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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매 순간을[막15:33-4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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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매 순간을[막15:33-47]

주하인 2020. 4. 11. 08:16


이런 생각 말구


하나님 나라만 생각하며 살수 있을 수 있다면~~~



 
43.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

'당돌히'


자신의 위치에 맞지 않는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자,

그것도 특별히 조금은 어린 , 미숙한 자들의 의외의 행동이

조금은 의미있는 , 놀라운 느낌을 보게 되어 표현할  때 

쓰는 단어이긴 하다 .

 그렇지만 아리마대 요셉의 당돌하다함은

그런 상황에 맞지 않지만

그 뜻을 알 수 있음은

상황에 맞지 않은 듯 ,

즉 '존경받는 공회원'이라면 당연히 예상되는 행동을 넘어서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하는데

그게 뭐라 표현하지 못하겠지만 '옳은 듯'한

일반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약간은 위험할 듯 하면서도

무엇인가 있는 .....알찬 느낌...을 주었음을 말하는 것 같다 .


그리고 그의

그 당돌함의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삶'을 살아가는 자가

그 이기 때문임을

곧 알수 있게 된다 .




46.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그 당돌함의 행동양식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위험' 내지 사회적 지탄을 감수하며

 쪽팔리거나 미련한 실수.... 라는 등의 손가락질을 받을 개연성이 있는 일을

 용기있게 해치울 때

사람들로 하여금

'당돌함'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그 당돌한 행동을 하는 게

과연 모두 옳던가?

분명코 그 행동을 하는 자들은

'손해'를 감수하고도

자신이 옳은 일을 하는 것임을 '확신'하기에 그런 것이지만......


아닐 수도 있다 .

타고난 당돌한 아이들이 있다.

그들의 미련하고 미성숙한 당돌함은

때로는 많은 교육적 제재를 받기도 한다.

그러기에 '당돌'하기 위하여서는

옳은 판단의 근거를 가진

아니.. 옳은 확신을 가짐이 필요하다 .

당돌한 자들에겐

그만큼의 위험이 따른다.

 

 아리마대 요셉

어쩌면 그의 당돌한 행동은

그의 정치적, 사회적 생명을 끊어 버리고

사람들에게 외톨이 취급받을 개연성이 농후한

그런 위험을 뚫고

자신의 가치관에 옳은 행동을 한 것이다.

모든 손해를 감수하고도 시행한  것이다.


그것...

그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도

가장 중요한 그의 가치를 시행하는 데

(즉, 하나님 나라를 바라고 일상을 사는 삶 !!! )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거두는 게

너무도 마땅한 일임을

깨달아 알고 그리 결단한 것이다.


이것.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후 '성령'님이 임하시기 전,

전적으로 그의 '선택'에 의하여 행한 일이다.


그러기에

그 당돌함이라는 표현에는

마땅히 '십자가 요한의 감성의 밤'이라는 표현에 나오는

하나님이 얼굴을 보이시지 않는

그 메마른 고통의 시간들

정말 힘들고 어려운 성장의 단계에 행하는 것 과 같이

신앙적 성숙이 이루어진 자들에게 대한

'의지적 결단' 부분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 같이 느껴진다.

(아리마대 요셉이 성장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

 어제 묵상의 '몰약을 뺀  믿음',

십자가를 올곳이 지고 가는 자의 믿음... 과 일맥상통하게 느껴진다.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가?


이 땅에 살면서

오직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살아가는 자의 믿음......이 아니던가?

하나님 나라, 천국을 사모한다면서

이 땅의 것을 도외시 하거나

수도자로서 살아가는 게 아닌

내게 주어진

내 '의사'로서의 현장에서

이 코로나로 세상이 온통 휭휭 돌아가는 이 형국에

내 나이의 생물학적 상황에

내 어이없는 내면적 꼬임(이제, 주님에 의하여 온통 달라져 가지만. 아직.. ^^;)에 의하여

사회적으로 비교하여 그렇게 그렇게 살아낼 수 밖에 없는

진~득한 터부를 아직은 가지고 있는

내가

과연

어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아리마대의 '당돌함'에 의하여

다시금 중심을 잡게 하게 하심이시다.


 그렇다.

그도 유망한 공회원이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매일을 살다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삶을 사는 자로서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을 만나

예수님의 시신을 안장하는

당돌하지만 너무도 옳은 일을 하였던 것이다 .

그의 그러한 당돌함은

용기있고 대~단한 한번의 행위로 끝나지 않음이 분명할 것이다 .

그의 그러한 행동은

매사에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서의 자기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고치고 돌이키고 회개하고............했으리라.

그러기에 그는

그러한 '당돌한 자로서의 행위'를 서슴없이 하게 되었을 것이고......


나.

어떠한게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로서의 나의 행동'이던가?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기뻐하며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던가?

그게 반드시 외적인 현상일 필요는 있던가?

내적인 면 만 추구하는 것이 옳던가?

이 일상을 '의사'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이웃'으로서

'코로나' 대 변혁 속의 '세계인'으로서



...........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의 태도를

어찌하면 견지할 수 있는가......가 오늘 내게 주시는 명제이신 듯하다.

레마.. 말이다.



주님.

'당돌한 요셉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매일을 사는 자'의 나

매사 주님 나라를 기다리며 바라 보는 하루를 사는 나는

과연

어찌 생각하고 느낄 수 있을까..

그게 어쩌면 큰 어려움이고 두려움일 수 있지만

주님 나라를 기다리면서 사는 자로서는

어찌 받아 들이며 살것이던가

고민하고 묵상해보길 바라심인 줄 믿습니다.


 이제

조금은 더 성장된 자,

주님 안에서 많은 '감해진' 날들을 보내며

십자가를 같이 질 수 있는

기쁨으로 그리하는 자 되길

주님께서 바라심 같습니다.


주여.

오늘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로서의 저에 대하여

하루 종일 생각하고 지낼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것..

도와 주소서.

주님 고난에 같이 기쁨으로 참예할 수 잇는 자 되길 원합니다.

몰약의 믿음,

조금은 덜 힘든 것 ,

쉽고 좋은 길만 갈구하던

그런 저를 벗어나

오늘 만이라도

주님 고난에 같이 동참하는 자되길 원합니다.

주여.

피할 수 있으면 그리하게 하여 주시되

아니신 주님의 원함이시면

달게 받게 하소서.


당돌한 믿음,

오직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로서의 매일을 사는 자의

그러한 믿음으로

절 키우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들어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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