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Think' , Love 모두 동사이다. (약2:14-26) 본문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1. 몇가지 의문
1) 이신득의 원리에 정면 배치되는 듯한 야고보 사도의 주장은 무엇인가?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라는 구절은
특별히 오해를 받기에 충분한 소지가 있다.
이것은 ’이행득의’이다.
2) 행동을 착하게 하는 게 왜 위험한가?
착한 행동은 좋다. 남을 유익하게 하므로..
그러나, 행동 우선의 증거는 ’바리새인’의 증거로도
충분하다.
3) 믿음 지상주의’ 위험성은 무엇인가?
방종, 이기주의
4) 믿음과 행동과의 관계
따로 떼면 반드시 위와 같은 결과가 나온다.
통합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아버지 손잡고 가는 자녀와 같은 의미다.
아버지의 부드러운 손길과, 은은한 눈빛 , 바람에 흐르는 그 분의 체취가
좋아서 난 그 분과 함께 있는 것이 너무 좋다.
그래서, 멋지신 우리 아버지의 목소리가 날 부를 때.... ’얘..
월아야..(하인아.. 하려고 하니깐.. 하인 부르는 거 같아서 ㅎㅎ) ’하고. ... 난 가슴이 뛰며 그 분을 바라보며 얼른
대답한다. ’예.. 아버지.. ’
그리고 그분이 말씀하신다.
’조~기 보이는 저 분이 힘들어
보이지? 우리 가서 도와줄까?’
’그래요.. 아버지 제가 먼저 가서 도와드리께...아버지 천천히 오세요.. ’
만일 내가 아버지를 쳐다보지도 인정하지도 부르지도 순종하지도 않는 아들이다.
그런데, 가서 좋은 일하니까 난 아버지를
사랑하는 아들야.. 하고 혼자 자위하면, 과연 그 아들은 좋은 아들일까?
아무 일 않고 그냥 아버지 곁에 주위를 왔다갔다 하며 ’파파보이’같은 행동을 하면 그 분은 날 어찌 보실까?
안타깝지 않으실까?
그래도 행동 만 하고 아버지를 찾지 않는 자식~~ 보다는 파파보이 같은 안타까움은 보이지만
아버지 손 놓지 않으려는 아들이 약간 더 귀엽기는 할 것이다.
허나, 아버지를 너무 기뻐하는 아들이라서 들떠서 착한일 하는 아들이면 그분은 날 얼마나 기쁘게 보실까?
이런 것이다.
행동은 믿음에 부속되어 있다.
믿음의 성숙도를 ’행동’으로 알수 있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5) 야고보서가 수많은 오해에도 불구하고 신약에 남아 있는 이유.
현대 사회의 믿음과 행동의 혼란을 예상하시고 생각할 기회를 허락하시려..
그래서 성화되는 디딤돌이 되도록..
6) 행동에 대하여
행동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선교, 봉사, 교육, ...........눈에 띠는 행동 만이 주님이
좋아하시는가?
혹시, 커다란 선행 만이 믿음의 정도를 확인시켜 주는가?
컵과 양동이는 크기는 달라도 물이 반 채워져 있으면 50% 채워져 있다고 한다.
주님이 보시는 선행도 비슷한 기준이
아닌가 싶다.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에 맞춰 최선을 다하는 행동...
선교사의 달란트 가진 사람이 집에서 아이들만 교육하고 있으면 부족한 행동이다.
자신의 내적 혼란에 의해 그 부분을 주님께
맡겨 정화 시켜가며 이웃에 대한 눈빛을 고요히 쏘아 가는 것만이 그 사람의 주어진 사명이면 그렇게 변화 되어 이웃에게 주님 믿고 달라졌다는 말을
듣는 것이 그 사람에게 맡겨진 행동이다.
그렇다면 어찌 나에게 맡겨진 달란트를 알수 있겠는가?
기도해야지.. 일단 교회에서 봉사해야지.. 시도해봐야 한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 ( 목적을 이루는
삶에서 릭워렌 목사님이 잘 표현 해주셨다.)
아침에 큐티 모임의 일원이 이런 얘기를 했다.
’Think’ ”Thank”, ”love” 는 외적으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없어도 모두 명사가 아닌 ’동사’란다.
그래서 이런 것 하는 것이 행동이란다.
그랬다. 그것도 행동..행위이다..
그러나, 이런 추상적 동사가 귀찮고 힘들다는 감정을 밀어버리고 밖으로 표출되는 행위...라면 더더욱 성화된 행동일 것이다.
예를 들면 ’ 직장에 찾아온 허리 구부러진 할머니’의 짐을 뛰어나가 들어들고 오는 것, 소리지르고 고압적인 고객에게 한번 더 웃어
주는 것...
그 안에 ’예수님을 위하여’라는 명분과... ’Love’라는 동사를 ’행동’으로 표출시켜 나의 ’믿음의 정도’를
높여가는 것... 이것이 진정 주님이 바라시는 ’매일의 순교’가 아닌가 싶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 사도가 숱한 오해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쓴이유’일 것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이 가련한 우리 기독 중생들을
위한 또다른 사랑의표현일 듯싶다.
2. 적용
. ’Think’하자
. ’Thank’하자
. ’Love’하자
. 그리고 ’행동’으로 더욱 더 동사화하자.
. 실패하면 기도하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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