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남을 위해(애3:1-18) 본문
(예레미야 애가3:1-3:18)
1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당한 자는 내로다
( 이 정도의 공감이라면.. 화우 ㅎㅎ )
여호와께서는 '유다'를 징벌하신다.
그런데 예레미야께서 대신 '내'가 아프다고 하신다.
'공감'능력이 엄청나신 분이시다.
8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 왕따는 무섭습니다 !!)
무서운 문장이 계속 나열 된다.
개인적으론 나는 ' 거부'란 단어에 굉장히 민감하였다.
어렸을 적부터 커온 가정환경이 주로 'Blame'하고 'Reject'하는 언어 구사와 단정적인 말투 때문인지 남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다.
그런데, 오늘 예레미야 선지자께서 눈물 날 고통을 나열하였음에도 이 구절에서 가슴이 딱 막히는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요새는 그렇다.
예전과 하나도 달라질 것 없는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오랫동안 평안을 누린다.
아니..
솔직히 기쁘기 까지 하다.
그 이유는 이렇다.
내가 모든 걸 주님께 맡기는 연습을 하였다.
환경조차 난 어찌 할 수 없음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주님이 선하게 이끄실 줄 믿기 시작하였다.
실제적으로..
오늘의 이 구절에서 가슴이 막히는 이유가 그런 것이다.
만일 내 기도가 주님께 거부당한다면...
그래서
옛날 아버지에게 형한테 물려 받은 흰색 반바지와 하얀색 타이즈를 입기 싫다고 아침 내내 울다가 디지게 두드려 맞고 억지로 학교에 내몰리던 그 거부의 아픈 감정( ㅎㅎ ^^;;;)이 다시금 올라오는 것 같은 생각.
거기다가 주님이 안도우시면 이 어려움을 어찌 헤쳐 나갈까하는 암담함.. 이 가장 두렵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신의 '죄'가 아닌 일에 극도의 고통을 겪고 계시다.
14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
( 남에게 손가락질 하고 왕따 시키는 사람들이 당하는 사람 만큼 자살률이 높답니다. ^^;;; )
이상한 일이다.
회개하고 눈물 흘리고 고통 받고 손가락질 받아야 할 게 누군데 오히려..?
오늘 아침 본원에서 묵상한 구절이 마태복음 21:15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
라고 되어 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나귀타고 입성하셔서 하신 가장 먼저의 행사가 성전 안의 장사치를 분을 내시면서 쫓아낼 때 아이들이 "호산나" 하며 노래하자 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분냈다는 얘기다.
인간들의 눈으로 보면 그처럼 어지시던 예수께서 별것 아닌 일에 화낸 것도 이상하고, 화낼 때 성전에서 어른도 아닌 아이들이 노래와 환호로 '호산나'라 외친 장면도 눈에 걸리고 이상하다.
짜증날 만 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그 진실을 누가 알 수가 있는가?
그들은 진실을 오히려 이상한 일로 보는 것이다.
깨어있지 못하면 이렇다.
감각으로 판단하면 이렇다.
아름답고 예전부터 해오던 일이 아니라 싫다고 판단하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예레미야께서는 그들을 위해서 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들은 그들의 받아야 할 고통을 오히려 손가락질 하고 웃고 있는 것이다.
그분의 심사가 너무 깊다.
일상에서 내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고 손가락질 하는 어리석음은 범치 않고 있지 않는가?
난 남을 위해 얼마나 눈물을 흘릴 수 있는가?
남의 고통이 나에게 올 때 난 얼마나 인내할 수 있는가?
예레미야나 예수님 처럼 불쌍히 여길 수 있는가?
17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잊어버렸음이여
18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오직 희망은 하나님이신데...)
여호와의 선지자께서 '실망성 발언'을 하실 정도니 그 고통이 얼마나 크신가?
직접 하나님과 대화하시는 분이...
전혀 합당치 않게 '여호와께 대한 소망'이 끊어졌다고 하니 그 얼마나 고통이 심했으면 저럴까..!
어제 묵상 중 초저녁에 두손 들고 남을 위해 눈물을 쏟으라는 메시지가 있으셔서 기도원에 올라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중보를 잘 못한다.
주님께서 원하시기에 했지만 가슴깊이 하지는 못해왔다 .
그동안...
'아니 ~ 내 속에도 깰 정결치 못한 것이 얼마나 많은데..?' 라는 것이 내 속의 소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동안 나를 인도해오셨던 그 분의 손길이 있으시라는 생각으로 수요예배 겸 올라갔다.
속으로 두시간 정도의 시간을 어찌 남만 위해 기도하며 때워..? 하며..
많은 깨달음이 있었다.
중보는 남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었다.
중보를 통하여 오히려 더 많은 깨달음과
중보를 하는 정도에 따라 깊은 평화가 마음 속에 밀려왔다.
집사람이 흔들어 가자고 조르는게 안타까울 정도 였으니..
예레미야 선지자의 '공감적 중보'가 예전에는 전혀 가슴 깊이 믿기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눈은 조금 다르다.
'남을 위해서 저럴 수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한다.
중보를 하면
내 영혼이 정결해진다.
기쁨이 넘친다.
더 깊은 통찰이 생긴다.
목적이 생긴다.
힘이 넘친다.
예레미야의 눈물과 남의 손가락질에서 자유로움, 기이한 그들의 반응에 대한 여유로운 반응이 그걸 증명하는 것이다.
예레미야 께서는 '고통'을 넘어 주님을 온전히 만났다.
적용
1. 어이없는 일이 벌어질 때 주님의 뜻을 먼저 생각한다.
2.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자
3. 그들을 위해 짧게라도 기도한다.
4. 기도한다.
기도
주님.
우리의 인생에서
고통이 필연이라 하십니다.
어이없는 일이 당연이라 하십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우리의 내부를 향할 때는
그것이 고통일 뿐이고
남들에게 원망으로 변할 때
그것은 지옥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너무도 힘들어서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끊어진 듯하다고 외치는
예레미야의 고백과 같은 고통이 제 주위에도
저에게도 있어왔습니다.
그럴 때
우리 주님은 돌아보면 늘 같이 있어주셔서 왔슴을 보고 알고 있습니다.
이제
앞으로도 있을
주님의 역사 앞에서
주님이 뜻임을 깊이 인식하고
인내할 수 있는 힘을 허락하소서.
그런 지혜를 주시옵소서.
그리고
이제는 주위를 위하여
내 이웃을 위하여
내 가족을 위하여
남을 위하여
눈물로서 기도할 수 있는
우리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공감
즉
사랑을 부어주소서.
그리하여
우리 주님께 착한 종아...라는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자되게 하소서.
너무 지치지 않도록 도우소서
너무 어렵지 않게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땅은 죄와 죽음과
눈물의 땅이지만 하늘나라는 끝없는 기쁨이 있는 곳이다.
- D.L. 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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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대한 시각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많은 부분 왜곡되어 있다.
고난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선 하나님을 향한 왜곡된 시각이 변해야 한다.
우리의 본성은 고난을 피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고난을 배제하기 위해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만들게 된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허락하실까?
우리는 이에 대한 만족할 만한 대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을 왜곡시킨다. 그러나 진실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고난받는 것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C. S. 루이스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참으로 자신이 하나님께 가치 없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충동에 따라 살도록 내버려 두기 원하고 본성과 다른 훈련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께 더 사랑받기보다 덜 사랑받는 것을 원한다.”
하나님의 가장 큰 목표는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즐겁고 재미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런 변화가 즐거운 시간에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변화는 시련과 어려움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꾸시거나 만들어 가기 원하신다면 우리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참고 견뎌 내야만 한다.
영원에 비한다면 고난은 아주 짧은 순간일 뿐이다.
그러나 고난은 열매를 맺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끔찍해 보이는 것들로부터 놀라운 변화를 만들어 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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