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다만 주를 따르지 못함을 부끄러워 할 뿐(습 3:1-8 ) 본문
제 3 장 ( Chapter 3, Zephaniah )
작지만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
풀의 꽃이지만
수치스러운 것은 아니다.
부끄러운 것은
작은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부끄러워 할 것은
주님을 모르는 일이다.
이 꽃은
너무나도 적지만
아름답다.
볼품없이 아주 적었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것은
때에 맞은
꽃을 피워내라시는
주님의 명령에
충실하였기에 그렇다.
다만
진실로 부끄러워 할 것은
주님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것
뿐이다
사진기로 찍어서 그렇지
아주 적은 꽃입니다. ^^*
1.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진저
패역하고 더러웁고 포학하고..
나쁘다.
나쁘지만 더 나쁘지 않을 수는 있다.
2. 그가 명령을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의뢰하지 아니하며 자기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아니하였도다
더 나쁜 것은,
개전의 가능성이 없을 때이다.
그 것은 하나님을 의뢰하고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주님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5. 그 중에 거하신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간단 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
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나쁘기는 하지만
나쁜 자들은 의로워 질 수 있는 가능성은 남아 있다.
그러기에 불의한 자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을 알면 의로워질 수 있기에 그렇다.
'불의' 한 것은 의롭지 못한 것이고 의로울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수치'를 모르는 자 들이다.
수치를 아는 자는 자신을 돌아보는 자이고
자신을 돌아보는 자들은 그들의 잘못을 깨달을 기회가 있는 자이고
잘못을 깨닫는 자는 주님을 알 기회가 있는 자들이며
그들은 결국 주님으로 인하여 의롭게 될 자들이다.
주님 만이 의롭게 하실 수 있다
무슨 잘못이든........
수치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수치가 잘못을 한 자에게 만 생기는 것인가?
수치는 잘못한 자 모두에게 있는 것인가?
부끄러움과 수치의 차이는 무엇인가?
수치가 꼭 나쁜 것인가?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운 것 맞다.
부끄러운 것은 개인적인 성향의 차이 탓이기도 하다.
부끄러운 것은 누구나 있지만
성장의 환경이나 자신의 깨달음에 따라 없어지기도 한다.
부끄러움은 경우에 따라 아름답기도 하다.
하지만, 성장과정에서 생기는 과도한 질책으로 인하여
자신감이 결여 된 경우에서도 부끄러움이 생기기도 한다.
여성의 경우는 적당한 부끄러움, 특별히 가장한 부끄러움이 아니면
아름다워 보인다.
부끄러움은 마음이 연약하고 착한 자들에게 많이 나오기에
부끄러워 하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착해 보이기도 한다.
부끄러움은 자신을 돌아보는 내적 충일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회개가 일어나고
앞으로 발전에 대하여 굳은 결심의 계기가 된다.
그러기에 아주 부끄러움이 없는 자들은
위의 묵상 구절에서 보다 시피 '불의'한 자가 될 위험성이 많다.
'후안무치 (厚顔無恥)'
얼굴이 두꺼워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에게 쓰는 사자 성어로
이들의 무서운 죄악성을 단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표현이 아닌가?
강호순 같은 이들은 후안무치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반대가 되는 것도 문제다.
부끄러움이 깊어지고 오래가면,
수치로 변하게 되고
자신을 수치스러워하는 병적 부끄러움은 삶을 어렵게도 한다.
그런 자들의 뇌리 속에 떠도는 언어들은 이런 것들이 있다.
'나는 왜.
나만 왜.
나는 안되어..
남들이
남들은 .............'
이들은 쉽게 좌절에 빠지고 삶이 어려워진다.
사회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 진다.
성공에서 점차로 거리가 멀어지고
자신에 대하여 낮은 자존감을 가지게 된다.
우울과 연민에 쉽게 빠질 수 있다.
그러기에 지나치고 오래가는 부끄러움은 해결 받아야 한다.
문제는 해결 받기 힘든 게 문제고
그러한 부끄러움의 원인이 어딘지 밝히기 힘든게 문제이고
이겨내기 위한 영적 에너지가 많이 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근본원인은 '비교'의식이다.
더 근본 원인은 자신이 자신을 깊이 사랑하지 못함이다.
그 원인은 역시 비교심 많은 부모의 '엄친소'현상에 의한 상처일 수도 있다. ^^;;
자신을 사랑하지 못함은 근본적으로 의지할 진리의 부재이다.
즉,
오늘날 세상에 우울증이 많고 다양한 정신적 문제들이 편만해 있는 것은
사람들과 비교할 기회가 많아서이다.
비교할 기회가 많은 것은 '인터넷'등의 기술의 발달과
거기에 신경쓸 수 밖에 없는 삶의 편안해짐탓이다.
시간이 많아져도 주님을 가까이할 영적 여력, 영적 시간은 상대적으로 부족해짐 탓이다.
오늘 주님은 말씀하신다.
' 아침마다 간단 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거늘 ' 이라고...
얼마나 주님은 당신을 세상에 알리길 원하시는 가?
그 마음은 그러시다.
세상은 온통 마귀의 준동지고
세상은 허상이다.
세상을 쳐다봄은 주님을 멀리할 수 밖에 없는 원인이다.
세상은 천국을 가기위한 여정이고
세상은 연단의 장소이다.
이 연단을 통과하고 나서야 정금같이 나와서 천국의 거민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홀로 방치하지 않으신다.
늘 주님은 자신을 나타내셔서 주님과 동행하실 기회를 주신다.
아침 마다, '간단없이' 즉, 쉬지 않으시고 당신을 드러내시고 인도하실 기회를 주시는데도
불의하기에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기에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불의한 자들,
즉 주님을 모르고 세상에 관심이 집중이 되어
자신들끼리 비교에 의한 '불의한 병적 수치'는 그들을 파멸로 이끌어 가게 된다.
수치에 대하여서 오늘 묵상은 이걸 말씀하신다.
' 부끄러움은 지나치면 못쓴다.
전혀 부끄러움이 없음도 위험하다.
부끄러움을 부끄러워 할 이유는 없다.
부끄러움이 지나침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진짜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은 주님의 공의에서 멀어지는 것 뿐이다.'
난, 어떤가?
부끄러움이 많다.
그 부끄러움의 원인은 무엇인가?
......
진짜로 부끄러워할 이유는 있는가?
주님이 날 사랑하시고
난 아침마다 주님을 인식하려는 노력, 즉 큐티와 묵상을 하고있다.
주님은 나에게 자주 보이신다.
은혜로 , 말씀으로 ,...
그러기에 난 부끄러워 할 이유가 별로 없다.
단, 아직도 주님이 원하시는 공의에 가깝지 못한 행동과 생각을 보일 때가 있다.
그것은 부끄러워할 일이다.
그래.
내가 부끄러워 할 유일한 부끄러움은
주님 앞에 올바로 서지 못함이다.
매일 같이 날 돌아 보아
주님 말씀 앞에 서지 못하였음을 부끄러워 할 일이다.
나머지는 다 주님 앞에 내려 놓겠다.
아침마다 주님은 나에게 공의를 보이시고
당신의 은혜로서 나에게 채워주시고 인도하심에도
부끄러워 함은 내 자아의 승함이다.
그것 마져 아침의 나타내시는 주님의 은혜에 내려 놓을 일이다.
조금더 주님 앞으로 가야 한다.
주님 만이 진리시고
주님만이 내 모든 것을 해결하실 분이시고
주님의 뜻과 반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워 할 일이 없다.
부끄러울 때마다
주님의 뜻 생각하자.
적용
1. 부끄러워 할 일이 무엇인가?
주님께 대하여 무엇을 잘못했다는 말인가?
부끄러울 때마다 주님의 뜻 가운데 날 돌아보겠다.
2. 불의한 자는 주님을 모르는 자들이다.
그들은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부끄럽지 않아하면서 세상의 성공을 위해 치닫는 자를 부러워 할 일이 없다.
3. 성공에 대하여
주님의 주신 축복으로 성공함은 부러워 할 일이다.
부러워 함과 비교함은 차이가 있다.
비교함은 수치의 근 본이지만
부러워 함은 주님의 은혜를 같이 공유함이다.
축복하고 축하해줄 마음의 폭이 넓어지는 일이다.
주님은 자유다.
4. 모든 상처 입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겠다.
주님을 알 기회가 되게 하여 달라고 ..
상처는 주님 만이 회복시키신다.
상처는 주님을 알 기회가 될 때만 의미가 있다.
주님을 알 기회인 '상처'는 큰 축복이 된다.
그 부끄러움을 통하여 남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깊이 있는 긍휼의 소유자가 될 기회가 된다.
모든 아픔이 있는 자들이여... 주님으로 축복 받으라.
5. 성경 일곱장 읽겠다.
기도
주님
아픔이 어쩌면 기회이기도 합니다.
아픔없는 출세는
불의한 자가 되기 쉬우니 오히려 큰 악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부끄러움에 대하여 묵상을 하게 하셨습니다.
수치와 외로움은
저 주하인의 오랜 숙제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아픔과 싸우는 동안 주님을 깊이 아는 기회이기도 하였습니다.
앞으로 그러겠습니다.
부끄러움은 내려 놓겠습니다.
부끄러울 때주님을 생각하겠습니다.
주님을 알면서도 주님의 뜻 대로 살지 못해 이런 부끄러움이 오지 않았는가
자신을 다시 돌아보는 기회로 삼겠습니다.
주님을 알면 부끄러움이 사라질 것을
부끄러움은 주님의 것이 아니고는 다 쓸데없는 것임을 알겠나이다.
주여.
감사합니다.
주님을 알게 해주시고
주님으로 인하여 수치를 벗어나게 해주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려 노력하겠나이다.
도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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