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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

慰安(애3:19-39)

주하인 2006. 3. 17. 08:30

(예레미야 애가3:19-3:39)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삶에는 고난이 숙명입니다. )

 

 

 받아왔던 고난은 쓰디 쓰다.

쑥은 입에 쓴 것을 상징한다.

담즙 즉, 담낭에서 쓸개라 불리는데 여기서 나오는 담즙은 쓸개에서 나오기에 쓰기가 말도 못한다.

 그것은 지방덩어리를 소화시키기 위한 강력한 분해 효소로 이루어져 있기에 역류되면 식도를 태워서 상당히 위험한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러니 쑥과 담즙이란 얼마나 어려운 상황인가 ?

 

이처럼 주님은 우리의 고통과 고난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다 알고 계신다.

 

 

 

 

20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 이게 편지함이라네요 ~ ^^* )

 

 

 어제 '아버지 학교'에서 집사람에 대한 편지를 쓰란 숙제가 있어서 잠시 과거를 회상해보았다.

 참으로 잘하고 행복한 일보다는 고통스럽고 힘들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고 '낙심'되던 일 뿐이었던 것처럼 기억되어 되새기고 싶지 않은 시간 들이었다.

 

 어렵게 성사된 결혼

 단칸 방의 생활

 둘째아이 임신 시 첫아이의 3개월 간의 중이염

  의료 사고

  ..............

 

 자기 충만, 욕구불만 덩어리였던 나는 많은 울화를 주위에 뿌려대기도 했다.

과거는 돌아보면 실패의 연속으로 인한 낙심 덩어리 인 듯 싶기만 하여 돌아보기 싫은 과정이었다. 

 

 

 

21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 하나하나 힘들었던 기억 들이 연결되며 그 아픔은 이슬같은 소망으로 응결된다. )

 

 

 그럼에도 그 기억하기 조차 싫은 과거의 기억들은 마치 단편 영화처럼 잘려져 기억나며 그 사이사이에 우리 집사람이 서 있었다.

휘청대는 날 고비마다 붙들어 주고 날 예수님 영접하기 위해 눈물로서 기도하고 늘 위로해주고 인내해 주는 사랑이다.

 너무도 귀중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주님이 날 위해 예비한 사람이었다.

 

 퍼즐처럼 이어지던 그 단편 영화는 하나로 하나하나 이어지며 오늘에 이르렀다.

도저히 인격적으로 교회에 다닐 수 없을 정도의 교만한 사람

강팍한 사람

그 주하인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때보다 현실 소망적인 면에서 남아 있는 기대는 하나도 없지만...

그 과정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구원받고 약 반 정도가 정결화된 나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힘빠지고 능력 없고 현실적 희망은 사라진듯 보이지만 알수 없는 기쁨이 날 은근히 채우고 있다.

 이제는 조금씩 그러한 은근한 기쁨을 '소망'이라 표현해도 될 듯한 느낌이 들어진다.

 

 과거는 돌아가기, 정말 회상하기도 싫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하여

세상의 유혹이 끊어지고

정제되지 못한 야생마 같은 내 자아는 풀이 꺽여 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난 조금 더 주님 나라에 합당할 듯하게 느껴진다.

이제 곧 주님이 주시는 자유와 평강을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을 듯 하다.

나도 천국의  소망이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모든 것이 주님의 자비와 긍휼 덕이다.

 

 

 

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아침에 7시 30분에 예배가 있었다.

5분 정도 밖에 큐티를 할 시간이 없어 '생명의 삶' 책을 슬쩍 흩어 본 후에 책을 들고 지하에 '샘누리 홀'로 들고 내려갔다.

 찬양을 하면서 눈으로 흝어 내려갔다.

 이 구절에서 눈이 멈춘다.

 

이것이 란다.

주의 자비와 긍휼이 ...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

 

이 아침이 향기롭다.

주님은 큐티와 내 정서를 정확히 일치시키신다.

항상  ~

 

 그 정서가 오늘은 이렇다.

 

" 아침마다 너 주하인은 늘 새롭다.

 난 성실하다.

 난 네 하나님 아버지다. "

 

 목사님 설교가 이렇게 행해지신다.

"우리는 늘 면전에 모시는 주님을 의식하고 살아야 ~ "

 

 내 정서와 큐티의 말씀과 예배 인도하시는 목사님의 설교가 하나로 들어 맞는다.

 

아 ~ 기쁘다

주님은 살아계셔서 완전한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로서 날 만지신다..

주님의 성실이 크십니다 !

 

 

 

 

25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거미는 인내를 가지고 먹이를 기다립니다. )

 

 회상하면서 드는 확신이 있다.

 

오늘의 날 만드시기 위해 주님은 그렇게도 인도하셨다.

 내가 아무리 내 뜻대로 무엇을 하려 해도 선하지 않으면 성사되지 않는다.

고통은 주님이 날 인도하시기 위한 도구다.

그분은 선한 쪽으로 가도록 날 고통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시는 것이다.  

 

이제 잠잠히 기다리면 된다.

어렵지만 ..

주님께서 약속의 말씀을 하신다.

그게 좋다고 하신다.

 

 어두워도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기만 하면 주님이 알아서 도우신다니.. 소망이 넘치지 않는가?

할렐루야.

 

 

 

 

27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28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다시 한번 확인하신다.

젊음은 '멍에'를 매는 시간이다.

 누구도 내 젊음의 실수를 안하지 않고는 성장할 수 없다.

요셉같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착한 분도 입조심 못하는 어리석음을 보이진 않았던가?

다윗같은 분도 끝없는 주님의 임재와 지도에도  불구하고 젊었을 때는 어리석은 실수를 많이 하지 않았던가?

 젊음은 젊은 자체가 멍에다.

젊음의 멍에는 고민할 필요도 걱정할 이유도 없다.

젊었을 때의 고난은 주님을 생각하면서 기쁨으로 받을 수있는 것이다.

 

주님은 잠잠히 받으라 하신다.

인내를 하라 하시는 것이다.

주께서 허락하신 고통이다.

 

 

 

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 한손으로는 징벌이시지만 다른 손으로는 사랑이시다. )

 

 그토록 무섭게 질타하시던 어젯까지의 징벌이 본심이 아니라고 고백하신다.

주님께서..

 

 진짜로 아버지 같으신 분이시다.

곳곳에 그 분의 사랑이 진하게 뭍어 나온다.

살아계신 아버지의 끈적한 감동이 번져 나온다.

 

 혼내는 유다가 그리도 안쓰러우셔서 예레미야를 통해 달래도록 부탁하시더니 이제는 주님이 달래신다.

 

" 그게 본심이 아니었다." 하고....

 

 

 

 

기도

 

주님.

고통 스러운 일이

혼자 받는 외로운 일 만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절해의 어두움이

혼자 만이 아니었다고 위로하십니다.

 

이제 어둠이 지나가면

아침의 기운으로 인해

바로 동굴 저편에

어렴풋이 서 있는 눈물 흘리는 친구의 모습이 보이는 것 처럼

그리 주님은 늘 제 곁에 서 계셨음을 이제야 알게 됩니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심이라라고

주님은 다가와

날 껴안고 위안하십니다.

 

이제 곧 아침 해가 둥실 떠오르면

밤사이 추웠던 몸이 녹아나고

주위를 쌓고 있던 온갖 절망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질 줄 압니다.

 

감사하신 아버지

주님의 눈물겨운 사랑많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소망은 가장 어두운 먹구름 속에서도 하늘을 볼 수 있게 해준다.

- 토마스 브룩스 
 

 

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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