지옥에서도 아주 깊은 지옥을 맛보게 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
비교를 통하여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고난은 같은 강도로 올수도 있다.
하지만 ,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고난은 '기쁨'이 되기도 한다.
아니 영혼의 순화와 더불어 '감동'으로 바뀔 수도 있다.
나.
아내의 수술 때.......
귀막히던 며칠 전.........
고난이 꼭........고난 만은 아닐 수도 있음을
아주 극명히...........
정말 극명히 깨달았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이런 두 차이에 대한 추리가 사실로서 명확히 깨달아진다.
두려움이 줄어 든다.
감사가 늘어난다.
그게......바로
우리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축복이 아닐까... 살그머니 생각해 본다.
오늘 주일..
지금 당직실.
밤새 분만 두 분 건강히 받아내고 나니
잠이 오질 않는다.
8월.
정말 바쁘다.
해마다 그렇다.
아마도 방학 중이라 수술 받으러 오시는 분들이 늘어나서 그러리라.
그래서 9월에 휴가를 냈다.
갈 곳에 대하여 재미있는 계획을 짜려고 이것 저것 들추다가 늦게 잠들었었다.
피곤은 하지만 묵상을 먼저 하고 잠 청하려 했다.
그런 나에게
주님은 주일을 맞이하셔서 또다른 깨달음으로 날 넓히신다.
참 감사하신 분이시다.
점점,
주님의 뜻하신 모습대로 내가 바뀌어 가는 것 같다.
그게 기쁘다.
할렐루야 .
주님.
귀하신 내 하나님.
주님의 날이십니다.
오늘도 주님의 영광을 높이 올려 드리는 하루가 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주여.
주님은 저에게 가장 합당한 모습으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주님.
그 인도하심에 조금 더 열렬히 바뀌어가는 제가 되도록
그 마져도 성령으로 인도하소서.
주님.
남은 당직 시간 동안 사고 없이 하여 주시고
피곤치 않게 하시고
고난이 너무 지나쳐 눌리지 않게 하시되
그 고난 오기전 미리 기도하게 하시고
혹여 하나님이 불가피하게 허락하신 고난일 지라도
주님 기쁨으로 다시 한번 깨닫게 하소서.
그를 통하여 이전도 그랬듯
주님께 더 영광을 올리어
우리 주 성령으로 말미암아
제 속사람이 더욱 강건하게 하여 주소서.
제 마음이 이제 깨달을 때마 더욱 지혜로 넘치게 하시어
올바른 믿음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늘 제 안의 구주로 떠나지 않는 확신으로 모셔들이고
세상을 향한 사랑,
제 부모님.
제 아내.
제 자식들,
제 지구의 모든 가족들을 향한 인류애적 긍휼의 마음을 넓히고 굳혀 주소서.
그래서 제 안에 사랑으로 더욱 뿌리가 내리고
터가 굳어지게 하소서.
강건하게 하소서.
악한지도 모르고 악한 다수의 사람들과는 다른 인도 허락하소서.
예수 그리스도,
귀하신 내 구원의 주님의 이름으로 영광올리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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