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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

구속의 자유 (출 20:1-17 )

주하인 2009. 5. 19. 15:45

제 20 장 ( Chapter 20, Exodus )

 

 

 

 

세미하더라도

주님이 원하시면

순종하자.

 

주님의 구속은

자유다.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시내산 정상에 나타나신 하나님이

모든

말씀으로 일렀다고 하신다.

 

 왜

모든

말씀이실까?
왜 그리 비장하실까?

 

 주님이 주시려는 이제 부터의 말씀이 중요하시기에

그런 표현을 쓰시는 것일 것이다.

 이 십계명은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웬만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수 있을 만큼 유명한 말씀이시다.

그러면서도 그 면면을 보면

누구나 지킬 수 있고 지켜야 하는 기본 '도덕률'과 차이가 없다.

세상이 지켜져 나가기 위해서는 기본이 될 ..

즉, 어느 정도의 인식 만 가지면 누구라도 쉽게 지킬 수 있는 말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을 하시는 데 그리도 비장하실까?

 주님은 구약 시대 내내 되풀이 되는

인간들, 그 중에서도 선택받았다는 선민 이스라엘 민족의

십계명을 범하는 죄악을 모르고 계셨던 것일까?

그래서 저렇게 신중하게 주시는 것일 것인가?
 알고도 속는 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도 자식에게 기대를 하는 마음이 일면 있으셨을지 모른다.

 지금와서 나를 돌이켜 생각하면

주님은 모르시는 것이 아니심을 알 수 있다.

우리 인간들이 지키지 못할 것을 뻔히 알지만

그럼에도 그런 계율의 틀이 주어 져야만

그 속에서 실족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쳐질 것이고

그러면서 아파하고 그러면서 지켜내면 기뻐하고

주님께 드리는 영광의 테두리로서

인간 '주하인'을 포함한 구속 받은 모든 자들이

살아갈 기준이 되기 때문이며

그러할 우리를 쳐다보며 기다리실 기대감으로

10계명을 주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다림 동안

자식의 아픔을 볼 아버지 하나님의 가슴 조림은 얼마나 심하셨을까?

 새삼 눈물이 핑 돌려 한다.

수도 없이 많은 날들을,

세상의 흐름을 뻔히 알면서도

당신의 사랑 때문에

가만히 참아 기다리시다가

때가 되어 도저히 한계를 침범하여 넘어서는 인간들이 가련하여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그 강렬하고 강력한 사랑이 느껴져서 이다.

 

 아내가 새벽교회 다녀와서 전한 목사님의 설교시다.

' 어느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학교 담벼락을 부수고

 아이들에게 온전한 자유를 선언하니까

 아이들이 교실 안에 꽁꽁 숨어서 나오지를 않더란다.

 그래서 다시 담벼락을 치니 그제야 나와서

 운동장에서 열심히 뛰 놀더라는 이야기다.'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맞다.

온전한 자유는 '구속'을 전제로 한다.

그 구속은 구속을 시켜 주시는 자의 사랑을 느끼면

엄청난 자유가 된다.

 그 하나님은 당신의 계명을 지키면 천대까지 은혜를 주신다 하신다.

 

 둘째 아들이 '의경'지원을 하고 열심히 체중을 조절하고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기다리는 시간 동안

아이를 가만히 지켜 보았더니 아이가 힘들어 한다.

아이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기다리는 동안의 의미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시간표를 짜게 하고 적절한 제재를 했다.

아이가 나중에 하는 말.,

'쉬는 게 너무 힘이 들었어요.'

가끔 아이에게 야단을 치게 된다.

물론 아직도 고쳐야할 내 문제로 인하여

아이에게 과한 야단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면서 마음이 많이 힘이 들다.

 하나님이 세상의 흐름을 다 아시고

그 들 인간들이 계명을 안지킬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10계명을 주실 때 그 마음이 어떠하셨을까 짐작이 간다.

그 분의 '이 ' '모든' '말씀'이라는 강조의 표현이나

시내산 정상에서 무섭고 강렬하게 임하는 의중을 볼 때

부족하고 실망스러웠을 아들에 대하여

기대하시고 또 마음을 다잡으시는 그 마음이

참으로 이해가 가며 가슴이 아프다.

 끝까지 참으실 하나님.

그 하나님이 또 한번 사랑으로 10계명을 내리신다.

 

 아침에 일어나 아들을 데리고 잠시 묵상을 하고 나왔다.

택시를 타고 출근했다.

가만히 뒷 자석에 앉아 묵상하는 데

하나님 아버지의 그 마음이 가슴에 온다.

나도 아이를 더 믿고 더 믿어야 한다.

나도 하나님이 주신 삶의 제한을 너무 괴로워 하기 보다는

아들로서 구속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뻐해야 한다... 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화..'한 느낌이 든다.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데도 다가오는

박하사탕 같은 - 처제가 박하향의 냄새를 맡는다 하여 그런가 했는데

내 가슴을 쓸고 내려오는 주님의 위로의 느낌이 그렇다.

잠시 스치는 감각의 착각이 아니라 오랫동안 뚜렷한 느낌으로

마음이 확 펴지는 듯한 느낌의 싸~한 감동이다.

 주님이 오랫만에 묵상을 제대로 했구나 하시는 듯하다.

아들에게 어제 저녁 조금 강한 말을 한

변함없는 포악의 죄를 범한 직후임에도 그러신다.

 

 오늘 날 세상은 마구 마구 뒤집힌다.

공영방송에서도 '막장 드라마'가 뜬다.

시어머니를 때리고

남편이 부인을 물속으로 빠뜨리는 위협을 감행하고

이혼하고

남편을 두고 결혼을 하고.........................

그리고는 '추세'라 하면 끝난다.

'포스트 모더니즘......'이라 한다.

포스트 무덤이즘' 이라 하지..

무덤 뒤에 그들에게 무엇이 달려 있을까?

 아니 굳이 무덤뒤에를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내 직장인 '산부인과' 진료실의 변화만 봐도 그렇다.

예전에는 '클라미디아'라는 성병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진단 기술의 어렴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요즘 같은 빈도로 찾아볼 수가 없는

유례없이 많은 상태의 병이다.

 임질, 매독, ..등과 더불어 '성관계'의해서만 옮기는 질병.

이전에는 '유곽'에 계시는 분들만 걸리던 병이

이제는 너무도 많다.

정말 너무도 많다.

학생들.

대학생은 물론이고 고등학생들도 많다.

가정주부도 많다.

병의 흉악도는 '도'를 넘친다.

배가 아파서 낫지 않아 산부인과로 전과되어

약을 쓰다가 반응이 없어 결국 '수술'로 전환하여

복강경 수술로 들여다 보면

클라미디아라는 '박테리아'보다 적고 '바이러스'보다는 약간 큰

이 적은 균이 유발하는 '파괴력'이 상상을 초월한다.

 간과 위가 뱃가죽에 들러 붙어 있고

나팔관에 고름이 그득차있고

장유착이 심하고

나팔관이 막히고

.....................

문제는 이 병은 증상을 느끼면 벌써 심하게 진행된 상태라는 것이다.

 지난 주만 '세분' 수술을 하셨다.

작년 까지만 해도 일년에 할 수치의 환자다.

우연히 발견되는 클라미디아 균이 아침에도 발견되었다.

 이 균을 홍보하려는 의미가 아니다.

그 만큼 세상이 더러워지고

그 세상은 알게 모르게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이다.

환경은 안그런가?

 진료의 현장에서 보면

벌써

종말 process는 시작된 것처럼 느껴진다.

 이 모든 것이 수년 내에 급작스럽게 진행된다.

 

그렇다면 왜 그런가?

모든 게 '구속'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 탓이다.

포스트 모더님즘이라는 '자기 기준' 탓이다.

어른이 없다.

모두 자기가 왕이다.

아이들이 무섭다.

어른은 힘이 없이 도태되어 간다.

누구도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들은 공허해서 더욱 끼리끼리 뭉친다.

잘못된 뭉침.

 

결론은 이것이다.

'구속'이 없는 자유는 죽음의 지름길이다.

구속이 없는 기쁨은 '환락'에 지나지 않는다.

완벽한 자유는 '주님에 의한 구속'의 자유다.

 

 

 아침에 진료를 하고 진료실 문을 나가려는 분에게

그 만 오라고 말씀 드렸다.

너무도 감동하여 나에게 '정말로 감사하다'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드린다'신다.

그 분은 말로 안되니 '글'로 그리 쓰신다.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참 맑다.

만 63이신데 50대 중반으로 밖에 안보인다.

많이 봐도...

그 분은 별 힘든 병도 아니다.

단순한 '질염'이다.

그럼에도 그리 감동하신다.

그 분은 '청각장애우'시다.

 오늘 묵상 글을 잠시 구상하던 중 그 분의

바짝 다가서서 천진스럽게 기뻐하시며 쓰는

그 글의 필체와 그 분의 웃음을 보며

가슴이 확 뚫리는 듯하다.

눈물이 돌려 한다.

 이 분은 육신의 제한점에 갇혀 있다.

귀가 들리지 않는 구속의 육체에 갇혀 있으시다.

그러나, 그 분은 절대로 갇혀 있지 않으신 표정이다.

맑고 젊어 순진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 분을 뵈며

그 감사함의 어쩔 줄모르는 맑은 얼굴을 뵈며

'구속이 고통이 아니다.

 올바른 구속은 '자유'다.'라 알 수 있었다.

 

 

 자유를 천대까지 누리는 축복.

그것과 더불어 일생의 모든 먹고 사는 문제가

주님의 손에 의하여 공급이 되고

그 양의 크고 작음이 내 자유로운 심령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현상.

그것이 진정한 천국 민의 기본 소양이 아닐까?

그것을 연습시키시는게 이 땅의 삶이 아닐까?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고난과 고통은  기쁨이 될 소지가 되지는 않을까?
주님이 주시는 십계명은 그 고난의 가장 적은 한계선이다.

그 한계가 내 육신의 성격에 맞지 않는 다 하더라도

주님의 명령이시니 순종하자.

 

 그런 하루가 되길 선택한다.

 

 

적용 

1.  주님의 십계명 주시는 마음을 묵상하자.

    그 사랑과 그 조심스러우심과 그 인내의 시작임을 아실

  그 마음을 묵상하자.

 

2. 아들에게 조금  더 온유하자.

  주님이 십계명을 주시고 인내하고 참으시며 권고만 하시던 것 처럼..

 

3. 십계명 중 부족한 부분을 더욱 지키려 노력하자.

  부모님을 더욱 공경하자. 

  나도 모를 선의의 거짓까지 하지 않도록 깨어 있자.

  간음하지 말라.      마음으로도.. .

  살인하지 말라.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하는 것이다.

                           분노를 버리자.

 

4.  인내하자.    

    무조건 삼초만 인내하자.  

    무슨 일이든.. 아무렇지 않기로 하자.

   주님의 뜻 안에서..

 

5. 성경 일곱장 읽겠다.

 

6.  십계명을 온전히 지키지는 못해도 실망하고 좌절하지 말자.

  또 일어선다.

  또 일어선다.

  그 것이 주님이 나에게 보시고자 하시는 마음이실 것이다.

   쓰러지지 않을때까지 일어나자.

 

 

 

기도 

주님.

오늘은 십계명을 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묵상했습니다.

그 놀라운 전능자 께서 지키지도 못할 것을 주시는

그 마음을 읽게 해 주십니다.

그 십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

우리의 마땅하게 할 바이지만

이 세상 속의

이 영혼 속의 거침 때문에

잘못된 기준 때문에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이 이러석은 삶을 뉘우치고 회개하게 도우소서.

그리고 주님의 그 안타까워 하시는 사랑의 마음을 읽게 하시고

주님 앞에

십계명 안에 서려는 노력을 기뻐하시는

그 평강의 에너지를 받게 하소서.

부족한 저를 붙들어 주소서.

그 마음을 제 자식과 가정과 이웃에 베풀도록 절 가르치소서.

주여.

그냥 두지 말아 주시고

저 혼자 방황하게 하지 마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아침 안개 눈 앞 가리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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