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한 QT
책責(막12:13~17) 본문
2007-03-22 마가복음 (Mark) 12:13~12:17
13.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catch him in his words 하여
책 잡으려 한다.
영어로 '말 실수를 잡으려 한다'
악한 목적을 가지고
14.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화려한 수사를 동원하여
상대를 실수에 빠드리게 하려는 목적.
오늘 예수님께 하는 바리새인들의 말을 보면 하나도 이치적으로 틀림이 없다.
15.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그러나
그 마음이 순순치 못함을 아시고
" 어찌 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고 물으신다.
그런 다음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 주님께 보이시라고 하신다.
이 장면을 묵상해 보았다.
아마도 그 목소리가 부드러우셨을 것 같다.
메마른 냉정함도 아니고
화를 자제하는 말투도 아니실 것이고
더구나 화를 내면서 하실 것은 더더구나 아니었을 것이며
억지로 웃음을 띠시지는 않으셨을 것이시다.
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만일 "이 글이 뉘것이냐?" 라는 말투에 위에 상상해 본 부드럽지 않은 말투를 대입하면
진행이 버걱 거리는 연출가의 연극을 보는 듯한 생경함이 있을 듯하다.
틀림없이 그 분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으시고 말씀을 이어갔을 것이다.
" 이 글이 뉘것이냐?"
17.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amazed at him.
그러한 추정은
저희들이 머쓱해지지도 않고
당황해 했다는 흔적도 볼 수 없고
화내지는 더더욱 안했으며
단지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라는 많이 놀랐다는 표현을 쓴데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들의 심사는 아직도 자기들의 속내가 들켰을 것이란 것을 짐작조차 못하고 시치미 떼고 아무렇지도 않듯이 대화를 하고 있다가 예수님의 대답이 너무나 炫氣어린지라 상상도 못하고 있다가 진실을 찌르는 , 정곡을 찌르는 말씀에 아직도 정확한 이해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알지 모를 겸허함이 그들의 마음을 둘러 싸게 된 것이다.
날 그 상황에 대입해 보았다.
분명코 난 그들에게 화를 버럭 냈을 것이다.
아니면 속으로 그들의 속내를 짐작하고
그들이 나를 잡아 넣을 악한 냄새가 싫음을 표현 했을 것이거나
아니면 두려워 얼른 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끝까지 평정을 잃지 않았으며
정면으로 그들의 말을 반박하지도 않으셨다.
무언 중에 그들의 말이 예수님께 인정되었다는 느낌을 주셨으며 반박대신 특별한 지혜로 그들에게 진실을 직면케 하는 방법을 쓰셨다.
왜 그러셨을까?
그 분의 능력과 하나님으로서의 자격이 미물보다 못한 악한 바리새인 들에게 얼마든지 말 한마디로 징벌을 주셨을 수도 있으셨으면서.. .
그 분자체가 사랑이시다.
그분은 나에게 가르치시고 모범을 보이실 이유가 있으시다.
위에 논리를 전개하도록 하시는 바 결론인 '긍정'과 '변함없는 온유'와 '지혜'를 모범을 보이시는 것이시다.
그것은 하나하나 배우기를 바라시는 것이시다.
배우기를 바라시는 또다른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는 내 행동의 일거수 일투족이 남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를 보고 배우려는 많은 자들이 혹 있을 줄도 모른다.
예수를 닮으려는 자가 어찌 예수님의 향기가 나지 않아서는 되겠는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란 전제를 빼고도 나랑은 어찌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이신가?
난 긴장하고 살아왔다.
항상 혼날 까 그로 인해 자존심이 다칠까 ..
모든 걸 분석하고 쪼개는 습관은 사랑이라든가 겸손이라든가 배려라든가 남을 위하여 모범을 보이는 관계적 차원에서 부족함을 유발하였다.
모든 면에서 그렇듯이 주님 예수님은 늘 하나님을 의식하고 계시는 분이시고
수천년의 시공을 넘어선 나를 위하여 이러하고 계시는 것이시다.
어제 저녁 중국어 공부를 하고 있던 차 들어온 분의 발언 한마디에 마음의 짐을 지고 집에 갔다.
물론 나랑은 하나도 상관없을 수 있는 이야기 임에도
그분의 평소 언행과 내 오랜 습관이 내 속에 혼란을 유발할 여지가 충분한 일이었다.
주님의 말씀 앞에 많은 부분 정리하고 선한 생각으로 나를 정리 해 나가도록 되었지만
아침에 일어날 때 가슴 한구석이 흔들리려고 했다.
마음의 짐은 날 책하는 듯 받아들여진 내 인식의 오류 탓이기도 하겠지만
현실을 가져다가 대입해 미래를 걱정하는 내 오랜 습관이 발동하려는 탓이기도 했다.
가만히 주님 앞에 내려 놓는 시간을 가지고 출근하면서 들여다 본 큐티.
틀림없이 말씀을 주신다.
( 재미있고 스릴이 넘쳐도 이런 모범은 곤란 합니다. ㅎ)
'책'
그리고 '대처'
주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악한, 아무 가치도 없을 듯 한 바리새인들에 대하여서도 차분히 대하셨다.
끝까지..
난 이걸 배워야 한다.
주님을 본받아야 한다.
그 분은 그 후에 그 일을 기억에 담을 일도 없었다.
그냥 내려 놓으셨다.
주님 하나님과 늘 동행하시는 주님 예수님은 이렇다.
세상의 어이없음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신다.
그들에게 보이는 반응은 그냥 그들과 나에게 , 세상에 존재하는 당신의 선택된 자녀들을 위해서 본이 될 때만 행하신다.
그것도 사랑으로.
문제는 이것이다.
세상은 세상으로 반응하면 스스로 책에 걸릴 뿐이다.
책으로 스스로를 묶는 일이 생길 것이다.
눈을 들어 주님을 보라.
그분이 해결하시길 그냥 기다리고 그분에게서 지혜를 배우라.
현실의 문제는 받아들이고 기다리자.
반발하고 해석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의 그러한 모델 학습의 결과는 내 뒤를 따르는 또다른 영혼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다.
늘 주님과 이웃에 관점을 맞추자.
주님
감사합니다.
모범이 되신 그 모습을 닮길 원합니다.
늘 지혜를 주소서.
오늘의 모습을 잊지 않고 비슷한 상황에서 기억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보이시던 그 모습대로 반응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사랑을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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