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듯하신( 출 20:18-26 ) 본문
제 20 장 ( Chapter 20, Exodus )
덩쿨장미가
아파트 벽을 타고 올라가
고개를 내밀고 있는 모습이
뒤의 무성한 나뭇잎과 대비되어
그 붉음이 더욱 선명하다.
주님의 생기를 사모하여
열심을 보이는
그 열심이
이 덩쿨 장미의 선홍색보다
더욱 진하게
예수님의 생명의 생기를
올려 드릴 수 있는
내가 되었으면 한다.
주여.
사랑합니다.
주님의 생명을 사모합니다.
주여.
18. 뭇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하나님이 두려워 보인다니
그래서 멀리 떨어져 있다니 그게 가당키나한 이야기 인가?
하긴...그럴 수도 있긴 하겠다. ㅉ
생전 처음보는 엄청난 광경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처음 본다는 것은 '영적인 미숙'의 상태를 이야기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죄를 많이 지어서 무서워할 수 도 있다.
인간의 두려움은 자신의 내적 상태의 외부적 투영일 때가 많다.
또한 주님은 사명이나 주시고 의무나 지워 주신다는
버거운 분으로의 잘못 인식도 저러한 현상을 유발할 수도 있다.
난 어떠한가?
주님의 말씀을 최근에는 한번씩 직접 듣길 사모할 때도 있지만
과거에는 무엇을 하라 시키실 까봐 듣지 않으려 귀막고
나의 소견에 좋은 듯 하던 것만 받아 들인 적은 없지 않나?
또 , 죄를 짓고 혼날 것만 같은 두려움에 그런 적도 많다.
하여튼 주님은 '가까이 하고 싶지만 너무 먼 당신' 의 개념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주님은 가까이 모시고 동행하며 상의하여야 할 대상으로 느껴진다.
19.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모세가 그렇다.
그 분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는 분이시다.
대화하고 중보하시는 분이시다.
20.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래야 한다.
하나님을 공의의 분으로만 인식하고 멀리하거나
사랑의 정화로 너무 함부로 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과 가까이 하지 못하고
인격적으로 주님과 만나지 못해서 그렇다.
21. 백성은 멀리 섰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가니라
그것은 판단의 착오를 불러 일으켜
주님을 믿음이 '인생최고의 경험'이 되지 못하고
버리지고 삼키지도 못하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같은 존재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 분이 어둡게 보이고 두렵게 보여서는 안된다.
그 분이 드러내지 않으시는 것은 부족한 우리가 놀랄 까봐이지
사단의 어두움의 음습함은 아니다.
그 분의 공의는 사랑의 채찍이지 두려움을 주는 이유가 아니시다.
판단의 착오다.
25.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판단의 착오는
대화의 부족에서 온다.
대화의 부족은 일방적 편견을 만든다.
일방적 편견에 의하여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보고
피하다 보면 그 분에게 드리는 모든 것을 꾸미게 된다.
있는 그대로 주님에게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솔직해야 한다.
죄가 있으면 고백해야 한다.
주님 앞에 눈물로 고해야 한다.
주님을 만나는 당위성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주님을 만나지 않고는 기독교인의 이름은 걸었으되
실족할 위험도 많을 뿐더러 일상의 삶이 그리 유쾌하지 못하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다.
'사도행전'에 나온다.
하나님으로 부터 유쾌한 날이 이른다..라고.
그것은 일상의 평강을 이야기 한다.
주님이 기쁘신 분이시고
삶이 가벼워 짐을 의미한다.
그래서라도 주님을 만나야 한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그 분 만의 그 놀라운 평안의 기쁨을
누구도 깨달아야 한다.
그것 때문에 '성자'같은 분들이 그리 목숨을 바쳐 주님을 따르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젊음과 생명을 바쳐 오지에서 수고하는 선교사님들이 나오는 것 아닌가?
그 분의 사랑을 깨닫고
그 분의 진리이심을 알고 있으면
당연히도 그 분과 교류가 있을 의미다.
교류하기 위해서는 꾸미지 말아야 한다.
주님의 성전을 짓는 데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인테리어 해야지
내 마음으로 꾸미는 인테리어가 옳은 것인가?
또한, 주님의 뜻이면 소유를 내려 놓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작금의 기독교가 타박받는 이유 !
적당히 주님과 멀리서서
자신이 원하는 모습 만을 보려 하고
거기에 맞추어 교회를 최대한 크게 짓고
주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종교 잔치를 하고
주님의 뜻을 설파하려는 사도들을
'무서운 소리하는 ' 어리석은
'고리타분한 소리 뱉는' 구태의연한 자로 치부하는 세태 탓이 아닌가?
주님은 절대로
가까이 하기에 좋으신 분이지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분이 아니시다.
회개해야 한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는 주님을 만나야 한다.
주님의 평안을 체험해야 한다.
주님의 이끄시는 그 든든함을 느껴야 한다.
' 주님을 가까이 하자'
그게 우리가 살고
내 가정이 살고
우리 나라가 살고
모두가 사는 유일한 길이다.
최선의 길이다.
적용
1. 성경 일곱장 읽겠다.
말씀을 가까이 하자.
2. 기도하자.
늘 기도하자.
기도는 많이 할 수록 좋다.
주님을 만나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3. 주님의 뜻을 받기에 무서운가?
사명을 말씀하실까 두려운가?
늘 깨어 있자 .
기쁜 주님을 무서운 암흑으로 착각하지 말자.
4. 부족한 부분 채워 달라 기도하자.
5. 내 좋아하는 대로 주님을 그리고 요구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자.
6. 정으로 쪼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말자.
모난 그대로 주님께 나가자.
주님께 아뢰고 주님께 고침 받자.
주님은 무서운 아버지가 아니다.
그분은 자애롭고 현명하신 아버지다.
7. 주님은 기쁜 분이심을 명심하자.
기도
주님
살다보면 어느새 죄를 짓습니다.
주님
살아온 과거가 절 그렇게도 합니다.
주님
미련한 나의 지혜없음이 또 그리 만듭니다.
주님
주님의 놀라운 영광이
절 주님을 두려운 분으로 그리게 만들지 않게 하소서.
그리하여 멀리 하지 않게 하소서.
다행이도 주님의 묵상을 올리는 블로그를 붙들게 하신 것이
주님을 가까이 할 수 밖에 없는
주님의 사랑의 도구임을 깨닫게 되어 감사합니다.
가능하면 주님 꾸미지 않게 하소서.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의 해결을 받을 수 있길 원합니다.
우리 주님이 모세에게 그리하셨듯이
저에게도 제 아버지로 만나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언제나 내 모습
언제나 내 모습 너무나 부끄러워
무릎으로 주님께 기도로 가오니
나홀로 서 있는 죽은 내 영 깨우사
주님만 나를 세워 내 영 살게 하소서
주님 내 안에 주님 내 안에 내 안에 계시고
주님 내 안에 주님 내 안에 나를 세워주소서
'구약 QT'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안의 소(牛) ( 출 21:28-36 ) (0) | 2009.05.23 |
---|---|
하나님 율례의 기본은 사랑이다. (출 21:1-11 ) (0) | 2009.05.21 |
구속의 자유 (출 20:1-17 ) (0) | 2009.05.19 |
(출19:14-25 ) (0) | 2009.05.18 |
다만 주를 따르지 못함을 부끄러워 할 뿐(습 3:1-8 ) (0) | 2009.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