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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게 에브라임의 헛된 꿈일 뻔 했다[호13:1-1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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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게 에브라임의 헛된 꿈일 뻔 했다[호13:1-16]

주하인 2024. 12. 2. 06:49

부제)모든 것 인생광야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과정일 뿐이다 

       나 밖에는 나 외에는

혼돈하지 말거라..그러함에도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chat GPT로 그림)

.

에브라임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떨었도다 그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말미암아 범죄하므로 망하였거늘

 '에브라임', 북이스라엘의 강국.

요셉의 둘째아들로 힘이 있던 자.

아래에 호세아서에서 왜 그리도 에브라임 이름이 많이 거론되는 지 정리 해 놓았다 

 

 그의 힘있음, 인간적 다름, 그의 '카리스마'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에브라임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떨었도다'

 

 저 표현은 어찌보면

'그러한 자신의 뛰어났던 과거'를 회억하며 살아가고 있는 

그런 '에브라임'의 내면을 읽어내는 것 같기도 하시다 .ㅠ.ㅠ

 

 그래서 유다르다. 

꼭 내가 에브라임처럼  '악함'으로 치달린다는 말씀은 아니시다. 

 

 자주도 되뇌이는

내면의 '잘난체함'..

과거를 그리워함..

자아의 득실거리지만

(chat GPT로 3절을 주제로 그림)

3 이러므로 그들은 아침 구름 같으며 쉬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

결국 그 모두 아침구름, 이슬, 쭉정이, 연기.. 로 표현되는

그 인생의 허무에 몸부림치는

그런 우리의 모든 인생들의 똑같은 '레파토리'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심이 아니시던가?

 

 그러시면서 

그 어이없는 '허상'들.. 

전혀 수천년이 지나도 인간들의 뇌리속에서

절대로 변하지 못하는 

그 '허탈하고 허무하고 의미없는' 레파토리,

사단의 '시나리오'에 

어찌들 그리 

또 똑같이 반응하는가... 하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우신 시선을 느끼게 한다 .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주님은 

또 '지치지도 않으시고' 이렇게 외치고 도닥이신다. 

 

"얘들아.

나는 

애굽땅에 있을 때부터

네 하나님 여호와여왔다." 라고.. 

 

 돌이키라신다. 

이제라도 

그 어이없는과거의 영광,

필요없는 허탈한 어이없음에서 고개를 들어

진실을 바라보라 하신다. 

 

내 사는 것,

내 살아온거

내 살아갈 거.. 

'오직 하나님 여호와 이외 

그 어디에 의미가 있는가?
여호와 하나님 만이 의미이고 진실이고

우리 삶의 유일한 동기가 아니신가?'

 

그것을 주께서 그렇게 표현하신다. 

''나는 애굽땅에 있을 때부터 네 여호와 하나님이었다" 

이어 말씀하신다. 

''나 밖에 

 나 외에 

어떤 다른 신이 있단 말인가?"

 

 

5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거늘
'엘로힘'의 하나님.

내가 태중에서 만들어지기전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부터

나를 아시고 

 

나를 이 광야 인생에서 계속 함께하셨고

나를 끝까지 인도하시는

임마누엘 하셔서

에벤에셀 하시고

여호와 이레하실 분이 

오직 '주님'... 이 신 것이심을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 하신다. 

 

 

 주일을 잘 쉬고

또 월요일.

 

하루 하루는 지루하고 힘들고

일주일은 왜이리도 잘안가며

이 남은 인생을 살아갈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지루하고 

무슨 의미가 있어 

무슨 재미로 또.. 하루 , 일주일을 버티어나가나... 

허무한 생각이 

이 아침 , 월요일 아침 벨이 울려 

눈이 뜨이자 마자 

내 머리속을 휘감아 든다. 

 

 그러면서 '과거의 영광들'.. 

고소하게 되씹게 만들려하고 

오늘 하루 버티어낼 시간들이 

참으로 힘들게 느껴지려 한다. 

 

그래도 얼른 말씀을 들여다 보았다. 

컴퓨터 바탕화면에 그리 써 놓았다. 

'기도외에 살아가는 의미가 어디있던가?'

 

 그렇다. 

젊은 날의 힘있던 시절,

날 그래도 유지하게 만들었던

그 쓰잘데 없던 자존감, 

그래서 나름 이곳 저 곳 느껴졌던 여인들의 눈빛 ^^;; ,

찬탄하고 감탄하게 했던 아름다운 목소리의 추억.. 들이 

의식하지 않았지만

날 .. 휘감아 잠시나마 

내 바람빠져 나가듯 빠져나가

쪼그라져 가는 육신에 남은

일말의 에너지를 세우려 하는 듯하다. 

 

그리고 이어져 다가오는

또 시작되는 '월요일' 이후의 

이 지루한 노년의 시간들에 대한 

메마르고 갈라지는 듯한 '허무함' ... 지루함.. '허탈함'.......이

슬그머니

익숙한 순서로 날 사로 잡으려 한다. 

 

 말씀,

그 어느때..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할 때

이러다가 죽어도 좋을 거 만 같다.. 는 고백으로

감동충만하여 

잊기전 써 놓기위하여 서두르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 

정말 그게 정답 아니던가?
어찌 인생이

인생이 목적을 발견하고 진리로 붙들고 살수 있던가?

몸부림 쳐 봤자 

모두 세월의 흐름 속에

흩날리는 연기요

해뜨면 사라지는 아침 구름이고 

쭉정이 같은 이 인생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의미'도 없다 .

 

이름을 남겨 봤자

더러운 데이터 한쪽 세상에 뭍히고 갈 것일뿐.. 

그게 어찌 인생의 목적이 되고

많은 재산 축적해보았자 

그게 썩어버리지 않을 확정이 되던가?

 

오직 하나님.

오직 유일하게 나의 의미이신 여호와 하나님.

그 분께서 '나의 광야 인생'..

이 허무할 인생에 

오직 등불이시고

유일한 이유이시며

기도만이 그분이 진실이고 진리임이

우리의 영혼에 굳게 자리잡는 

유일한 기회임을

저때는 분명코 뚜렷이 체험하고 알게 되었던거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그득하고

내가 그 분 안에 거하며

견디지 못하며 적어내고 토로해진 

진실이고 진리일 뿐이다. 

 

 그렇다. 

모든게 '에브라임의 헛된 꿈'이다. 

모든게 '오직 유일하신 진리이신 주님'을 

내 인생에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과정일 뿐이다. 

 

인생이란 게.. 말이다. 

 

할렐루야 주님

오늘도 또 하루를 허락하셨습니다 .

언제 주님 부르실 지 저 모르지만

주님 모르는 시간으로서는

도저히 단 하루도 눈뜨고 싶지 않은

그러한 시간이 또 허락되어진 겁니다. 

 

압니다. 

또 하루를 지내며

작은 구름같고 연기같고 쭉정이같은 나날에

또 매달려 허겁거리며 끌려가다가

저녁이 되면 또 그리 잠자리에 들어서

또 내일을 기약하며 겨우 지친 영혼을 뉘이는 

그러한 하루가 되풀이 될 것을 요.

그러다가 

에브라임의 젊은 시절 회억하며

말만하면 떨던 주위사람들로 인하여

쾌감을 느끼던 그 교묘하고 치졸한 만족으로 

또 힘을 내려고 하는 

이 어이없는 되풀이..............

 

그게 인생이고

더 이상의 의미가 어디에도 없음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그러한 이유로 '어두운 우울'로 몰려가지 않고

진실을 바라보고

진리 안에 거하게 하시는 주님.

그래서 '이 광야 인생'을 살아도 될 의미와

그에 따르는 '은혜'의 에너지를 불어 넣어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고 인정하게 하여주십니다. 

 

주여.

그렇습니다. 

다시 보아도

다시 생각해도

다시 느껴도 그렇습니다 .

주님 하나님.

내 광야 인생에 함께 하시던

'오직 하나님'

오직 여호와 하나님 이외

그 어디에 삶의 의미와

살아가는 재미와

살아가야할 소망이 있답니까?

오늘 그것. 

다시한번 확인하며

하루를 여십니다. 

말씀이 참 시적이고 좋습니다.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할렐루야 하나님.

주님 만을 바라보고

또 힘내어 살아가겠습니다. 

제게 더 뚜렷한 

오직 내 하나님

오직 내 구원자 주님 이 되어 주심을 

영혼 깊숙이 갈무리할 수 있게 하소서

 

거룩하고 귀하시며

내 살아있는 유일하신 의미이신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호세아서에서 '에브라임'을 많이 거론하시는 이유

 

에브라임은 요셉의 둘째 아들입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얻었으며, 에브라임이 둘째입니다(창세기 41:50-52). 하지만 야곱이 죽기 전에 손자들에게 축복할 때, 에브라임을 형 므낫세보다 더 크게 축복했습니다(창세기 48:13-20). 이는 에브라임이 요셉의 후손 중에서 더욱 큰 번성과 영향력을 가질 것을 예언적으로 나타낸 사건입니다.

호세아서에서 에브라임이 자주 언급되는 이유

1. 에브라임의 중심적 위치와 상징성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가장 강력한 지파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중심지였습니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도 에브라임 지파의 땅에 있었고, 초기부터 에브라임은 북쪽 열 지파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지파로 간주되었습니다. 따라서 호세아서에서 북이스라엘 전체를 언급할 때 "에브라임"이라는 이름이 종종 북왕국 전체를 대표하는 대명사로 사용되었습니다.


2. 영적 책임과 배반
에브라임 지파는 과거에 큰 축복과 은혜를 받은 지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 우상 숭배와 타락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특히 바알 숭배와 같은 죄악은 에브라임을 중심으로 북이스라엘에 퍼져 나갔습니다.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우상 숭배로 빠진 이스라엘의 타락과 심판을 다루는 책이기 때문에, 대표적인 배반의 상징으로 에브라임이 자주 언급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슬픔과 경고
호세아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백성의 타락에 대해 깊은 슬픔과 분노를 표현하는 책입니다.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파이면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를 가장 많이 배반한 지파로 간주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책망하시는 동시에, 여전히 그들을 회복하시길 원하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에브라임을 자주 언급하신 것입니다.


4. 에브라임의 과거 영광과 대비
호세아는 에브라임이 한때 얼마나 위대했는지(예: "에브라임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떨었다")와 지금의 타락한 상태를 대조함으로써, 그들의 죄악과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강조합니다.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몰락을 통해, 하나님을 떠난 삶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보여줍니다.



다른 지파들보다 에브라임이 특별히 언급되는 이유

유다는 호세아서에서 상대적으로 덜 언급되지만, 이는 유다가 남왕국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을 예언하며 경고하는 선지자였기 때문에, 북이스라엘의 상징인 에브라임이 중심적으로 다뤄진 것입니다.

요약하면, 에브라임은 축복받은 자에서 배반한 자로 전락한 대표적인 상징으로, 호세아의 메시지에서 자주 언급되어 경고와 회복의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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