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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적막 & 천국 목장 (렘 25:30-38 ) 본문

구약 QT

평화, 적막 & 천국 목장 (렘 25:30-38 )

주하인 2009. 10. 27. 09:14

제 25 장 ( Chapter 25, Jeremiah )

 

 

바람이 불면

언제

날아갈지도 모르는

풀같이

위태한 인생이여

 

마치

이 곳

자신이 피워낸

이것 들이

세상의 전부인양

살아가는

허탄한 존재 들이여

 

 

30.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 모든 말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높은데서 부르시며 그 거룩한

     처소에서 소리를 발하시며 그 양의 우리를 향하여 크게 부르시며 세상 모든 거민을 대하여 포도 밟는

     자 같이 외치시리니  
37.  평안한 목장들이 적막하니 이는 여호와의 진노의 연고로다  
38.  그가 사자 같이 그 소혈에서 나오셨도다 그 잔멸하는 자의 진노와 그 극렬한 분으로 인하여 그들의

      땅이 황량하였도다
 

 오늘도 여전히 '공의'의 하나님이 부각이된다.

그 분의 분노가 - 진노가 맞다 - '극렬한 분'으로 38절에 표현될 정도로 대단하시다.

그래서, 묵상이 어렵다.

늘 묵상이라면 조용한 장소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그 고요한 가운데의 평강이나 평안을 생각하게 하나

달콤한 것만 생각하다가는 '공의'의 하나님을 잊게 되는 부작용이 있음을 알고는 있다.

그럼에도 구약에 '권선징악'처럼 나타나는

특별히 한도 끝도 없이 되풀이 되는 달래심과 혼내심의 되풀이는

묵상을 하기 쉽지 않게 하는게 맞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밀은 누구나 풀수 없도록 '비유'로 되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묵상의 행간 행간에 숨어 있는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나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누구나 알기 쉽게 하는 것은 도덕책이나 소설책과 다름이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큐티를 하는 것은

그냥 습관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큐티 하는 법으로 여러개 나와 있는 방법을 일목요연하게 되풀이 함도 아니다.

 다행이도 난 처음 큐티를 접할 때

한방의  K원장님의 중요한 조언을 얻었다.  

묵상하기 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묵상한 다음 시도하고

그 분이 주시는 느낌을 가지고 묵상을 하려한다는 말이다.

그러다 보니 그게 바로 묵상의 주 포인트가 아닌가 싶다는 생각이 지금도 든다.

묵상은 '비어 있는', 아니 최소한 비우려고 노력하는 내 영혼에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말씀을 , 단어 하나든가, 영상이든가

거기에 집중하여 기도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처럼 묵상이 쉽지 않을 때,

도저히 말씀을 주시지 않을 때는 그날 하루는 조심한다고 한다.

주님께 혼날 일은 하지 않고...

  거기에 큐티 스크린이라는 김양재 목사님의 큐티 방법을

이전에는 적용해 보았었다 .

하나 하나 논리적으로 추론해 들어가다 보면 그 장면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

 두가지를 염두에 두고 한참 큐티를 열심히 할 때는

마치  묵상을 넘어서 직접 대면하는 것 같은

수도자들이 쓰던 '관상'이란 이런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짧게 - 영적 능력이 적어서 .- 지만 영상이 떠오르는

그리고 그 속에서 마구 얻어지는 영감이 밀려올 때가 많았었다.

 하지만 요새는 아침에 일어나면 매일 늦다.

주님 앞에 말씀을 읽고 나오지 못하는 게 부지기수다.

버스 안에서라도 열심히 하던 묵상이 이제는 MP3녹음으로..

그것도 자꾸 잊을 때가 있다.

그럼에도 날 지키는 게 '블로그' 에 묵상을 올리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약간이라도 주님의 말씀과 관계 있는 단서들을 잡아

글을 쓰다보면 어느새 주님이 인도하시는 글임을 느낄 정도로

나에게 꼭 필요한 내용으로 채워짐을 보며

그나마 그나마 주님이 부족한 날 붙들어 가시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공의와 진노가 극렬히 펼쳐지는 가운데

오늘 겨우지만 나의 뇌리에 잡히는 단어는 '진노'와 '평화'다.

무슨 의미인가?

 

 분노.

성질을 잘 내고

그것이 내 유일한 감정인양 오랜 세월을 살아왔던 나는

내 분노의 감정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보았다.

 내가 분노를 느낄 때는 주로 어느 때인가?

'무시 당한다'고 느낄 때다.

' 무식한 소리라 생각되는 소리'를 되풀이 할 때.

' 괜히 보기 싫은 사람 ^^;이 귀찮게 할 때..''

..........

굳이 어느 때라고 정확히 짚어 낼 수는 없지만

분노가 날 때는 대개 '조건'이 있다.

'누가 .. 어떻게 하니..그래서'이다.

그리고 그 분노를 유발하려면 어떤 영상인가 스치고 지나는 듯 싶을 때가 많다.

과거에 의미있는 타인이 비슷한 일로 나에게 분노를 유발하는 상황.

그 때와 비슷한 상황이 되면 나도 모르게 분노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

 분노는 상대에 대한 '미움', '속상함'이 그 기저 감정이 아닌가 싶다.

 거기에 자신에 대한 '좌절감'...

한마디로 '분노'는 '유치한 감정' 이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러기에 분노를 발하고 나면

시원한 듯 싶지만 '자책감'과 '열등감'이 그 뒤를 따라온다.

자신감 넘치는 사람들 중에 '분노'가 많은 사람은 별로 본적없다. ㅜ.ㅜ;;

 

 신종 플루가 엄청나다.

우리 병원 , 거점병원이다.

아침에 출근하려면 병원 마당에 마련된 신종플루 검역소와

우리 진료실 옆 대기실이 바로 소아과인데

소아과에 정말 폭팔하듯이 환자들이 넘쳐난다.

어찌 며칠 사이에 저리 많은가?

사람이 많으니 자주자주 '고성'이 올라온다.

'먼저 왔는데 . .. 늦게 .. '

고함이 고함이 마구 이곳 저곳에서 난다.

분노.

분노.

그들도 억울한 것이다.

억울한 정도가 별로 심하지 않을 것 같고 조용히 해도 될 것을

고성을 높인다.

그들은 '과거'의 어떤 조건인가 순간 영상으로 보면서 투사하는 것이다.

  일반 분노는 그렇다.

조건이 필요하다.

어딘가에 defect가 있는 자들이 분노를 잘 느낀다.

 그들이 유치해 보인다.

입장을 바꿔놓으니 분노를 잘 발하는 자들은 바보같다.

 

 이제 묵상 구절로 다시 돌아가 본다.

'진노'라고 표현되는 분노가 큰 상태.

가끔은 의분.. 의로운 분노라 표현되는 그 상황은 어찌 다를까?

주님은 '조건적'으로 반응하시는 분이던가?

그 분이 defect가 있으신 분인가?

나 같으면 미움의 감정, 속상함의 감정이 사라지면 분노도 가라앉음을 느끼는데

주님은 분노가 극렬해지면서 온 세상을 휘저으시는 데

그것은 어떤 상태인가?

무감각하신 분이시던가?

잘내시지는 않지만 한번 화를 내시면 냉철하고 냉혹한 킬러처럼

끝까지 유지시키시는 분이시던가?

감정이 없어서 이론 만으로

'잘되게 되어야 하는 데 저렇게들 수천 년 동안 변화가 없으니

한번은 물로 쓸었고

이제는 불로 쓸어 버리어야 겠다.'면서

무서운 진노를 끝까지 유지시키는 냉혈...?

솔직히, 분노 전문가 ^^;; 로서 주님의 저 진노를 이해해낼 수가 없다.

 가끔 인간 세상에도 눈물어린 분노가 있다.

교육적 차원에서 종아리를 때리면서도 눈물을 흘리시던

그 옛날의 참 교육자 상과 비슷하던 거 아닌가?

신사임당 같은 모친의 눈물어린 매질..

하지만 그들조차 그렇게 오랜 시간, 그리 대단히 유지되는 것은 아니었다.

 주님의 그 마음이야 어찌 짐작하겠는가 마는

그 분노의 길어지심과 대단하심을 유지하는

그 바탕은 무엇인가 참으로 궁금하다.

 정답은 아무리 생각해도

죄성있는 인간의 심성으로

상처입은 자들이 경험하는 분노로

원죄있는 인간 세상에서 사단의 영향력 아래에서는

도저히 짐작하기 어려운 감성이시지만

당신을 가장 닮은 인간지사에서 꼽아본 분노의 정체 중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위의 몇가지 사례다.

그 들의 마음을 들여다 보면 역시 '사랑'이다.

사랑으로 아픈 가슴을 만지시며

그 사랑 만큼이나 크고 오랜 노함을 내리시는 것이다.

눈물을 머금으시면서 내리시는 진노.

선을 위한 절대 사랑의 진노.

' 분노와 사랑'

양립할 수 없는 것 같은 감정이 주님 안에는 존재하시는 것이다.

 

 평화.

37절의 '평안한 목장'에 대하여 나온다.

평화, 평안

사람들이 말하거나 보는 평화는 어디까지인가?

 목장.

캐나다를 작년에 다녀온 적이 있다.

밴쿠버.

습기가 많은 동네라서인지 아침에 일어나 돌아본 양목장에

풀마다 이슬 방울이 맺혀있고 풀뜯고 있는 양 목장의 모습은

그야 말로 '평안' 그 자체였다.

거기에 가족 들끼리 - 자식들이 성공해서 좋은 직장 , 높은 직위에 있고

손주들, 조카들 모여 오손 도손 고기라도 구워 먹는 장면이 있으면 .. - 다정히 즐길 수 있다면

그게 평화에 대한 화룡청점이 아니던가?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누구나 돈을 벌어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본 것들을 이루어 놓고

그 안에서 편안한 노후를 즐길 무의식적 욕구로

그리도 '성공' , '성공'을 외치며 전력투구를 하지 않던가?

그러나, 그게 과연 평화인가?

정말 성공하여 부와 권세와 자식들의 성공까지 다 이루어 놓아도

그리하여 그 목장에서 평화로운 양떼, 소떼.. 뛰놀게 하는

구름 걸려 있는 까마득한 초장 위의 평화처럼 보이는 것을 가졌다 해도

그게 과연 평화일까?

 여호와의 진노가 임하면 '평화'로운 목장이 '적막' 목장으로 바뀌게 된다.

 평화와 적막.

일견 보기에는 같은 한산함이 있더라도

그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진노와 평화.

오늘 다른 두 주제를 가지고 묵상을 할 때

다르지만 공통된 무엇이 있는가?
진노지만 사랑이시고

평화지만 적막이다.

두 주제 모두 전혀 다른 내용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것하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하고는 전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의 바램은

 우리의 감각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생각할 것이 있다.

주님의 분노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두려워 하고 무서워서 묻어두거나 피할 것인가?

진짜로 주님은 날 사랑하시니까 지금과 차이없는 삶을 영위하여야 할 것인가?

세상의 삶을 전력투구할 것인가?

내가 바라고 목표하는 것을 지금처럼 유지하고

썩어 없어져 버릴

주님의 진노의 바람 만 불면 지푸라기 처럼 날아가 버릴

거짓 평화의 꿈을 유지하고 살 것인가?

천국,

그 진실의 평강의 목장에서 살 때를 생각하여

진리를 받아 들일 것인가?
 새로운 세상을 보라는 이야기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껏 보아왔던 세상을 보는 눈, 즉 세계관의 대 변혁을 의미한다.

그것은 쉽지 않다.

세상이 가만히 두지 않는다.

사단이 그냥 두지 않는다.

아니 여기에 평화가 있는 데 어딜 가냐고 한다.

눈에 보이지 않고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는 유치한 천국을 왜 사모하냐고 한다.

비웃는다.

여기가 좋사오니..한다.

부어라 마셔라.. 한다.

저기에  평화로운 양떼가 눈 앞에 보이는 데

조금 만 더 있자고 한다.

그대로 살자고 한다.

 사단 세상의 세계관이

진리를 보는 세계관으로 바뀜을 두려워 한다.

무섭고 잔인하다 한다.

두렵게 한다.

 

 하지만 가야한다.

주님이 사자의 굴 속에서 나오듯이

사랑의 매를 들고 극렬히 분을 펴시기 전에

매 맞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주님은 살아계시다.

 

 

 

적용

 

1. 신종 플루의 창궐이 무섭다.

  주님의 진노의 한 예가 아닌가 생각한다.

 유전 영역에 도전하는 인간들에 대한 '매'다.

 신종 플루는 유전자 변형의 산물이다.

 앞으로는 어떠한 질병이 나올지 모른다.

 

2. 주님은 진노하신다.

 진노는 사랑이시다.

 어서어서 회개하자.

  우리가 할 일은 그것이다.

 그날이 감해질 것은 그 방법 뿐이다.

 잘못한 일은 어서어서 십자가 보혈로 씻자.

 성령의 도우심으로 씻기움 받고 새로운 마음으로 나가자.

 

3. 진실한 평강이 무엇인지 깨닫자.

 주님의 나라다.

 심령천국이다.  

 주님은 기쁨이시다.

 주님은 평화시다.

 그 분의 임재하심을 느낌은 전율이다.

 거짓 평화여,.. 가라.

  주님 앞에 늘...

 

4. 성경 일곱장 읽겠다.

 늘 깨어 있자.

 

5. 주님의 진노에 대하여 생각하자.

  나에게는 감해지는 것이 분명하다.

 세상은 안변할 것이다.

 세상에 내려지는 채찍은 그대로실 것이다.

 혹여 나에게 놓여질 어떠한 일도 있을 지 모른다.

 그렇지만 내 마음은 늘 사랑으로 채워지길 빈다.

 주님의 뜻을 깨닫자.

 

6. 분노.

 내 분노는 모두 공의롭지 못하다.

 주님의 원하심은 성령의 열매다

 분노는 가능하면 피하되 실수로 발하면 얼른 회개하자.

 

7.  세상의 거짓평화에 목매달지 말자.

 그 성공이 주는 짜릿함에 탐닉하지 말고

 그렇지 못함에 좌절할  이유 없다.

 자연스러움이 오늘 말씀의 주제다 .

 당황할 이유도 반대할 이유도 없다.

주어지면 평화는 누리면 되고

 안주어지면 주님이 허락하심을 누리면 된다.

 

 

 

기도

 

 

 주님.

구약 묵상은 참 힘이 듭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분노에 대하여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주님의 그것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주님은 어찌되었든, 그 분노조차 사랑이 아니면 해석이 안되는 분노가 맞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노를 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눈물어린 분노자 이셨을 것 만 같습니다.

우리에게 보이기 싫어 돌아 앉아 눈물 흘리시는...

그 긴 기간 동안 발하시는 종말적 분노에 임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눈 밑이 눈물로 헐으신 아버지' 모습이 보입니다.

주여.

이 거짓 평화에 속지 않도록 하소서.

평화 목장은 적막목장이 맞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천국 목장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진실이신 예수님

진리이신 예수님.

 

주님 안에서 온전한 평화를 누리길 소원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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