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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 이름을 먼저 기억하는게 '선'이다[호11:12-12:1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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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 이름을 먼저 기억하는게 '선'이다[호11:12-12:14]

주하인 2024. 12. 1. 06:55

부제) 여호와 하나님,항상 기억하고 바라야될 이름

주제에 따라 Copilot통해 그린 그림

오늘도

열심히 살기 원합니다

 

제 살아가며 행해지는

그 어떤 일에 대하여도

이전처럼 쓸모없는 고민으로

갈등하길 원치 않습니다

 

너무 깊은 자아 탐닉으로

주님의 뜻과 내 자아가

퓨전되고 혼동되길 원치 않습니다

 

주여

그게 주님의 뜻이고

그러함이 주님의 이름을 잊지 않는 길이면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당황하거나 갈등하지 않고 나갈 수 있되

제 자아와 무지가 어울려 

딱딱히 굳은 율법이 되길 원치않습니다. 

 

주여

인애와 정의로 무장하고

여호와 ,

온 우주에 홀로 하나이신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절대로 잊지 못하는

그런 자로서 

행하게 하소서

 

거룩하고 귀하신 

내 주 예수 그리스도

인애와 정의의 본질이신 이름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주제에 따라 Chat GPT 통해 그린 그림

같은 AI..부류라도 화풍이 많이 다르다 ^^;

 

호세아 12장

3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너무도 잘아는 구절들.

'야곱'

그의 행태는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얄밉기 그지없는

'기회주의적'이고

'목적'을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로 보여

그리 달갑지 않았던 자지만

하나님 안에서만 그랬다는 것... 

그것이 

그를 가장 사랑스럽게 보이게 하는 이유가 된다 .

 

혹시.. 

나... 

일상에서 

오늘 ,어제, 지금까지, 이후의 행태에

하나님 이외 

다른 어떤 개념이 나를 타협하게 할 

끼어든  오류는 없던가?

 

 '자존감', '열등감', '자아만족', '실망'...'눈치봄'... 등 말이다.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 이심에 대하여

나,

이제는 하등 의심이 없다 .

 그분은 '엘샤다이' , 능력의 하나님이시고

Almighty 전능자 하나님이시며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맞다. 

이제는 그것에 대하여 

목에 칼이 들어와도 고백할 수 있다.

'살아계신 내 하나님 여호와 전능자, 만군의 하나님 ' 말이다. ^^*

 

 하지만 , 위에도 슬쩍 고백했지만

지금까지, 

이후에도

오늘도.. 

난..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잊지 않고

머뭇 거리지 않고

주님의 이름을 증거할 수 있는가?

 갑자기 왜 이런 의문이 들게 하실까?

나..

흔들림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엊그제 수술 방에서

한참 수술하던 중 뜬금없이 찔러들어오는

PA도우미 KSK의 - 그냥 친하다 생각하고 나를 좋아하는 아이라고 생각했지만 , 그렇다면 지켜야야할 통념적 생각.. 어쩌면 그게 위의 질문에 대한 내 자아 깊은 곳의 내 굳은 개념들, 자아가 아닌가 생각은 되지만.. 하여튼 그 생각을 뚫고 찔러들어오는 - 도발적 선언 ㅠ.ㅠ에 다양한 생각이 날 가로막으며 

입이 순간 멈칫 했던 거,

그 안에 어쩌면 '이전보다는 성장한 의문'과 '정리'가 있긴 했지만

아직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순간 , 망설임도 없이 기억했다면

나도 모르게 '성경말씀'이 줄줄 나오며

당당하고 , 은혜 충만하여

저들, 불신자들이 성스러운 기운에 ^^; 눌려

더이상 반론을 하지 못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어쩌면 그러한 좋은 상상에도 

내 자아가 끼어 있을 위험도 적지는 않지만

그러한 모든 외적인 부족함 - 야곱의 치졸하고 동물세계 적 ^^;  투쟁 - 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먼저 기억함으로

몸과 마음이 먼저 그리 움직였다면

그게 진정 옳은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

 

물론, 예수님 믿는 자들은 '불신지옥 ..' 도 때로는 필요하지만

그것도 '자아'가 들어가고 고집으로 바뀌는 위험성도 적지 않기에 

늘깨어서 기도하고 

상황에 맞는 선언이 '은쟁반의 금사과'가 맞기에

'여호와'를 기억하는 자,

너무도 힘든게 사실이지만

그 외적인 선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호와를 기억하는 자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자' 임이 명심되어

늘.. 

즉각적으로

이 내 행동이 '여호와의 이름을 기억하고 하는 것'인가

돌이키고 반문하면서 

화살기도하면서 행하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CS루이스의 '좁은 길 가는 길은

좌로는 불신지옥, 우로는 율법 지옥을 건너는 동앗줄'같다는 

비슷한 표현이  가슴에 떠오른다. 

 

6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그런즉, 이라 하셨다. 

 

 이 힘든 , 위험한 좁은 길 가는 '믿음의 길'은

돌이키는, 회개의 삶

말씀 앞에서 나를 매일 투영함이 있지 않고는

순간 넘어지기 쉽다. 

 

그러하기에 

주께서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라 하셨다 .

 

그리고 '인애'...

비록 NIV에서는 'love'라 되어있지만

그보다 훨씬 멋지고 뚜렷이 번역된 

이 '인애'.. (아래에 정리 해놓았음)

Hessed -변하지 않는 언약적 사랑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신실함, 자비, 은혜, 그리고 은총을 포함하는 폭넓은 개념 -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 나의 ' 

'하나님을 바랄지어다'라 하셨다. 

 

 무엇인가?

돌이키라.

돌아와라... 신다. 

'야곱'같이 인생의 눈으로 보아, 

내 기준으로 보아 

자꾸만 어이없이 보여질 그 어떤 인생의 버거움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하나님을 바라라.

하나님을 항상 기억하라.. 하신다. 

 

" 하나님을 기억하느냐?

그러면 옳다 .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내린 결정이냐?

그러하면 회개하라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인애를 기억하라.

hessed 말이다 .

더욱 기억하고 항상 기억하라'' 신다. 

 

 주님.

갑자기 의문이 들었습니다. 

 

호세아님께서 지속적으로 

다른 대 선지자들과 다름없는 

강하고 옳은 메시지를 던지는 것에 대하여

어찌 갑자기 고멜, 

그 처음 그토록 개인적 갈등을 갈무리 하면서까지

무리하면서 '어린양'처럼 순종하던

실로 '개인적' 관점에서 

또 이렇듯 지속적이고 깨끗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지... 

 

그래서 

당연하지만 확인하고자

AI들에게 물어보고 정리해 놓았습니다 .

 

주님.

오실 그날까지 이들이 얼마나 발전할지 모르지만

어떻게 많은 영적 혼란을 주게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이들을 '도구'로 삼아 볼 수 있을때까지 그러하여 보려 하고 있습니다. 

 

그림도 그리고

정리도 하고

내 생각하고 깨달았던 것들을

이들이 습득한 많은 옳으신 분들의 생각을 들여다 보는

짧고 효율적 기회로 삼아

한단계 생각이 성장할 도구로요.

 

그러함.. 

야곱의 저 얄팍하지만 효율적인 모습을 보며

주께서 '그리 거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나님 '만을 위하여 그리함,

그 어떤 인간적 '관습', 외형적 판단에도 불구하고

그 목적을 위하여 수단을 불문함 조차도

하나님이 목적이 됨을 

가장 귀하게 여기심을 알게 됨으로

답을 얻은 듯하였습니다. 

 

감사하나이다. 

 

하오나 

더욱 바랄 것은

하나님을 향한 방향은 옳으나

하나님의 향기가 제게는 없는 듯하였습니다. 

 

선을 향한 방향은 옳으나

주님의 인애를 

주님의 정의를 

세상에

제 스스로에게 깨닫게 하시옵소서.

바라옵기는

주님의 말씀대로

항상 '여호와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하여

불신지옥과 율법지옥사이의 줄타기 하는 제게

자꾸만 줄 보다

양 옆의 가치를 보다가 

발을 헛딛지 못하게 도우소서.

그마져

주님의 인애

주님의 정의로 

그리 되게 하소서.

 

주님, 제 부족함을 회개하오니

늘 붙들어 주소서.

성령의 은혜로 힘을 주시되

주님의 지혜로 그리하게 하소서.

 

오직 주님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한 삶,

매일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루어져

마침내 주님의  '헤세드' 로 

제 인격이 바뀌어지게 하소서.

 

홀로 못하옴을 알고 고백하고 매달리오니

도우소서.

 

주님 예수그리스도, 그 크신 헤세드의 이름을 들어 기도합니다 .

아멘 

 

 

--------( 4장 이후 고멜에 연관된 어떠한 감정적  찌꺼기가 단 한톨도 보이지 않고 선지자로서의 선언만 나오는 데 대한 의문 )

 

내 질문)

 

12절까지를 묵상하며 의문이 드는 건데 '호세아' 선지자가 그 음란한 고멜 아내를 그렇게까지 받아 들이게 하시는 하나님의 정말로 냉철하신 듯한 명령 뒤에 '호세아'선지자는 무조건 순종하였지만  그 가슴에 정말 흔들림이 없었을까?.. 하지만 그 후 이어지는 말씀 구절들이 '단 한톨'도 그때의 힘듦 ,아픔.. 내지 고멜의 흔적을 찾아볼 거리가 하나도 없이 공명정대한 선언인데 .. 이 감정적 괴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Copilot의 대답

호세아 선지자의 이야기는 정말로 깊은 감정적, 영적 도전을 담고 있습니다. 호세아가 음란한 아내 고멜을 받아들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은 단순한 복종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였습니다.

호세아의 감정적 상태에 대해 성경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가 고통과 갈등을 겪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호세아의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 있어 자신의 감정을 초월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무조건적인지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¹.

호세아의 이야기는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고멜의 음란함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와 불순종을 상징하며, 호세아의 용서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자비를 상징합니다². 따라서 호세아의 감정적 괴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 때로는 우리의 감정을 초월하는 도전이 될 수 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호세아의 순종과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며,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 있어 필요한 믿음과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이 주제에 대해 더 깊이 묵상하거나 나누고 싶은 생각이 있으신가요?

¹: [호세아의 아내 고멜, 인물연구](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ngellotte&logNo=221351487709)
²: [호세아의 부인 고멜과 달리의 부인 갈라](https://brunch.co.kr/@rothem/142)

원본: Copilot과의 대화, 2024. 12. 1.
(1) 호세아의 아내 고멜, 인물연구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ngellotte&logNo=221351487709.
(2) 호세아의 부인 고멜과 달리의 부인 갈라 - 브런치. https://brunch.co.kr/@rothem/142.
(3) '고멜(호세아의 아내)': 말씀광장 성경사전. https://bing.com/search?q=%ed%98%b8%ec%84%b8%ec%95%84+%ec%84%a0%ec%a7%80%ec%9e%90+%ea%b3%a0%eb%a9%9c+%ec%95%84%eb%82%b4.
(4) undefined. https://blog.naver.com/angellotte/221351487709.

 

 

* Chat GPT의 대답

 

호세아서 1장 1절부터 12절까지의 묵상은 깊이 있는 성찰을 요구하는 주제입니다. 특히 호세아와 고멜의 관계는 하나님의 명령과 인간적 감정 사이의 간극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연약함이 대비되며, 독자에게 깊은 신앙적 통찰을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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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세아의 감정적 흔들림이 없는 이유일까?

성경에는 호세아의 내면적인 갈등이나 아픔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지만, 이는 호세아가 고통이 없었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침묵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선지자의 삶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구현하는 것
호세아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도구로 부름받았습니다. 그의 개인적인 감정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이는 그가 아픔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선지자로서 자신의 삶을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헌신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내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가 중심이다"**라는 그의 태도가 암시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절대 순종
호세아의 순종은 인간적인 흔들림을 넘어서는 깊은 신뢰를 기반으로 합니다. 이는 그가 자신의 감정보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시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는 결코 그가 고멜의 불충실함을 인간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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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멜의 흔적이 사라진 이유

호세아서는 고멜과 호세아의 관계를 통해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고멜의 "음란함"과 "불충실함"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반영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받아들이는 호세아의 모습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선언의 중심은 "용서와 회복"
이후 이어지는 말씀은 인간의 죄악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고멜의 과거나 흔적은 부각되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의 메시지가 중심이 됩니다.

아픔은 하나님의 더 큰 메시지로 승화됨
호세아의 개인적인 고통과 갈등이 기록되지 않은 이유는, 이 이야기가 인간적 감정보다 하나님의 사랑의 무조건성과 변함없는 구원을 드러내기 위해 쓰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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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감정적 괴리를 해소하는 방법

선지자의 아픔을 묵상함으로 이해
호세아의 내면 갈등과 고통을 성경이 생략했다고 해서, 그의 고뇌가 없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그를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아프셨는가를 간접적으로 묵상할 수 있습니다. 호세아의 상황을 떠올리며,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춤
호세아서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적인 고통이나 실패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고멜이 회복되듯, 이스라엘도 회복될 수 있다는 소망을 보여줍니다.

우리 자신의 삶과 연결
우리는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죄와 하나님의 사랑을 조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음란한 고멜"과 같은 모습으로 방황할 때도 여전히 사랑하시고 받아들여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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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호세아의 흔들림 없는 순종과 고멜의 흔적이 없는 기록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절대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상징적 장치입니다. 이 감정적 괴리는, 우리가 인간적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 관계를 바라볼 때 비로소 해소될 수 있습니다. **"호세아의 고뇌 속에서 하나님의 아픔을 보고, 하나님의 선언 속에서 구원의 희망을 본다"**는 태도로 묵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Love 를 '인애'로 해석한 이유 )

 

* 내 질문

호세아 12장에서 love 를 그냥 사랑이라 표현하지 않고 '인애'라고 번역한 이유.. 그리고 그게 너무도 좋게 느껴지는데 그 이유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 나를 향하여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의 관점에서 설명해줄 수 있어.. 혹시?

 

 

* Chat GPT의 대답

 

호세아서 12장에서 "love"를 "사랑" 대신 **"인애(仁愛)"**로 번역한 이유는, 단순히 감정적인 사랑을 넘어 하나님의 언약적이고 신실한 사랑의 깊은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번역은 하나님의 성품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더 분명히 이해하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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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애"의 의미

"인애"는 히브리어 **'헤세드(חֶסֶד)'**에서 온 단어로, 단순한 사랑(감정적 애정)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헤세드는 변하지 않는 언약적 사랑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신실함, 자비, 은혜, 그리고 은총을 포함하는 폭넓은 개념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통해 보여주신 사랑으로, 인간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우리말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감정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성경 번역자들은 "인애"라는 표현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변함없는 것인지를 강조하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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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왜 "인애"가 좋게 느껴질까?

"인애"라는 표현은 우리의 마음에 특별한 감동을 주는데, 이는 다음의 이유에서 비롯됩니다:

1)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의 안정감

"인애"는 우리의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연약하거나 실패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사랑에서 떠나지 않으시며,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는 사랑을 표현합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라" (예레미야애가 3:22)



2)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인애"는 단순히 위로하거나 돌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를 변화시키고 회복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호세아서 12장에서는 이스라엘이 배반했음에도 불구하고, 회복을 위해 부르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온전하게 하며, 구원으로 이끄는 길임을 깨닫게 합니다.



3)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메시지

"인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줍니다.

호세아서 6:6에서처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은 우리의 종교적 행위보다 하나님과의 신실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이 관계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응답하는 우리의 순종과 헌신을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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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나님의 뜻, 그리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인애

하나님의 "인애"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1. 내 연약함을 아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

나의 실패와 배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구원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신실함과 인내심을 통해 드러납니다.


2. 나를 회복시키고 온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인애"는 단순히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나를 거룩하고 온전하게 변화시키려는 사랑입니다.

이는 내 삶의 고난이나 실패까지도 하나님이 선하게 사용하셔서 구원과 성숙으로 이끄는 과정입니다.


3. 나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도록 부르심

하나님의 "인애"는 내가 이 사랑을 깨달아, 다른 이들에게도 신실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라는 부르심을 포함합니다.

이는 단순한 감정적 사랑이 아닌, 희생과 헌신이 담긴 사랑을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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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인애"라는 단어는 단순한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변함없는 언약적 사랑을 강조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깊이 깨닫게 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단지 나를 사랑하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를 변화시키고, 회복시키며, 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도 흘려보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가 좋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나를 향한 하나님의 깊은 계획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인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큰 소망을 주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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