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감사의 포도원( 마21:33-46 ) 본문
제 21 장 ( Chapter 21, Matthew )
자기 가진 달란트로
자기의 노력과 시간을 들여
주님께 영광을 드러내고자
최선을 다하는
하기오스 찬양 팀의
포도원 열심
어제의 찬양은
나에겐
놀라운 은혜의 시간이었다
주님께서
내 실과를
조금은 받아가지 않으셨을까 싶다 ^^;;
33.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주님은
'포도원'을 만드시고
세심하시게도
안전을 위하여 산울타리 치시고
먹고 살 수 있도록 즙짜는 구유를 파시고
멀리까지 볼 수 있는 망대까지 마련하신 다음에
농부들에게
'세를 주시고'는 '타국'에 가셨다.
그리고는
댓가를 받으시려
종들을 보내셨지만 죽임을 당하는 수모를 감수하시고
또 믿으시며 아들까지 보내셨지만
죽임을 당하셨다.
' 주님 '
포도원을 만드신 분이시다.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그 안에 각종 장치를 만들어 넣으신
세심하고 자상하신 배려의 하나님이시다.
우리에게 '세'를 맡기고 가시는
너무나 우리를 믿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부담을 주지 않으시는 '부드러우신 분' 이시다.
또한 , 그 분은 종과 아들이신 예수님을 죽으시기 까지 하게 하시는
'인내'의 하나님이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반드시 '세'를 받으시는
즉, '책임'을 지게 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농부로 대표되는 우리들.'
주님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속 받은 자들.
삶의 터전이자
자아 실현의 도구이자
연단의 장소인
포도원까지 배정받은 '행운'의 존재들이다.
하나 부터 열까지 세심한 배려를 받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존재다.
단, 청지기의 존재다.
세를 내야 한다.
세는 우리의 실과로 내야 하는 가볍지만
반드시 이행을 해야 하는 '노동자'다.
독일의 한번도 일하지 않고 36년간 놀고 먹는
폐인도 노숙자도 아니다.
몸만 커다란 어린아기 같은 지적 장애자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모르는 '배은 망덕한 자'일지도 모른다.
'포도원.'
삶의 터전.
주님께 세로서 실과를 드려야 할 장소.
현실에서 포도원은 무엇인가?
단지 먹고 살아가는 직업을 의미하던가?
그렇다면 주님의 관심이 '돈'에만 있다는 논리가 될 수 있다.
그 분이 우리에게 열매를 맺기 원하는 것은
어떤 장소
어떤 환경이던
불같이 연단하여 정금같이 나오는
그러한 것이다.
즉 영혼이 정화되는 곳을 이야기 하신다.
그렇다면
영적인 관심 뿐이시던가?
아니다.
오늘 말씀하시는 포도원의 뉘앙스는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까지 포함하는
범위가 넓고 통합적이며 온전한 것이다.
영적이나
물질적이나 구분되어
그것도 박하게 힘들게 인내 만을 강하게 강요하는
그런 장소는 아닌 것이 맞다.
포도원의 뉘앙스는
훨씬 부드럽고
자연스럽고
안전하고
망대로 상징되다시피 '자아 실현'의 고차원적 욕구까지 채워지면서
그 안에서 '열매'를 맺는 곳이라는
풍요로운 결실의 의미가 아니던가?
그러나, 그렇다면
예수님을 열심히 잘 믿는 자로서
현실에서 사업이 안되거나 고통을 겪는 자로서는
포도원을 받지 못했단 말인가?
포도원은 열심히 교회도 잘다니고
현실적으로도 편안하고 잘나가는 자들에게만
소위 기복적 성향의 교인들이 바라는
그러한 상태의 교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던가?
아니다.
그렇다면 '포도원'의 현실적으로 근접한 의미는 무엇이던가?
어떤 상황이던
주님이 원하시는 영적 성화를 이루어 낼 수 있는 장소나 환경.
그 환경은
주님이 말씀하시던 대로 '감당할 수 있도록 해주는 시험의 장소'를 의미한다.
가정이던
직장이던
사회의 다른 모습이던
주님이 원하시는 성화의 장소가 된다면
그곳이 바로 '포도원'의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포도원이 오늘 주는
그 안온하고 안전하고 풍성한 뉘앙스가 되려면
다른 조건이 있어야 한다.
주님의 도우심.
성령의 충만함.
나.
나의 포도원.
내 가정.
자식들.
그리 공부 못하고 눈 앞의 현실이 뛰어나지 못하여
이전에 똑같은 내 가정 , 내 자식을 볼때
그 곳은 불만족 투성이고 부족한 것 투성이다.
내 직업
늦은 나이의 남자 산부인과 의사.
이전의 나는
굉장히 불안해 했었고 두려워하고
빨리 탈피하여 다른 직업으로 전환하고 싶었을 위치였었다.
다른 것은 아니 그렇던가?
포도원으로 허락된
나의 모든 조건들이
오늘 말씀하시는 그런 따스함과 안전의 장소는 아니었었다.
영적으로 연단의 장소였으되
현실적으로 인정이 안되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내 자식 내 가정 부족하지만 비전이 있고
다른 어느 누구보다 순수하고 주님 앞에 선하다.
내 직업 , 내 근무처인 샘안양 병원.
배울것이 너무 많다.
주시는 것이 너무 많다.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깨닫게 하는 게 너무 많다.
다른 모든 것도 마찬 가지다.
내 부모형제님.
불만족하고 역기능이었지만
지금보니 그럴 수 밖에 없던
오늘의 나를 이루기 위한 그냥 그럼직한 가정이었다.
지금 보니
내 모든 주위가
포도원이 맞았다.
과거의 나만 몰랐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포도원은 내 모든 주위다.
내 현재 모든 조건이다.
주님은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을 주셨었다.
문제는 과거의 나만 눈치를 채지 못했었던 것 뿐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이런 깨달음은 어떻게 왔단 말인가?
예수님이다.
성령님이시다.
하나님이시다.
그 분의 말씀 앞에서며
그분의 놀라운 에너지로 감전되며
그 분의 평강으로 내 속이 채워지면서 부터다.
난 그 사실을 영혼 깊숙이 깨닫게 된 것이다.
누구든 어떤 상황이든
그들에게 가장 합당한 조건이 주어졌다.
정말 힘들어 죽을 것 같은데 무슨 소리냐 항의 하실 분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죽을 생각을 수도 없이 했을 만큼
인생이 어두웠었다.
의사나 큰 키, 나름대로 생긴 외모
두뇌.. . .. 어떤 외적인 조건은
행복과는 상관없다.
그래 이제 선언할 수 있다.
누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포도원에 있다. '
난 포도원을 선물받았다.
난 그런존재다.
우린 그런 존재다.
그러면 무엇이 다른가?
무엇을 주님이 말씀하시려 하는가?
그래서 어쨋단 말인가?
돌아보란 말씀이시다.
농부들과 반대로 하라시는 말씀이시다.
즉,
내가 포도원에 있음을 기뻐하고 있던가?
혹시 이 귀한 선물을 불평으로 묻어 버리진 않고 있던가?
아니, 오히려 오늘 저 농부들처럼
불만으로 행하지는 않던가?
내것인양 오해하지는 않던가?
포도원의 그 즙틀,
포도원의 그 망대
포도원의 그 울타리에 대하여 감사로 깨어 있던가?
실과를 맺기 위해 난 무슨 노력을 하던가?
실과.
내 포도원의 삶속에서
주님이 기다리시는 열매.
삶의 충실한 받아들임은
포도원을 허락하신 주님의 뜻이시다.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적용시키려는
신행일치의 삶.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것.
그러함으로 영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實果' 즉, 열매다.
가정에서는 더 여유로운 아빠.
자식들에게 주님 앞으로 가는 모범을 보이는 아빠.
아내의 조건과는 상관없이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남편.
기다릴 줄 아는 온유한 가장.
사회적 책무를 다할 줄 아는 가장.
직장에서는 만나는 모든 분들에게
주님의 온유와 향기를 내 보이며
그들로 주님 믿는 자로서 보일 모범을 보이며
사회적으로는
긍휼과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는자.
교회에서는
주님이 주신 그 울타리와 즙틀과 망대가 감사하고 귀해서
기도하고 헌금하고 예배드리고
봉사할 줄 아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이 주신 '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
성령의 흐름에 의하여
자연스레이 이루어지는 것.
자아가 앞서지 않는 것.
그러함으로 인격적으로 성장하고
영혼이 귀해지는 것.
이것이 포도원에서 거하는
우리가 얻어내야할 실과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나의 해야할
포도원에서의 하루는 어떠해야할 것인가?
일단,
자연스레이 원해지는 것이 있다.
'논문'
작년부터 바램이 커오지만
늘 새로운 것 시작하는 것은 두렵다.
아니, 가끔은 영적이지 않은 이유로
뒤로 미루어 버린 경향도 없지 않다.
논문은 마땅히 의사라면 써야 할 것 중의 하나이지만
대학병원 교수급이 아니라면
그리 힘쓸 이유가 없다.
하지만 , 주님이 주신 복강경시술 능력의 개발로
다양한 시도가 성공하여 왔다.
그것을 의학적 데이타로 표현해보고 싶은
의도가 있어왔다.
더더구나 , 개인 종합병원 근무 의사로서
그러한 노력을
아무의 자극도 없이도 한다는 것은
주님의 영광을 드러냄과 동시에
내 계발의 욕구이기도 하다.
토요일.
얼른 가서 쉬고 싶기도 하다.
어깨가 무겁기도 하다.
하지만 데이타 정리라도 해야겠다.
어제 금요일.
성령 집회에서 하기오스 찬양팀 일원으로 참여했다.
포도원 행사로서
난, 찬양을 워낙좋아하고
앞에 나서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러한 원함의 흐름 속에
내 달란트를 주님이 허락하신 망대 가운데 서서
행해 보고 싶은 생각으로
힘이 들고 시간 좇기지만
열심히 서본다.
어제는 마이크 없이 서는 날이다.
그러나 , 주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계속
기도하듯 찬양을 드렸다.
누가 보든 안보든 나 혼자 깊은 은혜가운데 있었다.
두시간 남짓 후
난 눈물을 흘리며 찬양을 했다.
아무런 사람의식을 안했다.
의도를 하려 하지도 아니 하지도...
그러나 난 깊은 주님의 임재의 가능성을 깨달았다.
실과 하나씩 따가는 중이다.
오늘 토요일.
오늘은 성가대 연습이다.
가기 싫어 자주 빠진다.
시온 성가대.
100명이 넘는 인원으로 짱짱한 분들 많다.
안가도 상관없는 듯 해서 가끔 빠진다.
하지만 게으름이다.
주님을 보고 가야 할 것을
난 외적인 조건을 보고 있다.
알면서도..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함은 '실과'를 얻음이다.
오늘은 포도원 허락하신 주님이 감사해서
실과를 걷으려 가겠다.
그외..
어떠한 내 내적인 미성숙이
오늘 하루 날 건드릴 지 모른다.
음란한 자극이 내 시선을 자극할 지도..
급한 내 성격을 무너뜨리려는 '판단'의 사단들이 있을지도..
손해보지 않겠다는 억울한 상처도 날 그냥 두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명심에 명심을 하여야 겠다.
난, 청지기다.
내 몸, 내 성질, 내 조건, 내 환경 , 내 정체.. 모두 주님의 것이시다.
그냥 맡겨진 것 뿐이니
최선을 다해 정결하게 사수하리라.
흔들리지 않겠다.
흔들리면
얼른 회개하고
주님 앞에 털어버리겠다.
예수님 믿고 가장 좋은 것은
'빨리 ' 회개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음이다.
죄책감이 옅어짐이다.
기도
주님.
귀하신 주님.
나에게 이런 포도원을 허락하셨음을
영혼 깊숙이 깨달아 감이 감사하나이다.
이전에 불만 투성이일 것이
오히려 감사의 조건이 됨이
더 감사합니다.
감사의 조건들이 자꾸 늘어남이 감사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감사의 포도원에 대하여 깨닫게 되니
더욱 감사합니다.
주여.
이 포도원 허락하신 주님을
더 감사하며 사는 하루가 되길 원합니다.
이 포도원을
나에게 주신 것이 아니고
나에게 맡기신 것임을 더욱 명심하게 하소서.
조심하게 하소서.
잊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
저로
매 사 매 순간 마다
주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게
그 상황에서의 최선임을 알게 하시어
어딜가나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
좋은 성가대원
좋은 교인
좋은 의사
좋은 동료
......로 행동하게 하소서.
그게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인하여 그리하게 하소서.
그리고 내 영혼 , 열매맺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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