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내 안의 소(牛) ( 출 21:28-36 ) 본문

구약 QT

내 안의 소(牛) ( 출 21:28-36 )

주하인 2009. 5. 23. 12:03

 

 

제 21 장 ( Chapter 21, Exodus )

 

 

진료실 창가의 풀 .

 

밖에는 비와 바람이 불어도

한가롭고 여유롭다.

 

내 속은

조금 만 자극이 주어져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소'가 한마리 있는데...

 

내 능력과 상관없는,

풀같이 힘없는 나라도

이제라도

주님 안에서 만큼은

흔들리지 않고  

치 받지 않는

고요함을 유지하고 싶다. ^^*

 

 

 
28.  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그 소는 반드시 돌에 맞아 죽을 것이요 그 고기는 먹지 말 것이며

     임자는 형벌을 면하려니와  
29.  소는 본래 받는 버릇이 있고 그 임자는 그로 인하여 경고를 받았으되 단속하지 아니하므로 남녀간에

      받아 죽이면 그 소는 돌로 쳐 죽일 것이고 임자도 죽일 것이며 
30.  만일 그에게 속죄금을 명하면 무릇 그 명한 것을 생명의 속으로 낼 것이요 
31.  아들을 받든지 딸을 받든지 이 율례대로 그 임자에게 행할 것이며  
32.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에 맞아

      죽을지니라 
33.  사람이 구덩이를 열어 두거나 구덩이를 파고 덮지 아니함으로 소나 나귀가 거기 빠지면  
34.  그 구덩이 주인이 잘 조처하여 짐승의 임자에게 돈을 줄 것이요 죽은 것은 그의 차지가 될지니라  
35.  이 사람의 소가 저 사람의 소를 받아 죽이면 산 소를 팔아 그 값을 반분하고 죽은 것도 반분하려니와  
36.  그 소가 본래 받는 버릇이 있는 줄을 알고도 그 임자가 단속하지 아니하였으면 그는 소로 소를 갚을

      것이요 죽은 것은 그의 차지가 될지니라 
 
 오늘 묵상 구절을 읽어가며

몇가지 당혹스러운 점이 있다.

 

 아니, 왜 '소'에 대하여 이리 많은 구절을 허용하실까?

혹시 소가 차지하는 그들 고대 중동인의 삶에서

소가 차지하는 물질적 , 심리적 중요성을 인정한다고 한다고 하여도

그 소가 묵상을 대하는 모든 현대인에게도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큐티의 속성 상 개인적으로 주시고자 하는 '소'에 대한

다른 상징성 및 개별성의 의미는 무엇일까?

... 등이다.

 

  배울 점이 몇가지 눈에 띄기는 한다.

 소의 반응에 따라 여러가지 해결 방법을 제시한 것이

하나님의 속성의 그 '세심하심'을 읽을 수가 있다.

그 자애로움이시다.

물가에 내 놓은 작은 아이를 쳐다보시는 듯하는 말씀이 느껴진다.

 또한

계속 나오지만 '종'이나 '자녀', '아내' 등에 대한

세세한 배려, 즉 인격적 고려에 대한 문제다.

수천년 전의 중동에 저러한 인격적 고려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인간의 무지함을 돌아보아도( 가둬놓고 기르면 인간은 개와 돼지와 비슷하게 산다),

역사의 발전을 보아도( 수천년 지난 르네상스 이후에 되어서야 인간의 권리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다. ),

그 시대 시대상을 보아도

저런 인간의 권리를 배려한 글이 인간의 독자적 힘으로 쓰였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기적이다.

  난, 이것만 보아도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임을 알 수 있다.

 소의 이야기에서 별거를 다 추출해낸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주님의 뜻안에서 바라보면 소름이 끼치도록 놀라운 것들을

성경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성경은 때로는 깊은 문학서 같기도 하고

때로는 인간 심리를 깊이 분석해놓아 그것을 인간의 삶속에서

예화로 재 구성해 놓은 듯하기도 하다 .

어떤 때는 그 때 수천년 전의 사람들의 심리의 흐름이

그대로 시공을 격하고 이 시대로 넘어와 공감이 되는 듯 놀랍기도 하다.

 때로는 사랑의 진수를 보여 주는 한편의 드라마 같기도 하고

때로는 윗트가 보여지기도 하다.

물론, 예언이나 교육이나 ....성경 본연의 신학적 내용을 떠나서 말이다.

 

 오늘

'소'에 대한

이유없는 많은 지면을 써가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주님과 '나' 만의 개인적 말씀으로 들여다 보면

그 '소'가 어쩌면 내 속의 좌충우돌 하는

영혼의 왜곡된 움직임을 어찌 그리 닮아 있는 지 하는 생각이 든다.

29절의 ' 소는 본래 받는 버릇이 있고 라 하는 말에 '허~~ '했다. ㅎㅎ

 이 오래된 불신 시절의 습성은

우리 'K'씨 집안 내력의 급한 '불'같은 성격을 유전적으로 받은데다가

갈등이 더해지고

일찍 어려서 부터 서울로 유학와 외로움이 가미되고

남들보다 조금 더 머리가 빨리 돌아간다는

교만함이 '조미료'로 가미되어 이루어진 비빔밥같은 인격형성 탓으로

틈만 나면 이리 받고 저리 받아 왔었다.

 불신자 시절은 상처와 도덕적 성향으로 인하여

그러한 급한 내가 당혹스럽고 힘들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뛰어난 내가 누릴 수 있는 ' 어쩌면 당연한 호통이라 생각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니 .........원.ㅎ.ㅎ

 

 그러다가 주님을 영접하고

그 모든 것이 잘못임을 확실히 알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테두리 안에서 가두고자 하니

이 '소'는 내가 원하는 통제를 그리 달가워 하지 않는 듯

이 쪽에서 부딪치고 저쪽에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가끔은 마음이 많이 힘이 들었었다.

특별히 이럴 때다.

가족 안에서 갈등이 있을 때,

주님 안에서 용서하고 평화로써 식구들을 다스리고 치리하려 하지만

내 안의 소가 들이 받아 '노'를 발하고야 말았을 때,

나는 정말 힘들었다.

이전의 그냥 힘들때 보다

주님의 말씀하시는 내 영혼 속의 사랑의 테두리를 침범해 버리고 말았다는

깊은 자괴감이 날 혼란 스럽게 해 왔었다.

 주님의 테두리가 어찌나 강하고 그 테두리에 부딪힌 충격이 얼마나 큰지

난 그럴 때 '주님을 괜히 믿어서 왜 이런 마음 고생을... '하며

기도원 깊숙한 골에 들어가 소리소리 지를 때가 많았었다.

  

 치받는 소가 내 속에 살되

그 소는 '목장' 속의 소가 아니고

'투우장' 속의 원망과 무지의 소였다. ㅎ

 

 말씀을 묵상하기 시작하고 수년.

이제는 내 영혼의 테두리를 부딪는 소의 부딪침이 약해져 간다.

부딪칠 때마다 내 몸과 내 정서에 충격을 주던 그 어려움이

훨씬 덜해져 가기는 한다.  

 말씀 안에서 내 영혼은 '목장'으로 변화 되어가고 있나 보다 .

 투우장을 리 모델링해서

딱딱한 맨 바닥은

푸른 풀과 식물로 그득한 생기 넘치는 땅으로 변하여 가고

과격하고 피 튀던 모든 소가 부딪히며 흘린 피의 죄 흔적을 묻힌 벽이 철거되어 가서

대신 아직 완전치는 않고 비록, 찔리는 철조망으려 쳐가져지고는 있어서

서서히 영혼 속의 현상, 소와 그 소가 사는 내 영혼의 전경이 맑게,

조금씩 들여다 보이고 있는 듯하다.

 조금 더 있으면 그 광장 어디엔가

하얀색 여유로운 집도 하나 짓고 싶다.

거기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파티도 하고 그들을 교육도 하며

내 속의 검고 사나운 눈을 가졌던 소가

어찌 목장의 우유 내는 젖소같이 변화했던 가를

그 불가능한 종별 개량에 성공했는 지

하나하나 가르치고 싶다.

저녁이 되면 하늘의 별을 보여 주고

 지글거리는 석쇠 위의 고기도 구워주고

하나님 찬양을 들려 주고 싶다.

그들과 나눈 교분을 기념하는 사진을

내 달란트를 통하여 잘 찍어 내고 싶다. ㅎㅎ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

그 '소'의 정체는 무엇인가?

주인은 누굴 말하는가?

종과 남들은 다 누굴 지칭하는가?

 

 소는 위에서 썻듯이 영혼 속의 원치 않는 죄악성을 말하는 것 같다.

소가 치받는 성질을 지녔다는 뜻은

그 원죄적 속성에 대하여 말하는 것으로 보아

영혼 속의 죄성과 성장 환경과 자신의 선택을 잘못함으로 방치되어 키워져 온

인간 영혼 속의 '죄악성', 사단의 자극을 말하는 듯하시다.

 그리고 주인과 그 책임에 대하여서는

그러한 죄악성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니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자괴'할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받아 들이라는 것이다.

 내 죄를 인정하고 받아 들이는 순간

사단의 장난, 즉 소가 내 영혼에 부딪힘이 들어나고

사단의 정체가 들어나면 그들의 발호에 의해

아플 때 아프기 보다는 휘둘리지 않을 기본 틀이 갖추어 진다.

( 소가 건드릴 때마다 , 인식하지 못하면 늘 아프다.

  아픔이 심한 사람들은 세상을 향해 도발하게 된다.

  그것이 지나치면 자신을 향해서도 도발하게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자살'이다.

  오늘 아침 N 전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들으니

  그 분 속의 소와

  그걸 인지하지 못한 주인인 그 분과

  결국 터뜨려 버려진 현상을 보고

  그런 생각을 더 할 수 밖에 없다.

   우울한 하루다. )

그런 다음 자꾸만 부딪혀 올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저러한 보속의 어떠한 행위를 해야 한다.

구약시대의 저러한 말씀을 모두 글자 그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본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스스로 선택을 해야 한다.

내 죄악성이 준동하려 할 때 그 죄악성이 발호하지 못할 선택을 해야 한다.

만일 자제하지 못해 놓쳤다면 적절한 방법으로 회개해야 한다.

그 적절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얼른 가지고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 해결되지 않는 것은 주님의 뜻에 따라

직접 찾아가 배상하는 것이 옳을 때도 있다 .

어제 저녁 담임 목사님의 설교 중 은혜 받은 것이 있다.

 디베랴 바닷가의 예수님의 베드로와 아침 식사 사건에서

예수님이 먼저 베드로를 찾아오신 것처럼

사랑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 보다는

'용서할 힘'이 있는 자가 찾아가서 '용서'하는 것이란다.

그렇다.

죄를 지으면 죄를 지은 자가 먼저 찾아감이 옳다.

아니어도 '소'가 테두리를 더 부딪치는 게 싫으면 먼저 찾아가 화해를 청함도 옳다.

 

 주님은 아신다.

우리 안에 어떤 소가 자리 잡고 있었고

그들이 얼마나 치받기를 잘하는 지를..

따라서 소가 부딪쳤다고

그래서 우리가 죄를 외부적으로 지었다고

당장 혼내시는 분은 아니시다.

 그 소가 부딪치게 방치한 선택을 안타까워 하시고

그 후의 깨닫지 못하는 우리 '소'주인의 무지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시다.

그리하여 자꾸만 포악해져 가는 세대를 아쉬워 하시고 계신다.

그 분은 우리가 얼른 깨닫고

회개하고 용서하길 바라신다.

주위 사람을 배려하길 원하신다.

서로 주님 안에서 권면하고 사랑하시길 바라시는 것이다.

그게 오늘 주시는 말씀이시다.

 

 

기도

 하나님

참 어려웠지만 재미있습니다.

내 안의 소.

얼마나 미련하고 부딪기를 좋아하는 죄성인지요?

그 죄를 깨닫고 인정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고민은 주님께 내려놓고

그 죄를 가진 나를 용인할 수 있는 제가 되길 소원합니다.

그러나 그런 나를 가만히 두고 있기 보다는

주님 안에서 하나하나 변화시켜가는 선택을 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내 영혼 속에서 그들 죄성이라는 이름의 '소'가

내 영혼의 주님 울타리를 들이 받는 횟수가 줄어 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덜 아프고

남들을 덜 아프게 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간절히 바랄 것은

투우장 같던 내 영혼이

커다랗고 아름다운 목장 같아지길 소원합니다.

거기의 소는 순하고 풀만 뜯어 먹으면

소출을 내는 소이길 원합니다.

이제 울타리는 제껴내도

울타리 밖으로 나오지 않는 목장의 주인이길 소원합니다.

주님 도우실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한가로운 토요일을 축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