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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QT

純秀 지킴이(애2:18-22)

주하인 2006. 3. 15. 08:44

 

 

(예레미야 애가2:18-2:22) 

 

18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처녀 시온의 성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

   찌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찌어다

( 눈이 한 곳에서 쉬지 않고 있네요..ㅎㅎㅎ 참.. 웃으면 안되나? ^^;;;)

 

 

 이제야 마음 깊이 주님을 향해서 부르짖게 되는구나.

사람들은 고통을 겪어야만 주님을 찾는다.

고통도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만..

 전래 고금을 굳이 뒤지지 않더라도, 지금도 난 조금만 편해지면 저녁에라도 즉시 '비디오' 한편 빌려다 놓고 Potato couch(소파에 감자칩 하나 사다 먹으며 뒹굴거리는 사람) 되고 싶다.

 이 게으름..

 비단 이러한 게으름 뿐아니라 주님은 아담과 이브 이후로 끊임없이 되풀이 되고 점점 더 심해지는 인간들의 죄에 힘들어 하신다.

 

그래서  큰 징계를 하시려 하신다.

 

 그럼에도 그 징벌이 가슴아파 우리에게 특별히 말씀하신다.

" 처녀 시온의 성곽(성벽)" 이라고..

마치 둘째 아들이 잘못하였을 때 강하게 징계하시면서도 가슴이 아파 듬직한 첫째를 따로 불러 동생을 달래주라는 조용한 지시처럼....

 

 

 처녀 시온이란 의미가 심상치 않다.                              

시온은 천국 백성을 상징하는 의미처럼 들려온다.

처녀라면 순수함을 회복하라는 뜻으로

거기에 성곽은 방어벽이니....

결국 주님은 둘째를 혼은 내시되 그 혼냄이 처녀 시온이기 때문에 각별히 사랑하여 혼내시는 것이시며 첫째인 우리에게 '천국 백성의 그 순수함'을 지키는 '중보자' 역할을 담당하기를 바라시는 듯하다.

 

중보자로서 깊이 세상의 악함과 스스로의 메마름을 회개하고 사랑하는 기도를 하라신다.

눈물을 강물처럼 흘리라하신다.

잠을 자도 꿈을 꾸면 눈동자가 움직인다.

눈을 감아도 이 말세의 세상에 올 주님의 분노를 두려워 하고 기독교의 회복을 위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놓치 말라는 말씀같다.

 

 

 

 

 

19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찌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찌어다 각 길머리에

   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찌어다 하였도다 

( 물 붓듯이 오는 비 )

 

 어두워 지기 전에 기도하라신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만나라 하신다.

물 붓듯이 그 분에게 우리의 죄를 고백하라 신다.

통렬히 내 이웃을 사랑하여 흘리는 중보의 기도를 하라 하신다.

주를 향하여 두 손 높이 들고 처절히 기도하라신다.

 

 

 사람의 심리는 ID(본능) , Ego(자아) , Superego(초자아) 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많은 분이  알고 있으시다.          ( 지수 는 모르려나?ㅎㅎㅎ)

 

 나 자신인 이 자아는  이드 쪽에 편향되었으면 좀 충동적이고 덜 인격적이며

초자아 쪽이 크면 사랑이 부족하고 지나치게 딱딱하고 경직되어 있는 성품이 된다.

  적당한 사랑과 용인으로 양육되어 성장하여 어른이되면 자아는 이드와 슈퍼에고가 적절하게 융화가 되어있을 때 성숙한 모습으로 자라나게 된다.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문제는 사람의 영혼에는 , 아담의 지은 죄로 인해 원죄가 들어와서 만들어진 이드가 어느 때라도 때만 되면 기승을 부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인격의 성숙도와는 상관없이....

그래서 사람은 절대로 존경할 대상이 아니란다.

사랑할 대상이지..

그것은 사람은 누구나 결점을 가지고 있다는 자조적인 얘기다.

 

 각설하고, 주님은 인생의 여정에서 허락된 연단을  통하여  이 과정이 잘 정제되어 천국 시민에 합당한 인격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오시길 바라시는 것이시다.

 즉, 인생이란 주님 계신 곳에 가기 위한 연단의 과정에 지나지 않음이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그 분의 뜻을 잊고 이 세상의 삶이 모두인 것 처럼 온통 시선을 이 땅에 보내는 것이 문제다.

 그리하여 본능이 시키는 대로 말초적인 삶만 추구하거나, 자신의 속에 내재된 상처로 인하여 지나치게 비대화된 초자아의 놀음으로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 분노와 각양 옳지 않은 감정으로 뒤엉켜진 소모적이고 비생산적인 삶만 살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 자아는 심히 소실되거나 지나치게 비대화 되어 주님의 말씀이 영혼 어디에도 거할 장소가 없게된다.

아무리 선지자를 보내도 변화가 없다. 

죄의 행태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이웃끼리는 점차로 반목하게 된다.

 주님 보시기에 견디실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면 어찌하면 되는가?

(내가 누군가?   곰인가? 토낀가?  ㅎㅎ)

 

 

 우리의 자아가 중심을 잡아야 한다.

내가 누구며

내가 무엇을 원하며

내가 어디로 가는가"에 대하여 확고 부동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인식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셔야만 한다.

나는 예수님과 관계하여 누구며

나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무엇을 원하며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지 예수님은 어찌 원하시는가? ...

 

그리고 그 생각이 '기쁨'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리되면..

나는 굳건해지고

외풍이 몰려와도

유혹이 밀려와도

단단해질 수 있다.

 

우리의 외부적 환경과 상관없이 그 분이 주시는 늘 '평안'함을 유지하다가 그 분이 부르실 때에 이 세상 참 잘 살았노라고 갈 수있다.

 

 오늘

우리 주님이 너무도 무서운 말씀을 하시면서 장자같은 우리에게 다른 말씀을 하신다.

"네가 날이 어둡기 전에 눈물을 물처럼 퍼부으면서 네 성곽의 일을 다하라. "

 

내 눈이 내 속에만 고정이 되어 있어서 세상에서 내 '자아'를 찾으려고만 할 때..

그 말씀은 하등 의미없는 지나간 역사속의 예수 위인의 멋진 사어(死語) 일 수밖에 없다 .

 그러나, 우리는 수도 없는 많은 체험을 통하여, 첫사랑을 통하여 , 끊임없는 말씀의 감미로움을 통하여 그 분이 진실이시고 그 분이 평강이시고 그 분이 기쁨이시고 그 분 만의 우리의 운명이며 그 분만이 천국을 향하는 유일한 길임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 분이 말씀하시고 명령하시는 것을 준행함은 우리의 의무이며 이 땅에서의 행복이 됨이 확고부동해진다.

 그래야 우리의 자아가 살아나고 생기가 있어져, 세상은 담대하게 이겨나가는 힘이될 것이다.

 

 

적용

 

1. 저녁에 수요예배 빼먹지 않고 간다.

 

2. 이웃 만을 위하여 중보한다.

 

3. 시온과 처녀와 성곽에 대하여 묵상한다.

 

4. 내 삶에 원하시는 주님의 뜻에 대하여 생각한다.

 

5. 예레미야 같은 이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간구한다.

 

 

 

기도

 

주님 예수님

 

깊이 회개하고 반성하시길 원하심에도

또 죄를 지었습니다.

 

회개합니다.

반성합니다.

그리고

주님 뜻대로 두손들고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도와주소서.

 

오늘 하루 주님뜻대로 살수 있도록

내 이웃을 안타까워 하는 마음을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리적인 신실성뿐만 아니라 매일 우리의 사랑을 원하신다.
-프란시스 쉐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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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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